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말짱 서른이 훨씬 넘어 출가하는 것에 견주어 보면, 열아홉에 늦깎이 소릴 들은 그 때는 참으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 아닐 수 없다.
대동아전쟁이 한창이던 일천구백사십년대 초반 그 시절엔, 동자로 절집에 들어가야 학교도 보내주고 스님들이 거두어 주었지, 나같이 늙으면 소용없었다. 나이 들어 중이 되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보다 두세 살 아래인 이들이 이미 강원을 졸업하고 어엿한 스님 노릇을 했으니, 열아홉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쓸모없는 나이였다. 그리하여 예불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그저 심부름꾼에 불과했다. 나보다 어린 스님들이 강당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보거나 장엄한 예불을 드리고 법당을 나서는 모습을 보면 내 신세가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나는 없는 것처럼 살리라’ 하고 출가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무엇에든 무심하고자 했던 단단한 다짐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그 참담함을 견디지 못하고 절집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 당시 백양사 강원은 우리나라 최고의 강원으로 오십여 명의 학인들이 모여 공부하고 있었다. 묵담 스님의 상좌인 봉화 스님이 강주로 계셨던 때였다.
그 시절 절집 풍속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지금이야 늦은 나이에 출가해, 자신이 삼고 싶은 은사를 정하기도 하나, 그 시절엔 어림없는 소리였다.
스님들이 나이 어린 행자들의 행동거지를 지켜보고 있다가, 대중공사가 열리면 은사스님이 정해졌다. 어른스님께서 대중스님들을 둘러보며, ‘저 아이 쓸 만하니 누가 거둬 주시지요’하면, 누군가 ‘저 아인 내 상좌 할랍니다. 머리는 내가 깎지요’ 했다. 그렇게 은사스님이 정해졌고, 또 누군가 ‘계는 내가 설해 주지요’하면 계사스님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은사스님이 결정되면 사미계를 받고 나서 강원에서 공부하는 거하며 그 밖의 먹을 것 등 모든 비용을 은사스님이 부담하여 상좌를 키우곤 했다. 그러므로 은사스님이 나서지 않으면 중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열아홉 늙은 나는 아무도 중 노릇 하라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일만 하고 있었으니, 소시장에 말 매어 놓은 듯 얼마나 어색하고 궁색한 모습이었겠는가. 그러나, 더디게라도 마침내 올 것은 온다고 했던가, 한 일년을 그저 아무 생각없이 일만 했더니, 하루는 만암 스님께서 불러, ‘사미계를 받으라’ 하셨다.
그러시더니 죽어 버린 당신의 상좌 앞으로 이름을 붙여 주셨다(이를 이른바 위패상좌라고 한다). 만암 스님의 손상좌가 된 것이긴 했으나, 후원자가 되어 주어야 할 은사 스님은 없었으니 참으로 허망한 일이었다.
글쎄, 지금 같았으면 있지도 않은 분을 은사로 삼게 했으니 절집을 나와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모든 욕망을 포기하고 없는 듯 살리라고 절집에 들어왔으니 시키는 대로 하리란 생각뿐이었다.
계를 받고 나자 만암 스님께서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돈이 없어 너를 가르치지 못하니 네 스스로 배우도록 해라.”
살았으면 족히 대통령이 되었을 거라던 내 장형이 열일곱에 장가를 갔다가 열아홉에 죽자, 내 나이 열넷에 아버님이 홧병으로 돌아가시고, 열일곱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그렇게 인생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열아홉에 출가했던 터였다. 부처님께서 사십구년 하신 법문이 ‘제행諸行이 무상함’ 아니던가. 그러니 무엇을 기대했겠는가. 나는 그 때 무심보다 좋은 약이 없다는 것을 깨우쳤다. 만약 그 때 내가 이런저런 시비를 가렸더라면, 그래서 복이 없음을 한탄하고 불행하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더라면, 수행자로 예까지 왔을까.
세상에 없는 길은 없다. 없으면 만들면 된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자에겐 언제나 길이 열리는 게 세상사 이치다. 남들은 은사가 주는 돈으로 먹고 공부했으나, 나는 내가 벌어 먹고 공부했다. 세속말로 고학을 한 셈이다.
사미계를 받고 나서 의식절차를 배워 부전 노릇을 해서 밥을 얻어 먹고, 옷 해입고 책을 사봤다. 법당은 물론 극락전과 시왕전의 부전을 보았고 청소를 혼자서 다했다. 촛대를 닦는 일에서부터 풀 베고 눈 쓰는 일 등 안 해 본 것이 없다. 조석 예불을 끝내고 나와 각단 예불까지 하려면 몸이 열 개가 있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명색이 학인이라고 강원 이력을 마쳤다.
출가자는 ‘나는 출가해 참으로 올바른 스님이 되어야 겠다’는 발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발심 없이 억지로 사미계만 받아 놓으면 세속인과 다를 바 없다.
발심을 하려면 첫째 신심信心과 공심公心이 있어야 한다. 일의일발一衣一鉢로 정진하는 자가 수행자이거늘, 수행자로서 공적인 마음이 없다면 그건 자격상실이다. 신심이 우러나 탐진치貪瞋痴 삼독이 떨어져야 그것이 승려이다. 몇 년 전 돌아간 탄성 스님은 참으로 사심이 없는 분이었다. 공심만을 가슴에 담고 살다 가신 분이다. 그렇게 사는 게 승려이다.
주지 하라고 하면 도망다닌 옛스님들처럼 그렇게 공심으로 돌아가야 제대로 중 노릇 하는 것이다. 사심私心으로 살려면 마을에나 있을 일이다.
《치문》에도 나와 있듯, 수행자는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떨치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히 세상에 알려지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따르지 말라 해도 제도해 달라고 구름처럼 사람이 몰려들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행자는 성불하겠다는 굳건한 원력을 지녀야 한다. 원력을 잘못 세우면 돈이나 명예를 탐하게 돼 수행자로서의 생명을 잃게 된다.
《금강경》을 제대로 보라. 아상我相을 놓고 아만심我慢心을 버리라는 가르침 아닌가. 다른 이에겐 아상을 놓고 아만심을 버리라고 하면서 자신은 아만심이 탱천해 있다면, 이미 수행자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올바른 인간이 되는 게 불교다. 올바른 인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 양심을 속이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누구나 비양심적으로 움직이니까 세상이 시끄러운 것이다. 양심은 말 그대로 어진 마음이다. 남에게 해코지 않는 것이 양심이다. 사람이 아전인수로 살면 못쓴다. 내가 곤란하더라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살라는 것이 부처님 법이다.
또한 수행자는 언행일치가 되어야 한다. 말 다르고 행동이 다르면 누가 믿고 따르겠는가. 수행자가 언행일치가 되면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히 포교는 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있다’는 집착에서 벗어나 보라.
그토록 원하던 해탈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취재 · 정리 / 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