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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 강원의 꽃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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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대 - 원명_1 2002년 09월 247호
해인강원의 꽃이어라 해인사 강원에 방부를 들인 게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4월이었는데 어느새 하안거 막바지에서 마지막 기세를 부리는 더위와 씨름하고 있다. 처음 해인사에 발을 들여 놓던 기억이 눈에 선한데 그 어렵고 힘들다던 치문반 하안거 해제가 두 손가락과 발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시간은 이렇듯 빨리 흘러가는데 어제는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니, 베르그송의 말처럼 시간은 주관적 지속인가 보다.

강원에 입방하기 전에 만난 한 도반 스님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내게 당부한 말이 떠오른다. “어찌 됐든 하심下心하고 끝까지 참고 견디거래이. 여기 졸업하면 보살의 경지에 오른다더라.”

그 도반 스님의 뭔가 걱정스러운 눈빛은 잔뜩이나 주눅 들고 긴장하고 있는 내 마음을 더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도대체 해인사 치문반이 어떤 곳이길래 이렇게 말이 많은 걸까? 생사람을 기도 못 펴게 잡기라도 하는 것일까. 벌써 강당 생활 하기 전에 해인 강당에 대해서는 고정된 관념이 자리 잡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강당 생활을 하려는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3차까지 방부를 받은 치문반 숫자는 모두 32명. 그러나 지금, 서른두명을 한자리에서 다 같이 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 것인가.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해제 때 회식을 하자고 ‘남자계’(해인사에서 끝까지 살아 남자.)까지 만들고 시작한 관음전 생활, 그 첫날은 어느 누구도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대중 생활이라곤 거의 경험해 보지 못한 치문반 스님들에게 정신없이 몰아쳐대는 윗반 스님들의 경책은 분명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을 게다. ‘초에 살고 초에 죽는다’는 인일 스님의 말처럼 저마다 초가 크게 찍히는 손목시계를 차고 초를 재면서 치문반 스님들은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주눅이 들어서 허둥대고 있었다. 얼굴은 다들 ‘무슨 이런 데가 다 있노’하는 표정이었다. 동방의 옷고름, 횃대에 건 장삼의 칫수를 재고, 고무신은 얼굴이 비칠 정도로 하얗게 닦아 댓돌에 올려놓고 조고각하照顧脚下를 해야 되며, 시선은 늘 하향하고 묵언默言, 차수叉手는 기본으로 몸에 배어 있어야 했다. 손모양, 발걸음 그 어느 하나 허투루 지나가는 법이 없었다. 하심下心과 상相을 버리라는 얘기가 곳곳에 써 있고 들려 왔지만, 순간 순간 일어나는 진심瞋心을 가라앉히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조선시대 비단 장수를 하던 구정九鼎스님은 뙤약볕 아래서 묵묵히 솥을 아홉 번이나 고쳐 걸고 계를 받았다는데(대적광전 좌측에 그 벽화가 있다.) 같은 얘기를 두 번, 세 번 듣고 습의習儀를 받을 때 이미 열이 오르고 가슴이 답답해졌으니 그 괴로움을 어찌 몇 줄의 글로 다 전달할 수 있으랴.

그러는 사이 댓돌에는 고무신이 하나 둘씩 줄어들곤 했다. 자고 나면 습관적으로 횃대에 걸린 만의가사 수를 마음을 졸이며 헤아리는 게 새벽에 맨 먼저 하는 어떠한 의식처럼 되어 버렸다. 강당을 떠나는 도반 스님들이 늘어날 때마다 남아 있는 스님들은 허전하고 허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영산회상에서 먼저 간 사리불과 목련 존자의 빈자리를 보고 “나는 허공을 보았노라”고 탄식을 하셨다는데 그 마음이 이 마음과 같았을까. 남들이 다 자는 한밤중에 혼자 짐을 꾸려 산문을 나서는 도반 스님의 마음을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려고 했다.

먼저 나간 스님들은 근기가 약해서 나간거고 남아 있는 스님은 근기가 수승해서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일까. 행여 그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시절 인연을 따라 왔다가 인연이 다해서 떠난 것이겠지. 저마다 자기에게 맞는 수행도량이 있기에 그 곳을 찾아 떠난 것일 게다. 어차피 자기 중 노릇은 자기가 하는 것이고 이 길은 절대 고독 속에서 혼자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길이기에 인연 따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자연스러운 순리인 것이다. 그러나 다겁생래의 윤회 속에서 이렇게 도반으로 만나는 것이 더없이 소중한 인연이기에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하다. 부디 각자 처한 곳에서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자기 삶을 꾸려가기를 간절히 발원하며 다시 한번 마음을 추스르게 될 뿐이다.

평생 중 노릇 하는 기본을 닦는 곳이 강당이라면 그 가운데 치문반은 꽃이라 할 수 있다. 중 노릇 한다는 것이 부처님 뜻을 따르는 제자들이 한곳에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수행해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해인사 치문반만큼 중물들이기 좋은 도량은 없을 것이라고 자부한다. 요즘 평균 출가 연령이 30대 중반이라고 하는데 그 정도 나이면 세속 물도 들대로 들었을 테고 자기 생각과 고집으로 꽉 차 있을 나이다. 더군다나 사회에서 이미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니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잣대가 올곧이 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출가라고 하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갓난 아기와 같은 천진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되돌아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며 실천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속적 가치와 기준은 모조리 버려야만 한다. 모차르트를 찾아온 학생이 자신은 기본기를 이미 갖추고 있으니 좀더 빨리 피아노를 배울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자, 모차르트가 ‘기존의 습관을 버리는데 오히려 두 배의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이처럼 자신이 익혀온 습관을 그만한 시간을 투자하여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는데 다겁생래는 제쳐두고라도 몇 십년 동안 익혀온 업을 맑힌다는 것은 여간해서는 되는 일이 아니다. 그나마 해인 강당의 치문반 생활처럼 끝없는 하심下心과 인욕忍辱을 요구하는 대중처소에서 자신을 갈고 닦을 때에만 공부가 되는 것이다. 윗반 스님의 경책이 부당하게도 느껴지고 참기 어려운 때도 여러 번 있다. 그러나 호랑이도 제 새끼를 모조리 낭떠러지에 떨어뜨리고 그 중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서 기어오르는 놈만 키운다고 하는데, 하물며 치문반 스님들을 인천人天의 스승으로 교육시키기 위해서 -설령 자신은 온갖 욕지거리를 다 얻어먹을지라도 - 모진 마음을 먹고 윗반 스님들이 역행逆行 보살의 원력을 실천하고 있다고 한 생각을 돌린다면 치문반 생활이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

어렵고 힘든 가운데 도 닦을 마음이 생기고 한 고비 고비를 넘기고 나면 그 나름대로 의미와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부디 치문반 스님들이 졸업하는 그날까지 함께 할 수 있기를 발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