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 서면 생활의 속도를 서두르거나 변하는 생활 환경을 새롭게 맞이하느라 활기가 넘친다. 이런 사람의 삶의 분주함과는 상관없이 높아만 가는 하늘 아래 바람은 한결 가볍게 옷깃을 스치고, 풀벌레 소리 잦아드는 가을의 길목에 서 있는 나의 존재가 한 줌 바람의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가을 바람 끝에 묻어오는 허허로움 때문일까. 먼 하늘가에 시선이 머무는 횟수가 잦아진다. 마냥 하늘을 바라보고 싶어 창가에 기대고 서 보지만 작은 창문과 시야를 가리고 서 있는 높은 빌딩은 하늘의 품을 작게 만든다. 드넓은 하늘의 넉넉한 품에서 풍요를 느끼고 싶을 때, 주변 사람들의 미소가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사람들의 삶이 고단해 보일 때 나는 자연을 찾는다. 그래서 서울을 벗어나서 만나는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와 빛은 그럴 수 없이 따뜻하고 소중하게 마음 언저리에 깃든다.
해마다 만나는 가을풍경이지만 우리나라 가을 들녘의 아름다움은 사람을 감탄하게 한다.
누릇누릇 익어가는 벼들의 풍요로운 몸짓과 저마다 다른 옷을 입고 서 있는 허수아비들의 군상은 구도가 잘 잡힌 한 폭의 풍경화를 연출하고 있고, 분홍저고리와 파란치마 입은 맵시 좋은 어머니를 만나는 듯 길가에 정겹게 피어 있는 부용화며, 허공에 곡선을 그리며 날아다니는 새들의 몸짓에 누가 세상의 고단함을 되새기겠는가. 우리 삶의 언저리에는 이렇게 두두물물이 다 같은 색이 아니어서 아름다움을 더하는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가을 바람이 살랑살랑 함께 한다면 최고의 작품이 되지 않을까.
계절마다 부는 바람은 바람의 세기와 속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다가선다. 어느 누구도 바람을 볼 수 없지만 주변 사물들의 움직임을 통해서 바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람의 종류도 다양하다. 수면이나 지상에 있는 물상의 움직임에 따라 붙여진 이름들이다. 실바람, 산들바람, 건들바람, 흔들바람, 된바람, 센바람, 노대바람, 왕바람, 싹쓸바람… 이렇게 붙여진 이름만 봐도 그 모습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꽃과 풀의 향기를 실어다 전해 주는 예쁜 애교를 지닌 산들바람도 있지만 때론 인간의 삶에 치명적인 상흔을 남기는 노대바람, 싹쓸바람도 있다. 그러나 올 가을에 나는 자연을 지휘하는 연주자로 바람을 만나고 싶다. 때론 사람이나 자연에서 행복한 착각을 하고 싶을 때가 있으니 말이다.
바람은 산과 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이렇게 바람에게 의미부여를 하고 보니 가까이 느껴지는 바람이 음악가로 보인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던가. 작년에 미국 뉴욕을 방문했을 때 링컨센터에서 콜린 데이비스가 지휘하는 뉴욕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관람했다. 역시 지휘자는 단원들의 모든 동작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자리 무대 맨 앞 가운데에 자리했다. 혼자 연주하는 솔로든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추는 협주든지 합주든지 음악가들은 새옷 입힌 음악을 선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바람이라는 지휘자의 자리가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무대의 변화 가능한 조건이 다양해서인지 지루하지 않은 음악이 바로 자연이 들려 주는 음악인 것 같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무대의 상황은 예측할 수 없고, 단원들 역시 예측할 수 없는 멤버들이다.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네 가지 빛깔의 기본 무대에 아침과 저녁뿐만 아니라 시시로 변화가 따른다. 바람이라는 지휘자의 한 곳에 머물지 않는 속성 때문일까? 이제 막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 나무들은 바람의 지휘에 따라 이리저리 몸을 흔든다. 마치 오케스트라 현악 파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가 한 음을 따라 연주하는 아름다운 몸짓처럼 말이다. 언젠가 I Musici 실내 관현악단과 Stuttgart 실내 관현악단의 연주회를 관람한 적이 있었다. 음을 따라가는 단원들의 몸놀림이 가을바람의 지휘를 따르는 자작나무 숲과 같고, 금빛으로 넘실대는 가을 들녘과 같았다. 그 순간 내 마음이 (그런 자연 속에 자리하고 싶은 까닭이겠지만) 음악을 감상할 때 늘 자연의 모습과 소리를 생각하게 된다. 나에게는 큰 선지식 같은 산이 내가 등반해 본 지리산인데, 그 지리산을 생각하면 베토벤의 심포니가 떠오르고, 정겨운 도반같이 선이 고운 호남 들녘의 산을 바라보면 브람스의 심포니 선율이 스쳐간다. 이렇게 어느 음악을 고정화시키면 안 될 일이지만 내 머리 속에 한 동안은 이렇게 자리할 것 같다.
역시 관악기 파트는 새들과 곤충이 맡는 것이 제격이다. 봄에 관악기 협주자는 멀리서 울어도 아련하게 마음에 젖어드는 뻐꾸기 연주가 좋고, 처마에 깃들여 둥지를 틀고 제일 가까이서 연주하는 제비의 연주도 꽤 괜찮다. 목탁새도 좋고 스님들은 “밥만 먹고 잠만 자고”새라고 이름 붙이는 그 새의 연주도 산사에서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여름에는 단연 매미다. 온갖 매미들의 합창을 들어본 사람이면 여름에 으뜸 협연자로 뽑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1악장은 이른 아침 5시 반만 되면 연주를 한다. 참 극성스러운 매미들이지만 후터분한 기운을 유쾌하게 물리쳐 주는 소리를 들려 주기에 인간으로부터 심하게 미움을 받지는 않는 새다. 오전에 부지런히 2악장을 연주해 마치고 여름 한낮의 그 적막함을 아는지 느리고 더디게 연주하는 악장 아다지오나 렌토풍으로 연주하는 재치며, 오후에 다시 하루를 마무리하는 알레그로나 프레스토 속도로 피날레를 장식한다. 그러나 큰바람이나 노대바람 같은 지휘자를 만난다면 모든 단원이 무대로부터 퇴출 당하고 상처 입지 않으려고 몸을 한껏 움츠리는 모습을 일년에 두어 번은 만나게 된다. 물론 관객이 없는 연주회다. 이런 노대바람처럼 누군가가 나를 피해가는 그런 수행자는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 계절이 끝나가는 무렵에는 자연도 적극적이지 못하다. 더위에 지친 시간을 뒤로 하고 가을로 넘어가면 가을바람인 지휘자가 새로워지고 무대도 무겁던 신록을 벗고 울긋불긋 새롭게 단장한다. 오케스트라 단원도 물론 새 멤버로 교체된다. 이제 관악파트를 맡았던 새들은 따뜻한 남쪽나라로 떠나고 깊어 가는 가을 들녘 풀섶에 깃들어 사는 귀뚜라미와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무대를 채워 준다. 체격은 작지만 소리는 풍요롭다.
단연 가을 무대의 악장은 귀뚜라미다. 귀뚜라미와 함께 높낮이와 길이를 조절하며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에 귀 기울여 들어보면 귀여우면서도 애절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가을바람 지휘자의 어떤 신호가 없어도 대지에 뒹구는 낙엽은 몸을 뒤척여 소리를 만든다. 무엇보다 사람에게 낮은 곳으로 자리하는 미덕을 알게 하고, 떠날 때를 알고 나뭇가지를 떠나는 아름다움과 땅에서 자기를 완전히 썩혀 다른 생명에 양분이 되어 주는 겸허함을 알게 해주기 때문에 좋은 낙엽이다.
땅거미 내리는 가을 저녁 풀벌레 소리 잦아드는 산사, 아궁이에 지핀 군불은 활활 타고 저녁 연기는 굴뚝에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도량에 범종소리 골짝골짝 스며드는 그 저녁 풍경이 얼마나 멋진 음악인가. 어떠한 다른 소리도 끼어들 수 없는 그 낮과 밤의 교차로는 음악의 악장과 악장 사이에서 느끼는 긴장감과 같다. 경전에서 글자 뒤에 있는 그 여백의 의미까지도 알아야 부처님 말씀을 조금이나마 이해한다고 하시는 어른 스님들 말씀처럼 음표와 음표 사이에 깃든 호흡까지도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음악가들의 말이 생각난다.
이 가을에는 꼭 가을바람이 지휘하는 산과 들과 뭇 생명들이 연주하는 멋진 음악회에 초대장을 받고 싶다. 그리고 나라는 이 미약한 존재가 살아 움직이며 만들어 내는 모든 소리가 자연의 소리처럼 인간세상이라는 오케스트라에 불협화음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