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적멸궁은 열반의 세계다. 그리고 화택문은 욕망의 세계다. 번뇌의 세계다. 중생과 부처가 다르다는 것은 욕심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욕심이 없다면 부처의 세계요, 욕심이 있다면 중생의 세계다. 그렇다면 욕심이란 어떠한 마음인가 협소한 마음이다. 아주 작아서 바늘끝도 들어갈 틈이 없는 좁은 마음이다. 거기에 비하여 발심(發心)이란 확대된 마음이다. 넓은 마음이다. 욕심이 떠난 무집착, 무소유의 마음이다.
발심이란 마음을 낸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마음을 확대시킴이다. 본디, 중생의 마음은 부처의 마음과 별반 다름이 없는 넓은 마음이다. 똑같은 불성을 지닌 고귀한 마음이다. 그런데 ‘욕망’이란 집착이 소견을 좁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발심이란 ‘마음의 발견’이다. 본디 넓은 마음임을 발견함이다. 발심이란 ‘있는 마음 그대로’를 낸다는 뜻이라기보다 확대된 마음, 넓은 아량임을 확인함이다. 발심이란 마음의 잘못된 때를 제거함이다. 마음의 때, 즉 번뇌가 끼어있는 한 그 마음은 넓을 수가 없다. 욕망의 때를 제거함이다. 노여움을 곧잘 띠는, 그 때를 제거함이다. 본래로 그 마음이 넓은 마음임을 모르는 우치를 제거함이 발심의 작업이다. 어리석다는 것은 어리숙한 것과는 다르다. 능동적이냐 피동적이냐는 생각보다 큰 차이를 이룬다.
발심이란 ‘포용하는 마음’이다. 발심의 ‘발’은 포용의 뜻이다. 포용하는 마음이 발심이며 그 마음이 있을 때 보시(布施)가 이루어진다. 원효스님은 말씀하신다. “사물에 대하여 탐욕하고, 소유물에 인색함은 마구니의 권속이요 사랑과 연민의 정으로 베푸는 것은 그대로가 법왕의 자손이다.” 그렇다. 보시는 베푸는 행위에 앞서 포용함이다. 마음이 우선 넓어야만 보시는 이루어진다. 보시는 받아들임이다. 모두를 포용함이다. 포용은 욕망과 인색에 찌든 마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 마음으로부터 욕망의 찌꺼기를 완전히 씻어낼 때, 포용은 이루어진다. 포용,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베품이다. 발심이란 그러기에 포용하는 마음이요 베푸는 마음이다.
발심이란 ‘굳은 결심’이다. 이제까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중생의 위치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였는가를 분명히 인식하여 거보(巨步)를 내디딤이다. 우리는 ‘발심(發心)’을 보통 ‘마음을 내다’로 해석하고 있으나 그 보다는 ‘마음을 확대시키다’ 또는 ‘확대된 마음’ ‘포용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풀이하는 것이 훨씬 더 원효스님의 본 뜻에 잘 어울린다고 할 것이다.
확대된 마음은 벽이 없는 마음이다. ‘나’다, ‘나의 소유다’하는 집착과 욕심과 인색함을 떨쳐버린 마음이다.
원효스님은 신라 제26대 진평왕 39년(617년)에 태어나 686년 신문왕 6년 3월 33일에 입적한다. 세수(世壽) 70세에 법랍이 60이다. 원효스님은 우리 한국의 역사상 가장 커다란 횃불로서 추앙받는다. 뛰어난 사상가요, 대승송불교의 선구자다. 민중 속으로 부처님의 어려운 가르침을 이끌고 들어가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평이하게 설한다. 원효스님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아직 그와 같은 큰 별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분이 왜 그처럼 위대한 분으로 우리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마음을 올바로 인식한 분이다. 마음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한 분이요, 마음을 확대시킨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욕망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방해하고 있음을 아는 분이다. 욕망을 떠나면 그대로가 부처임을 아는 분이다. 적멸궁과 화택문의 차이는 바로 욕망에 있음을 알고 있다.
왜 화합하지 못하는가. 동질성을 찾지 못한 까닭이다. 왜 다투는가. 마음에 서로 다른, 벽이 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포용해들이는 너그러움이 있다면 다툼은 쉬고 화합할 것이다. 원효스님의 입장에서의 화합이란 ‘하나’에로 귀납시킴이다. 하나란 무엇을 뜻할까. 십문화쟁의 원리를 살펴 보자.
공(空)과 유(有)는 같은가, 다른가. 도대체 같다면 무엇이 같고 다르다면 왜 다른가. 성(性)과 무성(無性)은 어떻게 풀이하여야 할까. 인(人)과 법(法)에 집착함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은 과연 동질성으로 볼 수 없는가. 진(眞)과 속(洛)이 뭐가 다른자 하나와 셋은 같은 것인가 삼승과 일승도 같은 것이다. 중생과 부처의 불성이 동일한 바탕으로 존재한다. 법신(法身)과 보신과 화선은 어째서 달리 해석되고 있는가.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은 말만 다를 따름이다. 삼성(三性)과 일성(一性)은 결국 다를 게 없다.
이들 열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원효스님은 역설한다. “다투지 마라. 작은 냇물이 바다에 이르면 동일한 싼맛이 된다. 그들 모두를 ‘바닷물’로 부른다. 거기에 작은 냇물, 또는 강물의 본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넓은 마음으로 세계를 보라. 확대된 마음으로 모두를 받아 들이라. 뭐가 두려운자 받아들이는 마음이 베품이다. 너그러운 마음이다. 다툼을 그쳐라. 너그러운 자가 되라. 거기에는 중생이란 딱지가 붙지 않는다. ’
절의 문 앞에 며칠 째 봉고차가 주차해 있다. 저녁9시가 좀 넘으면 다음날 8시까지 의레껏 문을 가로막아 차를 세워둔다. 누구의 행위인가는 모른다. 겨우 몸을 비집고 드나들 수 있도록 차를 세우는 데는 주차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가를 말해준다. 옆의 공터는 버려두고 하필이면 문을 가로질러 차를 세우는 것일까.
어느날 새벽예불을 끝내고 나는 수성매직을 들었다. 비가 계속해서 내리던 때이므로 수성매직이 아니면 금세 번져버리기 때문이다. 매끈한 종이를 펴놓고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옴 아모까 살바다라 사다야 시베 홈. 선생님, 시간이 나시면 위의 주문을 자주 외우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선생님의 원하는 바를 성취시킬 것이요, 뜻하지 않은 재앙으로부터 선생님을 지켜줄 것입니다. 아울러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절문을 조금 비켜서 차를 세워 주신다면 산승의 답답한 가슴이 좀 트일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래에 적는 주문도 늘 외우십시오. 옴치림”
그리고 아래에다가 ‘원각사 시자(持者) 동봉 합장’이라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봉고차 앞 유리 와이퍼에 끼워놓았다.
그 뒤로 그치는 아직까지는 한 번도 정앞의 문을 가로질러 주차하지는 않았다. 함께 주석하는 스님이‘알아서 옴직이는 수레’를 한 대 갖고 있는데, 안테나를 휘어잡아 꺾어버리지를 않는가 하면, 도량에 쓰레기 봉지를 몰래 갖다놓는 경우는 너무나 허다하다. 심지어는 도량에 들어와 실례를 하고 가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모르지만.
왜 그럴까. 어째서 꼭 그렇게 해야 할까. 그렇게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일까. 마음이 확대되지 않아서일 것이다. 본디 갖고 있는 넓은 마음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또한 어리석음 때문이리라.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하여, 그 행동에 의한 결과를 가져옴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아직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확대된 마음으로 바라보면 내적 공간과 외적 공간이 다를 게 없다. 확대된 눈으로 사물을 파악하면 모든 소유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폐수를 흘러보낸 자는 그 자신이 그 폐수에 의해 병들어감을 모른다. 산과 바다가 모두 성스러운 성역이라 보는 눈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바캉스를 즐기고 와도 쓰레기는 남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주거 공간은 몇 명남짓한 방(房)만이 아니다. 이 산하 온 국토가 모두 우리의 주거공간이다. 삶의 공간 바로 그것이다.
발심한다는 것은 ‘마음을 연다’는 뜻이다. 닫혀진 문을 활짝 열고 바깥의 공기를 온통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음을 열어 모두를 받아들임이다. 나와 내것에 집착하다 보면 더 큰 것을 잃어버린다. 자기도 잃고 남도 잃으며 모두를 앓는다. 쓰레기로 온 강과 바다를 오염시키면 우리는 모두를 잃는 것이다. 내 수레〔車〕 깨끗하게 하자고 냇물을 오염시킨다면 작은 것에 집착하여 큰 것을 잃는 것이다. 왜일까. 큰 것과 작은 것은 하나로 통해 있기 때문이다. 나와 이 산하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적멸궁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터놓은 마음으로 우리의 강하(江河)와 산야를 깨끗하게 하면 거기가 바로 적멸궁이다.
자, 그렇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마음을 넓힐까. !
‘종로는 110으로 가고 관악은 151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