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6일, 조계사 가는 길에는 한여름 따가운 뙤약볕에도 아랑곳없이 두툼한 진압복을 입은 전경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길게 도열해 있다. 진압봉과 방패로 무장한 복장 밖으로 일부 드러난 앳되기만 한 신세대 청년의 얼굴에서 얼마 전 군에 간 조카의 얼굴이 보인다. 종로거리를 활보하는 생기 발랄한 젊은이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그 얼굴에 저 두터운 껍질만 씌어놓으면 왜 서로 눈길 마주침이 꺼려지는 것인지. 지나는 이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서 있는 그들과 역시 무심히 지나치려 애쓰는 사람들. 중생들은 옷이 사람을 좌우한다 .
‘광복57돌기념 조국통일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는 분단 이후 서울에서 남북불교가 처음 만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는데…
조계사 도량에는 법회시간 한참 전임에도 역사적인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많은 불자들이 마당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와 조선불교도연맹이 공동 주최하는 ‘광복57돌기념 조국통일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는 8월 16일 남과 북의 모든 사찰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며, 8·15민족통일행사를 위해 남한을 방문한 북측의 민간대표단 중 조불련 박태화 위원장이 조계사법회에 참석하기로 했단다. 해방 이후 처음 북측 민간사절이 서울을 방문해 8·15행사를 함께 한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광복절 행사가 되었다. 분단 이후 장관급회담이나 이산가족 상봉은 있었으나, 노동자, 청년, 종교, 통일운동단체 등 북한의 민간단체가 남한을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
불교계에서는 남북불교도가 한 자리에서 합동법회를 연다는 점에 또한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그 실무를 맡은 것이 ‘민추본’인지라 조계사 도량을 바쁘게 오고가기를 반복하고 있는 도각 스님을 찾아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왠지 스님의 표정이 생각만큼 밝아 보이지 않아 일이 잘 풀리지 않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개별행동을 불허하는 정부 방침에 따라 조불련 박태화 위원장이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온다. 혹시 발생할지도 모를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우려 때문이란다.
민추본 사무실에서 만난 도각 스님은 여전히 표정이 무거웠다.
“북측 대표단이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공항의 썰렁한 분위기에 놀랍고 서운했다고 합니다. 몇몇 사람이 마중을 나갔을 뿐 환영인파가 전혀 없었거든요. 작년 8·15민족통일 행사를 위해 평양에 갔을 때는 대단했거든요. 여기도 그럴 줄 알았겠죠. 실무회담에서 합의하기로는 펜싱경기장에서 환영행사를 갖고, 잠실에서 유람선을 타고 여의도로 간다는 계획이었고, 단체방문도 합의를 보았어요. 그런데 체류기간 내내 호텔에 가둬놓고 행사를 진행하다보니 불만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서해교전의 앙금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북측 민간대표단의 방문이라 보수단체의 시위와 혹여 발생할 수 있는 만일의 사태 등을 의식한 정부의 입장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나 통제가 너무 심했다. 자연 북측과 남측간에 사소한 마찰은 체류기간 내내 계속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종단개혁 때는 저승 문턱을 오르기도 했지만 이제는 남북불교교류 앞장서는 불교계의 ‘북한통’이다.
남북불교도 합동법회를 주관한 민족공동체추진본부(민추본)는 2000년 6월 민족의 통일과 남북불교 교류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계종의 통일운동 기구이다. 여기서 도각 스님의 위치는 사무처장. 창립 초기부터 민추본과 함께 하면서 스님은 벌써 평양을 2차례나 방문했고, 금강산과 북경을 여러 차례 오가면서 조불련과 북측 민화협 등의 민간대표와 실무회담을 진행해오고 있다. 그러면서 불교계의 중의를 모아 대북 인도적 지원도 하고 북한사찰 복원사업도 펼치면서 이제는 불교계의 ‘북한통’이 되었다.
스님은 조계사와 무척 인연이 깊은 모양이다. 이 곳에서 저승 문턱을 경험했음에도, 지금까지 그 주변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질긴 인연의 땅임에 분명하다.
1994년 종단개혁 당시 ‘범종추’의 호법단장으로 학인 스님들과 총무원 청사로 진입하다 3층에서 떨어져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고 믿었던 바로 그 도각 스님이다. 이다지도 멀쩡히 조계사를 활보하게 될 줄은 당시는 아마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님 자신까지도.
이 투쟁의 시기에 좌복에만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스님이 불교의 사회참여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승가대를 다니면서부터. 강원 4년을 마치고 선방에서 꼬박 3년을 앉아 있었지만 일대사 인연을 만나지 못했단다. 스님은 스스로 그것을 불행한 일이라고 말한다.
“화두는 순일하지 않고 망상은 가득하고 불행하게도 참선의 진수를 경험하지 못했어.”
봉암사 선방은 특히 철저해 신문을 비롯한 외부의 것이 일절 들어올 수가 없다. 유일한 기회가 있다면 원주 스님이 시장을 봐올 때 물건을 싸오는 신문 쪼가리. 그걸 좀 보고 있자면 어김없이 한주 스님의 꾸중이 날아든다.
“저- 수좌는 신문이나 보나!”
그 때 보다만 신문 쪼가리의 글자들은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듯 했단다. 인연줄이 잡아당기는 것인지 끊임없이 산문 밖을 향하는 스님의 눈에 결정적으로 불을 당긴 것은 1986년 해인사승려대회.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의 불길이 들불처럼 번지는 시기였다.
1987년 통도사 극락암에서 겨울안거를 마친 스님은 “이 투쟁의 시기에 도저히 좌복에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나도 이들과 함께 하는 삶 속에서 보살이 가야 하는 길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서울에 올라와 중앙승가대에 입학했다.
도각 스님은 승가대 생활 4년은 민주화와 종단개혁에 대한 각성을 가져온 시기였다고 말한다.
“독재화된 사회구조가 인간을 부정하는 상황에서 독재를 타파하는 것이야말로 사람 노릇 잘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전두환씨가 백담사에 은거할 때 만해 스님의 얼이 서려 있는 그 곳이 독재자가 더럽힌다는 생각으로 그들의 퇴출을 위해 싸우다 감옥에도 갔어요. 이러한 과정과 함께 불교교단의 권력 지향적인 태도와 부패상을 목격하면서 불교가 민주화 운동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교단의 개혁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깨닫게 되었지요.”
이 때 동국대와 승가대 출신들을 주축으로 정기적으로 만나 공부도 하고 시위에도 참여했는데 법안, 자성, 토진, 일문, 정산, 법일, 정암 스님 등 12명이 결사 비슷한 것을 조직했다. 이들이 후일 실천승가회의 주역들이다.
종단개혁에 앞장섰던 도각 스님은 이제 통일로 향하고 있다.
“민주시민으로서의 제 할 노릇을 찾는 것이 민주화운동이라면 통일운동은 세계시민으로서 우리 민족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봐요. 같은 민족으로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것은 우리밖에 없어요. 부끄러운 일이죠. 천만이 넘는다는 이산가족 문제가 그렇고 분단이 가져온 대결구조로 인해 국방비 등 낭비되는 국력이 얼마입니까? 젊은이들이 생산성 없는 곳에 투여되고.”
통일만이 민족발전의 지름길이다. 이것은 통일을 바라는 누구나의 지론이다. 그러나 통일이 쉬운 일인가. 생각보다 남북의 이질화는 심각하지만 대화와 협력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잦은 교류를 통해 동질성을 회복하고 신뢰를 회복해 나가는 것이 통일의 기반이 될 것이다.
“베트남은 북베트남의 힘이 남쪽을 해방시켰고, 서독은 자본주의 힘으로 동독을 흡수했지만 남북의 경우는 남한의 자본력이 북한을 흡수할 만큼 되는 것도 아니고 또한 북쪽의 군사력이 남한을 해방시킬 수 있을 정도도 아닙니다.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화해하고 협력하는 길밖에 없어요. 계속적인 대립은 민족의 자산만 낭비할 뿐입니다.”
평양은 같은 말을 사용하는 이웃집이다.
남쪽 통일운동은 보수진영의 민화협(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과 진보진영의 통일연대(민주노총, 농민, 여성, 한총련 등)와 종교단체인 7대종단(불교, 기독교, 천주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 전통종교 등)이라는 세 틀로 짜여져 있다.
통일운동에서 종교의 역할은 결코 무시될 수 없다. 특히 불교는 남과 북이 공유할 수 있는 전통문화의 뿌리로 인하여 친근감과 서로의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교회와 성당은 칠골교회와 장충성당이 유일한데 비해, 확인된 자료에 따르면 북한에는 60여 개의 사찰이 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거기 역시 어딜 가나 사찰이 중심이다. 묘향산에 가면 보현사에 들러야 하고, 동명왕릉이나 단군왕릉에 가도 그 입구는 절이다. 그래서 타종교인 가운데는 옆으로 슬쩍 비켜 가버리는 사람도 있다고.
“몇 년 전만 해도 기독교가 남북교류에 열을 많이 올렸지요. 그런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몇 년 쉬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불교계가 더 열심히 하고 있어요. 불교는 지금 민추본을 비롯하여 태고·천태·진각종 등이 교류에 힘을 기울이고 있고 개별단체로 ‘평불협’과 ‘좋은 벗’ 등이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러나 다른 단체에 비하면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도 매년 식량과 옷을 보내고 있고 특히 올해 민추본에서는 평양의 윤이상음악연구소에 타악기 위주로 상당량의 악기를 지원했다.
“남한에 윤이상 음악을 연구하고 계승하는 단체가 없어요. 올해 겨우 통영에서 윤이상 음악 연주회가 열린 정도지요. 윤이상 음악은 이념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세계가 인정하는 그의 음악은 민족의 큰 자산입니다. 북쪽이 하든 남쪽이 하든 세계적 위상을 갖는 그의 음악을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몫이지요. 이념과 대결은 한시적이지만 민족과 음악은 영원한 것 아닙니까. 이러한 생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평양의 윤이상음악연구소에 악기를 지원한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교 쪽에서 가장 역점을 두는 사업은 사찰의 복원이다. 지금까지 대강 60여 개의 사찰이 보존되고 있는데 파손된 사찰까지 합하면 수백 개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사찰의 복원에 남쪽 불교의 지원이 절실하단다. 민추본에서는 일단 가을부터 금강산 신계사 복원의 기초를 다질 생각이다.
북한은 아직 많은 사찰이 있고, 스님들도 각기 사찰에 상주하고 있다. 신도들도 있는지라 초파일에는 등도 밝힌다. 농사가 끝나면 쌀과 과일을 가져와 불공도 올린다. 물론 스님들은 모두 결혼을 했다. 북한에도 찬불가가 있단다. 남한에서 부르는 것을 가져다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 그래도 우리보다 가사는 더 잘 안단다. 3절까지.
도각 스님은 북측 허혁필 부위원장이 농담처럼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박태화 위원장은 자꾸 나보고 불교 믿으라고 그래. 참 난 무종교인인데. 그런데 나이를 먹어가니까 나도 불교를 믿어야 할 것 같아.”
주체사상을 유일한 지도원리로 조직된 북한에도 불교의 숨결은 이렇게 이어져 오고 있었다.
도각 스님은 이러한 우리의 자산에 생명의 핏줄을 이어 주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니겠느냐고 힘주어 말한다.
“금강산은 일만 이천봉과 팔만 구암자로 신화화된 불국정토이고, 북쪽 산하 곳곳에 아직도 유구한 불교의 자취가 켜켜한 역사의 퇴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남과 북의 모든 것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시 태어나고 함께 중중 무진하게 연기하는 화엄의 법계로 장엄하는 것이 통일 정토가 아니겠습니까.”
올해 8·15는 음력 칠석날이었다. 금강산의 선녀와 나무꾼인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건너 일년에 한번 만나는 날이다. 이 날을 위해 까치는 돌을 머리에 이고 하늘로 가서 미리내(은하수)에 노둣돌을 놓고 온다 한다.
남과 북이 만난 이번의 8·15통일 행사도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며 땀흘리는 수많은 까치들의 노둣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날개짓이 멈추는 날, 우리 모두 걸어서 한라에서 백두까지 가보리라.□
취재·글/이연정, 사진/문영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