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마지막 신음소리
언젠가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시는 어느 원로스님으로부터 “내가 이 정도의 차는 타야 하지 않겠냐”하는 말씀을 듣는 순간 그것이 한국불교의 마지막 신음소리처럼 느껴진 것은 왜일까.
무심코 던져진 한 마디 말 속에 숨어 있는 한국불교의 병폐와 문제점을 우리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생을 수도청진으로 일관하였고, 지금은 집안의 최고 어른이신데 그런 사고와 삶의 태도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또는 주변의 그 누구도 문제로 느끼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죄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원로 ·중진 ·청년승가인 우리들의 사고와 삶의 태도들이 정말 불교적이고 수도자적이고자 하는 뼈아픈 고뇌의 애씀들이 있는지 묻고 싶다. 냉철하게 반성하고 비판하려는 깨어 있는 의식이 없는 지금, 승단 어느 곳에서 비천을 기대할 수 있을지 당당한 외침이 그립다.
우리가 불교적이고 수행자적이고자 하는 사무친 의지가 살아 있지 않는 한 물량적인 성취와 성장은 허구일 뿔만 아니라 자신과 세상을 기만하는 무지와 무염치가 되고 말리라.
지난번 원장 선출에 즈음하여 보여준 원로·중진의 태도와 무성하게 흘러다닌 이야기(금품수수·직권활용·이해집단)들 가운데 승자와 패자 그 어느 쪽에도 불교적이고 수도자적이고자 애쓴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특히 원장선출의 직접적인 권한이 있는 총회는 스스로 의식없음을 드러냄으로써 종도를 실망시켰는데, 그 책임을 어떻게 지려는지 지켜볼 것이다.
오늘의 불교현상 곳곳에 불교적이고 수도자적이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더 나아가 불교의 탈을 쓴 비불교적 현상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음을 뜻있는 이들은 크게 우려하고 있다.
승단의 원로 ·중진 ·청년승이 등 대부분의 사고와 삶의 방식, 그리고 추구하는 목적과 그 방법들이 비불교적으로 흐르게 된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아마도 그것은 한국근세불교의 사상적 측면에서부터 검토되어야 하리라. 다시 말해서 불교사상체계가 확립되지 못했고, 따라서 불교적인 세계관으로 사상무장이 안되어 있는데 주원인이 있다고 보아진다.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철저한 자기반성과 비판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나는 출가가 없는 한 법의 횃불은 다시 타오르지 못하고 말리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몇 가지 진지하게 살펴보고
자 한다.
첫째, 승단의 생명인 깨달음과 전법
불교사를 관통하는 한 줄기 생명은 깨달음과 전법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데 있다 할 것이다. 불교사 곳곳에서 깨달음과 전법을 위하여 신명(身命)을 바쳤던 사례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언제나 쌓아올린 공덕들을 깨달음과 중생에게 회향하고자 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일 수 없다. 그것은 깨달음과 전법을 떠나서는 불법이 이미 불법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깨달음과 중생구제에 귀착되지 않는 그 어떤 불교활동도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불법으로서의 생명을 상실해 버린 세간업(世間業)에 불과한 것이다.
삼장연구·참선수도·사찰경영·불공 재사 지내는 것도 궁극적 의미를 지닐 수 있으려면 깨달음과 전법을 최고의 법칙으로 삼을 때 비로소 당의성을 갖게 된다. 그런데 오늘의 불교를 돌아볼 때 깨달음과 중생을 향하여 회향하는 투철한 역사정신이 보이지 않는다.
생명이 없는 불법은 이미 불법이 아니며, 그 생명을 지키려는 의지의 노력이 없는 불교의 앞날은 전혀 기대할 수 없으리라. 깨달음과 전법은 출가와 재가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생명임을 알아야 하겠다. 그러므로 고인(古人)들께서는 깨달음과 전법을 위해서는 작은 선, 작은 악 하나도 소홀히하지 않았던 것이다.
깨달음과 전법을 향한 사무친 원력이 없고선 출가란 알맹이 없는 꾸밈이 되고 말리라. 어쩌면 승단의 혼란과 타락의 씨앗이 여기에서부터 뿌려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둘째, 부처님 유언의 중요성“법과 계로써 스승을 삼으라.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부처님의 유언임을 모르는 자는 없으리라.
어느 곳이든 인륜이 있는 곳에선 공통적으로 부모와 스승의 유언을 저버릴 경우 천하에 몹쓸 인간으로 여겨 왔다.
세속에서도 그러는데 허물며 법을 전 재산으로 하는 출세간이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 승단에서는 스승인 부처님의 유언이 철저하게 무시되는 기이한 현상이 판치고 있다. 승단의 일반적인 현상을 관찰해 보면 경전과 율전 속에 제시되어진 불교사상과 계율정신을 진지하게 배우고 실천하려는 애씀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배우고 실천하려는 애씀은커녕 경전공부는 참선에 장애물이요, 계율은 소견좁은 형식주의 정도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도무지 어디에 근거한 사고요 논리인지 연원을 알 길이 없다.
“깨달음의 길은 경전과 율장 속에 있다. 깨달음은 불교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경전을 바로 배우고 계율을 성실하게 지키려는 바탕이 없고선 참선수행은 바로 되지 않는다.”
부처님 유언의 정신을 소중히 간직할 때 불법의 생명은 다시 태어나고 꺼지지 않는 등불되어 세상을 비추게된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셋째, 진정한 화합의 의지교단의 지도자들께서는 입만 열면 화합을 들고 나온다. 화합을 위해서는 법(法)·비법(非法)에 관계없이 함께 어울려야 된다는 논리다. 부처님께서 화합하라고 하신 가르침이 제멋대로 편리하게 해석되거나 사용되고있음을 본다.
원칙도 없이 법(法)·비법(非法)을 가리지 않고 함께 하는 것이 화합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화합해야 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화합을 파하는 것은 오역죄의 하나로칠 만큼 중요한 덕목인데, 터무니없는 내용이 아닐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리라.
화합의 참된 의미를 찾아보면 요즈음 우리가 사용하는 화합은 자신들의 법답지 못함을 호도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화합이란 출가자와 승단의 청정(무소유·평등·우정 ·성실)성, 정법의 등불을 불멸케 함,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고자 함, 측 법과 중생을 위해서라고결론내릴 수 있으리라.
진정 화합하기 위하여 계율을 지키고 경전을 연구하며 애써 정진해 왔는가.
사적인 소유와 직위를 포기하고 이기적인 명예욕 따위의 야심을 버리고자 고뇌하며 몸부림쳐 왔는가.
허망한 애착을 버리고 풍족과 편안함을 포기하며 가난을 기쁘게 선택하려는 의지를 가꾸어 왔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화합의 주장은 빈소리일 뿐 그곳에 진실성은 없다 하리라. 결국 화합이라는 주장들은 자기합리화·정당화를 위한 허구이자 기만임을 드러내는 일이라 할 것이다.
넷째, 기쁨으로 선택해야 할 가난의 미덕
무소유와 소욕지족(少欲知足)은 부처님 삶의 전부였다. 불교사가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가난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셨던 선사(禪師)스님들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권의 경전을 얻어보고 참회·기도·참선하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며, 그 삶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으려는 승단의 미풍은 어디에 있는가. 눈푸른 수도자를 길러내기 위하여 생애를 바치고 인재 하나 얻는 것을 천하를 얻는 것보다 더 귀하게 여겼던 승단의 기풍은 살아 있는가.
오늘을 돌아보건대 전통적인 승풍은 옛말일 뿔 이기적인 성취욕과 명예욕만 판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은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사의 이름으로 최대의 법당·포교당·선방·불상 등등 엄청난 물량적 성취와 성장이 있지만, 법과 중생을 앞세운 이기적인 명예욕과 성취욕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어떻게 부인할것인가.
경전공부하고 참선수도하며 전법하는 삶에서 기쁨과 보람을 얻으려는 출가정신은 어디론가 외출해 버렸다.
그리고는 화려한 주거공간과 고급승용차를 마련하고 감투쓰고 이름날리며 권위를 부리는데 도취되어 본래의 뜻을 저버리는 게 오늘의 승단 풍토임을 누가 아니라 할 것인가.
무소유와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출가수행자의 삶이란 소박한 의식주와 적절한 학비, 의료비를 제외한 정신적·물질적인 모든 것을 교육·역경·전법 그리고 이웃의 이익을 위하여 바쳐질 때 그 정당성을 갖는다.
가난을 미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출가자의 깨달음과 전법을 위한 첫걸음이자 불교적이고 수도자적이고자 하는 기본임을 잊었다면, 그것은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다섯째, 정법정신의 의식집행말년의 만공스님은 “영가천도를 쉽고 작은 일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거야” 하시며 제사에 참석하셨다고 한다. 염불이 끝나는 것과는 관계없이 노사(老師)께서 일어나셔야만 제사가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인간과 신들의 안락을 위해 길을 가라”고 하신 부처님과 노사(老師)의 정신은 한치도 어긋나지 않음을 느낀다. 모든 불교활동이 어디에 귀착되어야 하는가를 정확하고 적절하게 나타내고 있다 할 것이다. 긴 불교사를 통해서 체계세워진 불교의식들이 인간과 영가들의 안락을 위해서임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행복의 길을 찾아나선 예를 보면, 고봉스님은 졸음을 물리치고자 3년을 보행(步行)정진했고, 한암스님은 33년을 산문(山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행복을 위한 일이 어찌 쉽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불교의식이란 청정하고 순수한 심신(心身)으로 여법하게 집행될 때 불보살의 가피 속에 법사·영가·권속의 삼독심(三毒心)이 소멸되어 지혜와 자비의 빛이 나타나고 나에게 안락·행복이 실현되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들은 신과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여법하고 진지한 의식을 행하고 있는가. 도처에서 시행되고 있는 불교의식들을 보면 불교적이고자 하는 깨어 있는 의식도 의지도 찾아 보기 어렵다.
그때 그때 이해에 따라 형식주의에 흐르고 나아가 상업화·직업화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집안이 어떤가. 재비가 얼마인가에 따라 집행되는 의식을 통해서 과연 신과 인간이 안락해질 수 있을까. 수도자가 생사를 해탈코자 진지하게 좌선하고 본래면목을 정견(正見)하고자 숙연한 자세로 경전보듯이 신과 인간들의 안락을 위하는 비원으로 의식에 임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과 세상을 속이는 죄를 짓고 있다 하리라.
몇 가지 예로써 우리 자신이 얼마나 의식없이 시류에 편승하여 흘러가고 있는지를 살펴 보았다. 누구를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또 우리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함으로써 치유책을 모색하려는 관심을 유발시키고자 함이었다.
너나없이 느끼는 일이지만, 우리는 불교적이고 수도자적이기 위하여 인내하며 정열을 바치는 애씀이 너무 빈약하다. 어쩌면 수도자로서의 정신이 탈진되어 버리지 않았나 하고 걱정되어진다. 이제 정신차리는 일에 뜻과 정이 모아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