역사와 한문을 공부하는 대학생들이 몇 명 찾아왔다. 고운 최치원 선생의 제시석題詩石을 탁본하러 왔다고 했다. 나 역시 갓 출가하여 모든 것이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동료 학인 스님들 몇 명과 함께 그것을 탁본해 본 일이 있다. 그 글씨는 가야산 입구 홍류동 계곡에 세워져 있는 정자인 농산정 맞은편에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 중간쯤에 초서체로 새겨져 있다. 물론 한두 명 정도는 올라가서 작업을 할 수 있는 튀어나온 바위공간이 그 앞에 있기 때문에 일을 치러내기가 그렇게 까다로운 것만은 아니다. 그 글씨는 본래 농산정 앞 계곡 바위 표면에 새겨져 있던 것인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물살 때문에 마멸이 심해 알아볼 수가 없게 되자 조선시대 때 우암 송시열 선생이 오래 보존하기 위하여 인근 절벽에다가 다시 새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전해진다. 원문이 새겨져 있던 곳에는 지관 큰스님께서 몇 년 전에 이러한 사유를 적은 까만 비석을 세워 놓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남아 있던 원본글씨 몇 글자를 도드라지게 다시 파서 옛 흔적을 지금껏 이어가고 있다. 그 초발심 시절에 탁본이라는 것을 처음 해보았다. 물론 경험 있는 스님들이 앞장서서 먹물과 버너·솜방망이 그리고 한지를 준비했다. 허기를 달래기 위한 간식거리도 따로 챙겼다. 도보와 버스를 이용하여 현장에 도착한 뒤 준비물을 풀고나서 바위를 타고 올라갔다. 밑에서 바라볼 때는 아담한 크기였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우리 키를 훌쩍 뛰어넘는 높이였다. 전지全紙를 다 덮어야 빠듯이 가릴 만큼 만만찮은 길이와 너비였다. 테이프를 붙여 고정을 시키는 사이에 한쪽에서는 먹물을 끓였다.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학인이 설탕을 넣어 끓이면 점성粘性이 좋아진다고 하여 준비해 온 설탕도 함께 넣었다. 거품이 나면서 먹물이 끓기 시작했다. 거품은 이내 없어졌다. 옛날 팔만대장경을 인경할 때도 먹물에다가 풀을 쑤어서 함께 풀어 베꼈다고 한 것으로 보면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닌 모양이다.
솜방망이(공식이름은 마력이다)에 먹물을 묻혀서 발꿈치를 세우고 위에서부터 두드려 나갔다. 먹물의 농도조정이 생명이었다.
바람에 종이가 펄럭거려 옆에서 잡아주고 바람도 막아주는 유난을 떨면서 겨우 한 장을 완성하고 나니 목과 어깨가 뻐근했다. 그렇게 4~5명의 대중이 한나절 공을 들인 끝에 원하는 숫자만큼의 탁본을 얻을 수 있었다. 나에게도 몇 점이 돌아왔다. (누구에게 주어버렸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그 때 생각이 나서 그 학생들에게 ‘지금도 먹물에 설탕을 넣어 끓이느냐?’고 물었더니 도리질을 한다. 설탕은 고사하고 먹물을 끓인다는 이야기도 처음 듣는다고 했다.
올해는 해인사가 창건된 지 1200년이 되는 해이다. 10월 1일 개산대재를 준비하다보니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해인사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행사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하기 위하여 해인사 관계 전적을 열람하였다. 창건 내지는 중수重修와 관련된 가장 오래 된 기록 중 〈해인사 선안주원벽기善安住院壁記>, <신라 해인사 가야산 결계장기結界場記〉와 창건주 이정·순응 대화상의 시詩와 찬讚, 그리고 중창주 희랑希郞 대덕스님에 관한 시가 여러 편 전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와 시대를 알 수 없는 〈가야산 해인사 고적기古籍記〉를 제외한다면 해인사 관련 고기록은 거의 최치원 선생의 저작이라 할 것이다. 이런 것을 고려한다면 최치원 선생이 남긴 해인사 기록의 중요성은 가히 말로 다할 수가 없다. 선생은 해인사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모양이다. 꽂아놓은 전나무 지팡이는 지금도 학사대에서 그 푸르른 위용으로 그 분의 기개와 정신을 만대에 전하고 있다. 〈결계장기〉에서 말한 ‘금강석처럼 단단하며 우뚝 솟은 옥 같은 사찰(介如金剛 然玉刹)’이라는 해인사 찬가는 왜 그가 만년의 열반지로 이 곳을 선택했는가를 알게 해준다.
다행히도 그의 형 현준賢俊 스님은 화엄종의 대가이며 당시 해인사의 큰스님으로서 산중에 머물고 있었다. 이것이 고운 선생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현준 스님이 그의 ‘모형母兄’이라고 되어 있다.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가 같은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육두품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인한 좌절감과 가족사의 애잔함이 함께 묻어나온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우애는 돈독했던 모양이다. 형이 동생의 문장력과 불교적 안목을 알고 있었기에 이런 많은 기록들을 남길 것을 의도적으로 부탁했을 것이다. 또 동생은 기쁜 마음으로 응했을 것이다. 승려인 형과 유학자인 동생의 형제애가 결과적으로 해인사의 옛모습과 정신을 기록으로 남기는 역사적 행위로 연결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사상적 편력은 해인사 절집안으로서는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퇴계 선생에 의하여 ‘(최치원을)유학자로 문묘에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기록을 남기도록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한 종교사상에 국집된 그런 편협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도가풍의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는 진대밭골은 지금도 옛날 그대로 갈대만 무성하다.
몇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 학생들의 작업솜씨와 완성도가 궁금하여 농산정으로 내려갔다. 멀리서 보니 바닥에다가 종이를 붙여 놓고 두드리고 있었다. 국립공원 관리자들이 제시석을 탁본하지 못하도록 했거나 혹은 제시석을 잘못 알고서 엉뚱한 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가 싶어 황급히 달려가 그 이유를 물었다. 비 온 뒤 얼마 지나지 않은 까닭에 바위에 남아 있는 물기로 인하여 절벽에 종이가 붙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바닥에 쓰인 이름도 없는 글씨를 습작 삼아 탁본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그냥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창 선운사 입구에 있는 백파 선사 비문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로 이름이 높다. 비문 내용인 그 스님의 수행력과 행적의 내용 파악은 뒷전이고 그저 추사글씨라는 이유로만 유명해진 비석이다. 그 유명세 때문에 하도 분별없이 탁본을 해대는 통에 비의 손상을 우려하여 그 제자 스님들이 비석 몸에다가 콩기름을 두텁게 발라 놓았다. 미끄럽게 만들어 아예 탁본할 종이를 붙이지도 못하도록 해 놓고서 보존을 하고 있다. 혹여 제시석도 그런 날이 오기 전에 나도 탁본 하나 미리 해두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 옛날 잠시 익혀 두었던 솜씨가 제대로 나올는지 알 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