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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i어(語) 및 팔리불교의 연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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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리어성전의 기원 - 여연 1985년 06월 40호
번역/여연(如然) 스님


서양인의 Pa|i 연구의 단서

Pali어(語)와 팔리 불교가 서양인에 의하여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의 일이다.
16세기에서 17세기 이후 유럽과 세일론(스리랑카)의 교통이 시작되고 세일론의 서해안 지방은 1520년 포루투칼인에게 점령되었고 이어서 1650년에는 화란(네덜란드)이 여기에 대신하여 영유했던 것인데 그들은 세일론의 종교나 풍속,습관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들의 기독교를 강제적으로 전하고 불교를 믿는 것을 절대로 금했던 것이다. 이와같은 정책 때문에 포르투갈인이나 네델란드 사람에게는 팔리어나 팔리불교는 연구하는 사람도 없었고 다만 세일론에는 불교가 행하여지고 팔리에 성전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 막연하게 알려져 있었음에 불과할 정도였다. 주1)
그런데 세일론의 해안지방은 1796년에 영국인이 네덜란드인을 대신하여 점유하고 다시 1815년에는 모든 섬이 염국령으로 식민지화 되었다.
영국인은 포르투칼과 네덜란드의 실패를 거울 삼아 주민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고 회유 정책에 의한 통치를 행하기로 했다.
이 방법은 이미 영국이 인도에 대하여 채용한 것이며 인도에서의 종교, 풍습, 습관 법률 등을 알기 위하여 마누 법전을 연구 영역한 바와 같이 세일론 역사, 풍속, 습관 등을 알기 위하여 세일론의 역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도에서의 마누 법전의 연구가 구라파인의 범서(sans krit) 연구의 단서가 되었던 바와 같이 세일론의 사서(史書)의 연구가 서양인에 팔리어 연구에 대한 하나의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리랑카 사서(史書)의 연구 이전 이미 1824(文政 71년)에 영국인 선교사 벤쟈민 클라우(Benjanin clough)주2) 에 의하며 팔리어 문전(文典)이 저술되었다.
본서(clough 著)는 팔리어의 문전과 사전(辭典)을 겸한 것인데 그 문전은 팔리어로 쓰여진 유명한 문법서(文法書) Balavatara(동몽입문:童蒙入門)주3)에 의한 것이었다. clough는 그리스도교를 전도하는 한편 스리랑카의 비구스님에게서 팔리어를 배웠던 것이다. 클라우의 문전사전은 극히 편리한 것이었기 때문에 구주(歐州)의 팔리어 연구자에게는 나중에 스리랑카스님 스프티에 의하여 출판된 Pali (팔리) 사전(辭典) 〈Abhidh-anappadipika〉과 함께 중요한 참고서가 되었다. 이것은 적어도 치루다스어 사서가 1875년에 출판될 때까지 50년 동안은 클라우의 책은 극히 소중한 것이었다. 팔리학의 실제상의 최초의 개적이자 하우스 베루 같은 학자도 이책을 의지하여 그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상은 스리랑카에 있어서 팔리어 연구의 단서인데 구라파에서 팔리어 연구는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1826년에 프랑스의 청년학자 베루노프(Eugene Burnouf)가 당시 프랑스에 유학해 있던 노르웨이인 러센(Christian Lassen)과 공동으로 발표한 「팔리어에 관한 논문:Essai Sar le Pali」이었다. 당시 프랑스에 2 -3개의 팔리어 사본이 있었다. 그 사본들은 스리랑카에서 온 것이 아니고 샴 버어마방면에서 온 것이었다. 그것은 프랑스는 인도와도 다소 접촉했지만 도리어 인도지나 방면에 힘을 기울이고 이미 1687년에 루이 14세는 사절을 샴(same) 황실에 보내고 그 사철들에 의한〈샴왕국에 대한 기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구주에 꽤 널리 얽혀진 듯 하다. 그 속에 팔리어나 남방불교가 소개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샴(same)에서 실제로 사용되고 있던 불교 일용 성전으로서의 갈마본(羯磨本:kammavaca) 이나 계본(戒本:patimoklcha) 등의 팔리어 사본을 가져다가 프랑스 황제 도서관에 소장했다. 베루로프가 연구한 것은 이것이었다. 그리고 갈마본에 관해서는 이미 아시아의 연구(Asiatic Research VI)에 이태리의 선교사 샹게르마노(U. Sangermano)에 의한 해설이 있고 베루로프는 이것을 의지하며 팔리어를 연구했다. 그는 그때 아직 클라우의 문전을 입수치 못했다. 한편 공저자 러쎈은 Vararuci의 프라크리트 문전에 의하여 팔리어와 프라크리트 및 범어의 비교연구를 하였다. 그들은 동양의 아리안 제어를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연구는 극히 학적인 것이며 구주 학계의 주의를 끌고, 그것이 구라파에 있어서 팔리어 연구를 일으켰던 원인이 되었다. 이 책은 후에 프린세프가 아쇼카왕 법칙문을 해독했을 때에도 실제 유용했다고 한다. 이어서 베루로프는 이 논문에 대하여 다음 해에 다시 정정하는 소 논문을 내었다. 그때까지 그는 다시 두개의 새로운 Text (mahavamsa,Abhidhdanappadipika)를 알았던 것이다. 베루로표는 그 후 범어 불전(佛典)을 연구하는 한편 끊임없이 팔리어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양자의 비교에 다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팔리 문헌을 충분히 입수치 못했기 때문에 그 목성은 성취되지 못했다. 그에게는 팔리어 문법이나 어휘에 관하여서도 상당히 종합된 것이 있었는 듯 하나 출판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나중에 말하는 불교범어에 대한 그의 연구서, 번역서 및 그 외 주기(註記)둥에 보아도 팔리에 관한 그의 관심이 큼을 알 수 있다.
스리랑카 정부(영국이 지배한)에서는 전술한 바와같이 식민지 통치의 정책상에 사서(史書)의 번역이 계획되고 영국인 선교사와 관리등이 스리랑카 학승(學僧) 등의 도움으로 팔리어랑 스리랑카말(싱할리어(語))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826년에 사서를 영역할 계획이 발표되고 18g3년에 사서의 영역 3권(冊)이 에드워드 우팡(Edward Upham)에 의하여 런던에서 간행되었다. 이것은 유명한 대사(大史:Maha-Vamsa) 및 싱할리어 두 사서의 영역인데 대사도 팔리어 원전에서 온 것이 아니고 스리량카어(싱할리어)에서 전역(轉譯)한 것이며 또한 오역(誤譯)이 많았기 때문에 학적 가치는 그다지 인정되지 않았다. 거기에는 이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이 실려 있기 때문에 한때는 꽤 소중하다 하였지만 4년 후인 1837년에 팔리어 원전에서 대사(大史)의 정확한 영역이 조지 터너(George Turnour)에 의하여 저술됐다.
전자의 두찬(柱擺:전거가 확실하지 않는 저술)한 것이 지적 됨에 이르러서 Upham의 역서는 별로 소중하지 않게 되었다. 터너의 역서는 100p, 가까운 서론에서 대사의 사료(史料)에서 불교의 역사 및 스리량카 왕통의 년대를 통일적으로 상술하고 또 팔리 삼장(경·율·론)의 내용들도 소개하고 있었으므로 구주의 학계는 이 책에 의하여 팔리불교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스리랑카의 역사 년대에 관한 서양인의 설은 주로 본서에서 의하고 있다. 이 책이야말로 팔리문헌의 최초의 유럽어 역이며 구주인의 팔리어 연구에 지침과 자극을 주었다.
원래 터너는 1818년 20세 이전에 스리랑카 민정국(民政局)의 관리로 섬(스리랑카)에 와서 후에 정부의 고관이 된 사람인데 스리랑카의 스님의 도움으로 팔리어를 배우고 스리랑카의 고대사를 배웠다. 그가 대사(大史)를 번역하게 된 것은, 아소카왕 법칙문의 연구자이며, 종래 아무도 읽을 수 없었던 아소카왕 법칙문을 처음으로 해독했던 프린세프(James Prinsep)의 사사(示唆)에 의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프린세프는 아소카왕 법칙문의 연구에도 또 인도의 역사의 연구에도, 팔리의 연구가 지극히 중요한 것을 역설했다. 그가 1837년 아소카왕문자(文字:Brahmi)를 완전히 해독한 것은 터너의 팔리어 지식에 힘입은 바가 컸으며 법칙문의 피야단(piyadasi=priyadarsin 愛兒王)이 아소카왕을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아소카왕의 이름은 하나도 적혀 있지 않은 이들의 칙문이 아소카왕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확증한 것도 섬의 역사(Dipavamsa)에 아소카왕을 피야단이라고 부르고 있는 기술(記述)에 관한 것도 터너의 지적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뒤에도 계속 프린세프의 일지(신문)에 팔리불교에 관한 여러가지 논문을 게제하고 학계에 도움이 많았다.
구주에 있어서 팔리불교의 연구를 촉진하게 하는 동기는 그밖에도 있다. 19세기 초에 구주에 그 존재가 알려 있던 불교는 중국, 일본의 한역 불교와 티벧트와 몽고의 라마교와 남방불교의 팔리 불교였다. 그런데 1826년대가 되어서 청년 외교관 호지손(Brian Hodgsnn)이 네팔에 있어서 다수의 범어불전을 발견하고 1826년에 이것을 잡지로 발표 던 것이다.주4)
구주의 학계는 범어의 불교전적(典籍)이 존재하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호지손(Hodgson)은 범어 불전이야말로 불타의 설법을 그대로 전한 것이며 팔리어 성전(聖典)보다도 다시 더 원천적이라고 주장했다. 주5) 이에 대하여 전기(前記)한 터너와 프린세프 등의 팔리 연구자 측에서는 팔리 성전이 확실히 시원적이라고 반대했다. 그래서 범어와 팔리어불전의 신·고(新·古)에 관한 논쟁이 일어나서 그것을 밝히기 위하여 양 불전(佛典)을 비교 연구하려고 하는 기운이 일어났다. 이것이 구주 학계에 있어서 팔리 연구에 박차를 걸게된 한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전술한 바와 같이 베루로프는 양자의 비교 연구에 주력했지만 자료 부족으로 인하여 결론에는 도달할 수가 없었다. 호지손은 처음에는 범어 불전이 불설(佛說)을 전하는 최고의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나 실제로 범어 불교를 도두 검토해 볼, 즉 그 자신은 다른 일을 위하여 범어를 착실히 연구할 여가가 없었다. 범어에도 언어학적으로 발달하는 층이 있어서 프라크리트적인 부분이 순수범어의 부분 보다도 오랜 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그 때문에 범어가 불전용어중에 시원을 형성한다고 하는 그의 최초의 주장을 철회(부정) 하는데 이르렀다. 호지손이 발견한 범어 불전은 전술한 프랑스인 베루로프에 의하여 처음으로 학적으로 연구되었다. 그는 1844년에 「인도불교사서설」을 서술하여 그 연구를 발표하고 다시 1852년에는 그가 범문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한 법화경이 많은 연구부록과 함께 출판되었다.
범어불전에 몇 번인가 발달 단계가 있는 것도 그의 주장에 의한 것이며 오래된 경전일수록 팔리 성전과 같이 단편적이며 또 역사적(史的) 불타를 전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범어, 팔리어, 신·고(新·古)에 관해서는 처음부터 양자와 아울려 행하여져 있다고 봤다. 하여튼 베루로프에 의하여 범·파 불교에 대한 연구열은 일층 가해졌다.
베루로프의 저술에 전후하여 구주학자들의 팔리 불교, 스리랑키 불교의 연구에 많은 공헌을 한 책이 출판되었다. 그것은 영국인 선교사 스팬스 하디 (Spence Hardy)에 의한 동방승원생활(東方僧院生活) 및 불교 강요(佛敎網要)의 두권이다.주6) 그는 오래동안 스리랑카에서 친히 불교사원의 승려 생활을 견문하고 또 불교교리를 학승들에게서 배웠다. 따라서 위의 두 권의 책의 내용은 정확하고도 상세하기 때문에 구주의 학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오늘날 사람들에게도 팔리 불교나 스리랑카 불교를 연구하는 좋은 참고서로서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또 두 권의 자료는 스리랑카에서 한 것도 있고 직접 팔리 문헌에서 한 것이 아니지만 교리적으로 양자는 그다지 틀리지 않고 있다. 이어서 1858년에는 선교사 비간데 (P.Bigandet)에 의해서 버어마 불전이 버어마에서 영역 발표되고 이것도 또 남방불교에 의한 불타전(佛院轉)을 구주의 학계에 소개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범, 팔리 교리(敎理)나 불전을 비교하고 신·고(新·古)를 결단한 좋은 자료가 되었으므로 이 의미에도 학계에 많이 환영되었던 것이다.

※주
1) 유럽에서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스리랑카 사정으로서는 Rober Knox 저(著) 런던출판사 1681년 An historicat relation of the lsland Ceylon in the East -lndies-“동인도의 섬 세일론의 역사관계” 등에 의한 것이며 이 책에서는 스리랑카의 풍습, 습관이나 불교행사 등에 판하여서도 소개되어 있다.

2) 벤쟈민 클라우(B.clough : A Compendious Pali Grammar, with a Coupious Vocabulary in the Same Language, Colombo. 1824〈샴(인도지나 방면) 언어의 풍부한 어휘와 간추린 팔리문법)

3) Balavatara은 Kaccayana의 팔리 문전을 평명하게 서술한 입문서, 남방제국(근본불교)에서는 pali불전의 교과서로써 가장 널리 사용된 것. 저자는 13세기 말의 담마키티(Dhamma-Kitti)라고 하는데 Gandhavamsa pp62;71에 의하면 14세기 말에 Vacissara 작이라고 한다.

4) Asiatic Research 1926; Sketch of Buddhim derived from the Buddha Scriptures of Nepal (Royal Asiatic Society II, 222-257 London 1829) 아시아 연구 1926 : 네팔 불교 성전의 불교 기원의 대요

5) JBAS 1837후에 B. H Hodgson : The Languages, Literature and Religion of Nepal and Tibet;London1874 p 120 ff에 전재(轉載) 네팔과 티벧트의 종교(불교)와 언어,문학

6) S. Hardy : 동양의 수도원, 런던 1850년 불교 입문서, 런던 l853년에 그의 상사이며 선배인 선교사 고쟈리 (Samuel J. Gogerly)도 팔리 불교를 연구하고 그는 1837년 이래 “아시아 연구”에 발표한 많은 논문과 팔리 성전의 영역이 있다. 그의 논문집은 후에 Ceylon Buddhism 2권 런던 1908로 수록되고 그의 장부(長部) 제 1경(經), 20, 31, 32경의 영역(英譯)은 베루로프의 제15경(經) 및 2경의 불역(프랑스)과 함께 후에 출판했다.

역자 주 : 이번에 이어졌어야 할 신층 프라크리트어는 너무 전문적인 내용이므로 생략했읍니다. 다음 기회에 지면이 허용되면 팔리어의 발달단계, 팔리어의 기원에 대하여 소개하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