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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궁극의 일구一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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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看話禪 사상 - 인경 2002년 10월 248호
삼구三句가 아닌 일구一句에 대한 대혜의 강조는 그의 전 어록을 통해서 매우 지속적이고 일관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이를테면 대혜는 <상당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자꾸 묻는다.

범부와 성인도 가지 못하거늘

어떠한가 이 마지막 구(末後句)는?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이해할 때,

바로 이때 몸을 바꾸는 일구는 어떠한가?

말해보라.

대지는 오래고 하늘은 길어 끝이 없다.

바로 이러한 때, 시간과 절기에 의지하는

일구는 어떠한가 말하라.

같다 같지 않다. 그렇다면 말하라.

최초의 일구는 어떠한가?

말하라.

항상 식정을 벗어난 일구는 어떠한가?

표현이 약간씩 다르지만 대혜가 한결같이 묻고, 대답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일구이다. 더구나 일구에 대한 언어적인 이해가 아니라, 모든 경계, 시간과 공간, 인식의 한계를 벗어난, 경절徑截에 의한 한가닥의 통찰이다. 그 곳에는 ‘다만 일구에 의지할 뿐, 사사로운 말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보면 대혜의 일구는 ‘제일구에서 깨달으면 조불祖佛의 스승이 된다’고 하는 임제의 제일구에 대한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의 제일구는 제이구나 제삼구에 상대되는 일구가 아니다. 만약 상대적인 일구였다면, 원오극근悟克勤에게 보인 불안청원佛眼淸遠 선사(1067~1120)의 손가락은, 흉내내는 상좌의 엄지손가락을 자른 구지俱 선사처럼, 칼로 잘라버려야 한다. 아니면 그것은 넌센스의 장난에 불과하지 결코 선문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사의 언구를 중심으로 선사상사를 조망해 보았을 때, 삼구에 대한 임제종파의 논의가 대혜에 이르러서는 간화선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일구에 대한 자각으로 통합되었다는 가정을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선사상사에서 볼 때, 문답의 축이 삼구로부터 일구로의 이행이라는 가설에 대해서 반론도 충분하다. 왜냐하면 일구에 대한 인식은 약산유엄藥山惟儼(751~843)이 원지圓智 선사에게 ‘나에게 일구자가 있으나,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제시한 경우나, 위산영우山靈祐(771~853)가 향엄香嚴을 위해서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일구를 일러 보라’고 요구한 것이나, 암두전활巖頭全(828~887)이 설봉의존雪峰義存(822~908)에게 ‘마지막 일구를 일러두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고 한 문답들을 들어서 이미 일구에 관한 인식은 당대에도 존재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일구는 많은 문답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대혜처럼 분명한 자각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선사상적인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중요한 점은 대혜는 이들의 일구에 대한 사상을 발전시켜서 간화선의 철학적인 기초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출가자들을 상대하는 상당법문에서는 일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고 대중에게 직접적인 대답을 요구하지만, 사대부들이 요청한 《보설普說》이나 《서장書狀》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설명과 철학적인 의미부여를 하곤 한다.

조사의 언구 위에서 증거삼아 논하지 말라. 이를테면, (……) 약산유엄이 어느날 말했다. 나에게 일구가 있는데 수소가 새끼를 낳으면, 그것을 말해 주리라. 그러자 한 승려가 나와 말했다. 수소가 이미 새끼를 낳았는데, 화상께서는 왜 말하지 않는가? 약산은 말했다. 등불을 켜라. 그러자 그 승려는 자리로 돌아갔다. 훗날 이것에 대해서 새끼를 낳았다면, 수컷인가 암컷인가 묻고, 스스로 모두라고 대답하거나, 또 사량하여 언하에 낳지 않았다는 이해를 낸다. (……) 오늘날 이같은 견해를 짓는 이들이 심히 많다. 다만 고인의 언구 상에서 제시할 뿐, 언구 위에서 견해를 짓지 말라.

약산이나 위산의 일구는 처절한 자기의 실존적인 고뇌로 전력을 다해 대결할 문제이다. 깨달은 자에게는 ‘이미 수소가 새끼를 낳은’ 그것은 불립문자의 근원적인 일구이다. 그러나 어떻게 수소가 새끼를 낳고,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에 일구를 말할 수 있는가? 이런 모순과 갈등은 총명이근이나 뛰어난 상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일구가 되어 가슴을 찌른다. 그러나 위 두 가지의 문답에서 첫 번째의 문답보다도 두 번째의 문답이 극적이고 감동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새끼를 낳았다거나 낳지 않았다거나 어떠한 해답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미생전의 일구는 일체의 상대적인 개념 구조를 통해서 상처처럼 각인되지만, 향엄 스님처럼 부모미생전 소식을 알기 위해 모든 경전을 뒤졌으나 답을 구하지 못하고 정처없이 행각을 다니다가 대나무 맞는 소리가 계기가 되어 일시에 갈등구조를 타파하면서, 천지를 드러낸다.

이 때의 일구는 모든 개념의 갈등구조를 자신의 내면으로 수용하여 타파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곧 이것이 화두話頭의 의미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대부나 총림에서는 선대의 공안公案을 머리로 따져 공부하는 이들이 상당히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사량분별로 ‘새끼는 암컷인가 수컷인가’를 다시 생각하고, ‘낳았다 낳지 않았다’는 견해를 짓고, 그럼에도 불구하도 잘못된 스승들은 ‘그것이 잘못된 공부인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경우가 있었다’는 점을 대혜는 통렬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공안의 대립된 구조를 ‘조사의 언구를 증거 삼아’ 언어적인 설명이나 논리적인 이해로써 타협해 버리는 행태를 비판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고인의 경절처를 굽어 돌아가는 길로 다시금 바꾸어 버리는 일’이다. 대혜로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태도이다. 그러므로 이차적으로는 대혜의 일구는 비판적이고 일체를 일도 양단하는 칼날로 이해된다.

대중에게 보이다. 바른 눈을 활짝 열어제치니, 수많은 성인이 어찌할 줄을 모른다. 일구로 말미암아 만별천차의 길이 일시에 끊어진다. 의식으로도 알지 못하고 지혜로도 알 수 없다. 성인도 아니고 범부도 아니다.

온갖 차별이 끊어진 자리가 바로 일구이다. 이는 성인도 아니고 범부도 아니다. 온갖 사려분별을 태워버리는, 가까이 접근하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태워버리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불꽃이다. 이 같은 일구에 대한 이해는 암두전활의 일구와 가깝다.

선의 핵심은 반드시 오직 일구를 아는 데 있다. 무엇이 그 일구인가? 온갖 생각이 없을 때, 이것이 바로 올바른 구句이다. 이는 정수리에 머문다, 안주安住를 얻었다, 역력歷歷하고 성성惺惺하다, 바로 이런 때라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때 일체의 시비是非를 한결같이 타파한다. 그러나 이러한 때는 곧 이러한 때가 아니므로 시구是句도 비구非句도 거부한다. 마치 한덩어리의 불과 같아서 접촉하는 것은 곧 태워 버린다. 어떤 것이 거기에 가까이 가겠는가?

대혜는 서장에서 암두의 이 유명한 법문을 인용한다. 아마도 대혜는 ‘선의 핵심은 오직 일구에 있다’는 암두 선사의 법어에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일구를 투과하면, ‘만상萬象은 현전現前한다’는 경절직입徑截直入의 가풍家風에 잘 맞는 선교방편善巧方便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사대부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곧 공空에 떨어진 것이 아닌가요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량하고 분별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계교計較하여 맞추는 것은 식정識情이며 생사生死를 따라 유전流轉하는 것도 식정이며 두려워하거나 성급하게 구하는 것도 식정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참선하는 사람들은 이 병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식정 속에서 부침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한편으로는 일구에 관련하여 한결같이 대혜는 공부인들이 고인의 공안을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경우로 활용하고 있다. 그것은 공안의 경절처를 개념적인 분별이나 정서적인 문제로 환원시키는 오류를 경계함이다. 그러나 경절처를 알지 못하는 사대부나 수행인은 자꾸 식정으로 구하려 하고 그렇지 않으면, 공空에 떨어진 것이 아닌가라는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인데, 그 대책은 원오悟가 지적한 바와 같이 고인의 일구를 의심함으로써 그것을 불조의 공안公案을 타파하는 것을 일로 삼는 것이 바로 간화선看話禪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