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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궁극의 일구一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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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看話禪 사상 - 인경 2002년 09월 247호
대혜에게 일구의 사상은 원오로부터 계승하고 있지만, 오히려 더욱 분명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대혜의 일구에는 칼날이 두 개이다. 한쪽은 일체의 공덕과 무량한 법문을 스스로 갖춘 경절처徑截處이지만, 또 다른 쪽은 일체의 분별을 쓸어내고 우뚝 홀로 선 일자一字이다. 말하자면, 경절徑截의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실행하는 구체적인 모습이 일구一句이다. 사량분별을 부정하는 쪽이 파사破邪의 역할이라면, 일체를 드러내는 쪽은 긍정하는 현정顯正의 의미이다.

태초에 일구一句가 있다. 이 때의 일구一句는 바로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큰 기틀(大機)로서 일구一句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작용하기 시작하자 긍정과 부정의 양극단을 동시에 거절하면서(雙遮)도, 양극단을 동시에 수용하는(雙照), 절대의 중도中道를 상징하는 일구一句가 된다. 이 점은 분명하게 그의 스승인 원오로부터 계승된 내용이다.

원오에게 있어서는 임제의 삼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일천 권의 경론에서 벗어난, 눈앞에 분명하고 분명한 일구이다. 그의 <상당법문>은 온통 일구一句에 관한 끊임없는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범부와 성인의 식정識情이 다하고 지견이 탈락하니, 장강이 제호가 되고 대지가 황금으로 변하도다. 자기의 흉금으로부터 일구가 흘러나온다. 어떠한가 말해 보라.


양극단의 이변二邊을 결코 세우지 말라. 안거를 한다거나 하지 않는다거나 모두 없다. 시절인연을 따라 응연히 담적하니, 자! 말해 보라. 성태聖胎를 장양하는 일구는 어떠한가?


제일구에서 깨달으면 조사가 목숨을 구걸하고, 제이구에서 깨달으면 인천의 쓸개가 떨어지고, 제삼구에서 깨달으면 호랑이 입에 떨어진다. 길을 따라 흔적을 지키지 않고, 또한 흔적을 지워 길을 바꾸지 않네. 뚫으면 곧 팔이 여섯이요 머리가 셋이라. 뚫지 못하면 인간과 천상이라. 말해 보라. 삼구三句 밖의 일구一句는 어떠한가?

원오의 일구는 ‘자기 가슴에서 흘러나오며’, ‘임제의 삼구를 벗어난 일구이며’, ‘인연을 따라 성태를 장양하는 일구’이다. 원오는 《심요心要》에서 일구에 투철하여 자유자재함을 활발발지活地라고 하고, ‘일구를 가지고 백천 구절로 만들어 쓰며, 백천 구절을 가지고 일구를 만들어 쓴다’고 했다고 한다. 이 궁극의 일구는 중도中道이고, 일상의 티끌 속에 존재하는 우주이다. 또한 일구는 부처님의 입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모든 조사가 말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불조의 공안을 벗어난 도리이다.

대혜는 이러한 일구一句에 대해서 <상당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달마達磨는 동토에 오지 않았고. 이조二祖는 서천에 머물지 않았네. 사람마다 항상 빛이 현전하고 누구나 만겁에 벽壁처럼 서 있네. 자! 말하라. 이것은 어떤 곳에서 오는가? 만약 오는 곳을 알아 수용한다면, 무궁할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유나維那에게 분명하게 잘잘못을 청하라. 오직 대가大家는 잘 요달하기를 요할 뿐이다.

향을 들어 축성하기를 마치고 상당하여 말하였다. 좋은 법당은 상서로운 기운이 새롭다. 천서天書가 구중성九重城으로부터 왔다. 오직 일구一句에 의지할 뿐, 사사로운 말은 없다. 위로 축원하였다. 황제시여! 억만겁 만수무궁하소서.


상당법문의 전문이다. 달마도 오지 않았는데, 이미 사람들은 만겁 이전부터 벽관壁觀하여 항상 깨달음의 빛을 발한다. 이 도리를 알아 수용한다면, 그 공덕이 무궁할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다름 아닌 바로 일구一句이다. 사사로운 다른 말은 필요가 없다. 임제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을 위해서 멱살을 잡고 뒤흔들었다. 그러나 대혜에게 있어 무위진인은 다름 아닌 일구一句이다. 바로 일구一句을 통해서 달마는 오지 않았고 혜가는 서천에 살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항상 깨달음을 구현한다. 대혜가 말하는 일구一句는 마치 ‘나에게 한 물건이 있으니, 그것은 하늘과 땅을 덮는다’는 덕이본德異本 《육조단경六祖壇經》의 일물一物을 연상시킨다.


마지막 일구一句는 소리 전에 이미 온통 드러났고, 하늘과 땅을 덮고 소리와 색을 뒤덮는다. 황면노자黃面老子가 한 개의 일착자一着子를 얻으니 도솔천을 떠나기 전에 이미 왕궁에 왔고,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대중을 구원했다.

이 일전어一轉語에는 삼현삼요三玄三要 사료간사빈주四料簡四賓主 뿐만 아니라 동산洞山의 오위五位와 운문雲門의 삼구三句 백천百千의 법문과 무량無量한 묘한 의미가 갖추어 있다. 만약 다른 사람을 간별하고자 하거든 일척안一隻眼을 갖추라.


이것은 매우 신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표현이다. 일구는 소리와 색의 세계보다 앞에 존재하고 나중까지 존재한다.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지금 여기의 궁전에 존재하고, 일시에 천지를 덮어 일체의 중생을 구원해 버린 일구一句이다. 임제의 모든 삼현삼요三玄三要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모든 방편과 백천 무량한 법문을 구족한 일구一句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언어적인 이해가 아니다. 일체의 분별을 거절한다. 대혜大慧는 이 일구一句를 일척안一隻眼이라고도 부른다.


대중에게 보이다. 일구 중에 삼현문이 갖추어 있고, 일현문에 삼요의 길이 있다. (그러나) 임제의 소인배들(小厠兒)이여. 다만 하나의 밝은 안목(一隻眼)만을 갖추어, 사방팔면이 오더라도 오직 중앙을 쳐라. 그러면 마침내 폭풍우가 몰아칠 때, 옛 사당이 휘늘어져 (오히려) 잘못되었음을 보리라. 흥화노사興化老師의 얼어붙은 고름이 온통 꿈 속에서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심명信心銘》에서 말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간택揀擇을 하지 않을 뿐이다.’라는 것도 당시인의 좁은 소견이요, 조주趙州 고불古佛도 오년간 변명하다가 내려오지 못했다.


대혜는 기존의 관례적인 지식과 형식적인 권위를 거부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임제의 삼구에 대한 개념적인 천착은 임제의 아류들이 행하는 소인배들이나 할 짓이다. 임제의 법제자인 흥화존장興化存(830~888)의 법문도 얼어붙은 고름이다. 뿐만 아니라 《신심명信心銘》도 좁은 소견이며, 조주도 변명하기에 바빴다. 어찌 보면, 그것들은 도리어 각자의 밝은 눈(一雙眼)을 후려 파는 도적이다. 하나의 안목이란 전통적인 견해의 사당이 폭풍우 속에서 부서지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이는 앎 속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일이고 몸을 한번 굴리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대혜는 일척안一隻眼이라는 표현 외에도 일전어一轉語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일전어는 ‘임제의 삼현삼요, 동산의 오위, 운문의 삼구三句 뿐만 아니라 백천 무량한 법문을 모두 갖춘다’고 설하고, 만약 ‘사람을 간별하고자 한다면, 오직 일척안을 구비하라’고 말한다.

대혜는 《보설普說》에서 ‘그런데도 고인들이 간절하게 말씀하신 방편문의 약에 집착한다면, 오히려 옛 병은 고쳐지지 않고 새로운 병이 생기게 된다.’ 이렇게 되면 ‘고인이 제시한 경절처는 일시 얽혀 돌아가는’ 길이 되고, ‘삼구를 부리기보다는 삼구에 부림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대혜에게 있어서 문제되는 것은 원오와 마찬가지로, 사당에 모셔진 방편으로써의 삼구가 아니다. 대혜는 임제의 삼현삼요의 방편들을 ‘푸른 하늘이나 네 거리에서 만난 귀신’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임제의 가르침에 대한 후대인의 집착을 겨냥한 발언이다. 삼구는 외적인 형상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삼구를 성립시키는 총체적인 통찰로서 지금 여기 경험하는 일구一句이지, 그것들이 가지는 개별적인 의미가 아니다. 삼구에 대한 언어적인 해석으로부터 벗어나서, 체상용體相用의 다채로운 언구를 자유롭게 부릴 수 있어야, ‘폭풍우 몰아치는 순간에도 휘늘어지지’ 않고 ‘팽팽한 활줄로써’ 학인을 접인할 수가 있다. 체상용 개별적인 해석에만 눈빛이 갇혀 있다면, 그것은 참 자유인이 삼구에 부림을 당하는 비참한 순간이다. 그것은 어쩌면 ‘얼어붙은 고름통’ 속에 빠져 있다는 말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