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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도망친 것 그 자체가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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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박성수 2002년 09월 247호
해인사에서 비껴난 고즈넉한 암자에서 이틀간 유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비 오는 해인사, 칠흙 같은 밤이다.

모처럼 어둠이 어둠답게 느껴진다. 찬란한 불빛 속에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도시의 밤이 허구인 것은 산중의 칠흙 같은 밤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다.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 해인사의 밤에 묻히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상념이었다. 토라진 여인 같은 절이 있다면 필경 그 곳은 암자일 것이다. 큰절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암자는 마지막 수행자를 기다리듯 늘 수줍게 보이는 법이다. 그 암자도 역시 그랬다. 고요한 밤, 법당에 들러 가부좌로 나름대로의 명상에 든다. 폭우는 언제나 큰소리를 내며 내리기 마련이지만 어느덧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온종일 폭우소리에 젖어 있었던 탓인지 빗소리조차 잊고 말았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서울을 떠나 해인사로 향하면서 계속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단어였다. 무상정등정각, 즉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나는 모든 것을 이겼고 모든 것을 알았다. 나는 일체의 제법에 물들여지지 않았고 모든 것을 버렸다. 갈애가 다한 해탈을 얻었다… 나는 무상의 스승이다. 나는 홀로 모든 것을 바로 깨달아 청량하고 적정한 경지에 이르렀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외친 오도송이다.


청년 싯다르타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기에 이토록 환희와 격정 속에서 오도송을 낼 수 있었단 말인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세속인으로서는 쉽사리 알 수없는 노릇이고 결국엔 부질없는 상념이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팔리어의 기묘한 여운에 묶여 있었다.


서울을 떠나면서 지니고 온 도올 김용옥 선생의 책. 요즘 세간에 화제와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달라이라마와의 대담을 엮은 것이다. 책은 근본불교를 말하고 있다. 불교의 원형을 찾아가려는 도올의 집념과 재기 발랄한 문장들. 책 속의 언어와 해인사의 밤,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상념의 시간들이 엉켜 한동안 관념의 세계로 빠져든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밤은 깊어가고 법당 안 분위기도 가라앉고 있었지만 도무지 화두가 풀리지 않는다.

도올 선생은 단호히 말한다. 붓다의 깨달음은 한마디로 ‘연기緣起’라는 것이다. 삼라만상의 이치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이고 윤회의 고苦는 인因을 멸滅하여 벗어나는(解脫)것이며, 그래서 윤회를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에 있어서나 싯다르타에게 있어서나 인과는 동시적일 수 없다. 인因과 과果는 반드시 시간상의 전후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싯다르타의 인과의 특징은 반드시 생성의 인과와 소멸의 인과를 동시에 관觀한다는 것이다. 생하는 법은 곧 멸하는 법이다. 이 한마디를 깨닫는 것을 곧 법안法眼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법안이란 곧 유전연기와 환멸연기를 동시에 전관全觀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을 말하는 것이다.


전관全觀.

이 한마디 때문에 평온했던 마음에 파란이 일었다. 명상은 깨지고 잡념의 세계가 끝없이 이어졌다.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생각이 발發하면, 그것을 멸해 무념으로 돌아가라는 충고는 그야말로 공염불이 되었다.

전관이라니. 이 말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처음과 끝을 어떻게 동시에 볼 수 있으며, 원인과 결과를 어떻게 동시에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학교에서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되어야만 참된 명제이다. 세간에서 하나를 알고 열 가지로 활용한다는 처세론적인 발상이 아니라면 처음과 끝이 동시에 일어나는 법은 없다. 모순이다. 그런데 바로 그`모순을 바라본다는 말이 연기의 핵심사상이라는 것이다. 논리로는 풀수 없는 해설이다. 결국 ‘상징적인 의미로 엮인 말’이라고 서둘러 이해하기로 하고 명상을 풀었다.


소득이 없었다. 깨달음은 커녕 혼돈이다. 무엇보다 몸의 변화가 전혀 없다. 마음과 몸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어떤 상황을 진실로 이해할 때 정신 뿐아니라 몸에도 변화가 나타난다고 나는 생각해 왔다. 정말로 좋아하는 여인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난해한 문제를 어렵게 풀면 환희·전율이 찾아오듯이 말이다. 그러나 ‘모순을 바라본다’는 말은 나의 몸에 아무런 느낌도 던져 주지 못했다. 지도에도 없는 길을 떠돌며 찾지 못할 영혼의 집을 헤맨 꼴이다.


“돌아가자”

구도의 자세를 벗고 세속인의 마음으로 다시 해인사 경내를 둘러본다. 절이란 한쪽 발을 역사 속에, 다른 한쪽 발을 자연 속에 묻은 채 그렇게 앉아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해인사에서도 ‘고승이 꽂아 놓은 지팡이가 자라 고목이 되었다’는 전설을 듣게 된다.

‘몇월 며칠 해인사에 다녀오다’라고 사진첩에 한 줄 적어 넣기 위해 여느 관광객처럼 해인사의 역사를 카메라에 담고는 발길을 돌린다.

자동차로 한참을 달려도 울창한 숲에 묻혀 있는 해인사를 좀처럼 벗어나기 힘들다. 계곡과 굽은 길을 지나면서 오래 된 절일수록 산도 깊어야 어울린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래야 번뇌로 가득 찬 일상에서 되도록 멀리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어 허전했는데 그제서야 번쩍 한 가지 교훈을 얻는다.

해인사를 찾은 것은 무엇을 얻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도망친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누구나 다 견디어 나간다고 해서 일상생활이 만만한 것은 아닐 것이다. 겉으로는 일상을 살아가지만, 안으로는 힘겨운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게걸스러움, 악착같음, 구차스러움… 삶을 압박하는 이 불편한 단어를 피해 갈 수 있는 인생이 과연 있을까. 절에 온 사람이라면 돌아가는 그 곳이 흙탕물인 줄 알아야만 비로소 절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