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1. 시간의 본질
인도는 불타는 듯한 뜨거운 날씨와 히말라야의 눈덮인 산봉우리가 보여주는 극단의 자연적 대조를 갖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한 자연적 조건 속에서 인도인들은 오랜 명상의 삶을 영위해오면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영겁으로 회귀하는 우주적인 시간관을 발전시켰읍니다.
그들은 일회적이고 직선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역사적 시간에 관심갖기 보다는 어김없는 질서 속에서 끝없이 운행되는 자연의 순환에 눈을 돌림으로써 창조(生)와 종말(滅)의 영원한 반복의 관념을 키워왔읍니다.
인도인들의 원(圓)적인 회귀(回歸)의 시간관은 우주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고, 이루어지고(成) 머물고(住) 무너지고(壞) 비어버리는(空)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끝없이 반복한다고 합니다.
다시 생노병사(生老病死)의 필연적 운명에 갇힌 인간은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의 여섯 갈래 존재의 길(六道)을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것입니다.
중국인들도 반복순환적인 시간관을 갖고 있지만 그들은 생성과 소멸의 반복보다는 낮과 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쉬임없이 순환하는 천도운행(天道運行)의 어김없는 질서 속에서 인간의 실천적인 행위규범(人道)을 배우려 했읍니다.
이러한 원적 순환의 시간관과는 달리 지평선 너머 오아시스를 찾아 직선적인 행렬을 계속해 왔던 사막의 영성들은 현실위에 군림하는 절대신의 관념과 함께 창조에서 종말로 치닫는 직선적인 시간관을 창출했읍니다.
그러나 우리들 구체적인 현실인간은 결코 인도적인 순환의 시간 속에서만 사는 것도 아니며, 헤부라이즘의 종말론적인 시간 속에서만 사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우주의 필연적인 순환의 질서속에 실려 있으면서도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통해 문화적 지명을 확장하고 과거를 보존, 폐기하며 미래를 계획하고 창조하는 직선적인 자기 전개의 운동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즉 구체적인 현실역사는 우주적인 반복의 시간과 직선적인 진행의 시간이 서로 교차되는 시간의 장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위와 같이 직선적인 것만도 아니고 원적인 것만도 아닌 시간의 본질을 규명하는 입장에는 뉴우톤처럼 시간을 물질의 운동법칙에 의해 결정되는 객관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의해 일(日)과 년(年)의 차별이 나타나는 것처럼)과 시간을 공간과 관련된 일종의 형식으로 보아서 모든 운동적 현실을 포괄하는 선험적 지I명으로 여기는 입장이 있읍니다.
칸트는 후자에서처럼 주관적인 입장에 가깝게 시간을 공간과 마찬가지로 인식의 틀을 규정해 주는 직관 형식으로 파악했읍니다.
본경에서 부처님은 윤회의 굴레에 갇힌 인간 한계성의 전면적 타파를 시간의 비밀을 해명함으로써 열어 주고 있읍니다.
즉 부처님의 말씀에 의하면 모든 개체에는 각기 독립되어 있고 변하지 않는 어떤 알맹이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관계를 통한 상호반응 속에서 끊임없는 운동과 쉬임없는 자기 변혁의 과정을 계속하고 있는 것(諸行無常) 입니다.
이와같은 온갖 것의 운동과 변화의 성격이야말로 시간의 기원이 됩니다(경전에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적 단위가 독립되어 나타나지 않고, 과거의 것, 현재의 것. 미래의 것으로 표시됨으로써 존재:운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읍니다)
즉 시간이 있기 때문에 존재의 운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운동이 있으므로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존재의 운동이란 객관적으로 독립되어 있는 존재의 운동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의 빛 속에 스스로를 투여(授與)하며 인간의 실천적 행위(業) 자체로 드러나고 있는 존재운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은 주관이 아니지만(非心 주관 아님도 아니며 객관(非色)이 아니지만 객관 아님도 아닙니다(分位唯識)
또한 시간은 자연적인 필연의 영역과 인간적인 자유의 영역이 서로 하나로 사무치는 존재의 장인 것이며 그것은 똑같은 모습으로는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일회적인 것이면서도(不常) 영속적으로 쉬임없이 이어지는 것(不斷) 입니다.
즉 우주적인 순환의 시간이 되든 역사적인 진행의 시간이 되었든 시간이란 물질적 변화와 그 변화에 대한 인간의식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시간’이라고 하는 독자적인 실재란 가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관, 객관(識의 見分, 相分)이 서로 겹쳐져서 이루어가는 인식(識白證分)의 변증적 생산과정(心生滅門:諸行無常)속에서 시간 역사의 창조적 전개과정을 볼 수 있고 주관 객관이 함께 공(空)한 무한한 자기부정의 터전(心眞如門:諸行無我)에서 시간의 피안, 역사의 피안을 볼 수 있읍니다.
그러나 여기서 시간의 피안이란 시간밖에 별립된 어떤 곳이 아니라 존재의 과정적인 자기전개가 이루어지는 우주적인 터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의상(義湘) 스님의 법성게(法性偈)는 이러한 뜻을 다음같이 말하고 있읍니다.
참된 성품 깊고도 미묘하여 자기 성품 지킴없이
인연 따라 모습나네……
영원이 곧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영원이라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서로서로 같지만
어지럽게 섞임없이 따로따로 이뤄지네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
無量遠劫卽一念 一念郞是無量劫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곧 본경과 법성게에 의하면 시간의 피안이란 역사넘어, 시간이 그쳐진 그 어떤 곳이 아니니, 시간의 피안이 곧 역사의 창조적 원천이자 모든 실천적 행위의 근원이며 다시 역사적 시간이 지니고 있는 모든 희망과 절망, 화해와 충돌, 보수생과 혁명성의 통일적인 근거인 것입니다.
2. 창조적 자유
시간이 시간자체의 실체로 남아 있는 한, 미래가 예비하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지평이 비록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된다 할지라도, 인간은 시간에의 공포와 불안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남과 죽음으로 표현되는, 개인의 실존적인 시간의 굴레로부터의 해방과 사회적인 제조건의 변화로 나타나는 역사적 지평의 새로운 전개야말로 모든 인간의 영원한 바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라는 비극적인 용명의 굴레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인간의 실천적인 대응양식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읍니다.
어떤 사람들은 맹목적인 생존의지로써 현세만의 쾌락과 자기욕구 충족에 바쁜 나날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문제를 회피한 채 시간 속에 함몰되어 버린 자들의 서글픈 허둥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신비주의적인 종교가들은 기도나 선정을 통해 시간이 지멸(止藏)된 초역사의 심연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현실이란 영화의 화면 속에 흘러가는 그림과 같으며 꿈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현실이라는 꿈 넘어 있는 꿈이 아닌 진실생명 (부라만)을 인식함(Jnana)으로써 윤회의 사슬을 풀려고 합니다. 다시 육체와 영혼을 독립된 것으로 나누어 보려는 실재론자들은 개아속에 숨어 있는 영혼에 몰입함으로써 불멸의 길을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즉 전자에 있어서는 시간의 초극이란 모습없는 세계의 근원을 향한 자아의 해체를 의미하며 후자에 있어서는 초월적인 실재의 부정을 통한 인간 내재적인 영혼에의 몰입인 것입니다.
그러나 본경에서 밝힌 무실체(無我)의 교설에 의하면 초월적인 실재도 내재적인 영혼도 변치않는 그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이란 주관과 객관, 인간과 세계가 서로 하나된 터전에서 관계와 과정으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어떤 것을 고착된 실체로 집착하려 할 때 삶의 소외와 부자유(苦)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불교는 초월자에의 복귀도, 영혼에의 몰입에 거부한 채 자아와 세계의 무실체성(無我)을 자각함으로써 윤회의 굴레 그 자체를 타파해 버립니다.
하지만 무실체성의 자각이 결코 허무에로의 굴러 떨어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니 우리는 존재의 무실체성을 자각함으로써 과정을 통해 열려진 자아의 새로운 자기 규정(無常)을 계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적인 초월의 길은 시간안에서 시간을 견디는 길이며, 시간이 곧 시간 아닌 초역사의 터전에서 역사에로의 끝없는 자기 던짐의 길인 것입니다.
다시 위와같은 반복순환의 시간으로부터 해탈하려는 제입장과는 달리 종말론적인 시간관에 서서 시간의 공포에 해답하려는 입장들이 있읍니다. 이러한 입장들은 시간의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의미보다는 시간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강조합니다.
기독교도들은 신의 영원한 시간(永生)이 인간의 유한한 시간에로 돌파해 들어오는 것을 「신의 나라」의 도래라고 믿고 있읍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며 신의 자기 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한 세계입니다. 이와같이 인간 역사를 주재하고 간여하는 기독교적인 유일신관은 ‘헤겔’에 이르러서는 역사의 번증법적 발전과정을 통괄하는 절대정신으로 나타납니다.다시 기독교적인 「신의 나라」의 관념과 ‘헤겔’ 적인 역사진보의 환상은 ‘마르크스’에 의해 ‘공산사회의 도래’라는 이름으로 세속화의 옷을 입읍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교설에 의하면 만물을 섭리하는 신이나 절대정신 같은 실재는 원래 존재하지 않으며, 세계와의 연관 속에서 상호주체적인 삶의 지명을 끝없이 열어가는 인간 자신들만이 역사의 주체인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진보와 퇴보도 확정되어 있는 역사법칙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주체로서의 인간의 실천 속에서 순간순간 규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 현실 역사의 지명은 과정이자 완성이며 순간이자 영원인 것이니 석가불 이후 미륵불이 출현하여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것도, 끊어짐도 없고 이어짐도 없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름도 아닌 전체로서의 역사의 진실을 밝힌 것입니다. 또한 모든 허위의식을 타파해가는 인간의 구체적 실천 속에서 역사의 매듭 매듭마다 완성이 구현될 수 있음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즉 미륵불 출현의 종교적 상징은 하늘로부터 땅으로의 하강(下生)만을 의미하지도 않으며, 땅으로부터 하늘로의 비상(上生)만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초역사에로의 초월과 초역사에서 역사에로의 끝없는 참여를 역동적으로 통일하면서 자신과 세계를 변혁해가는 보살의 종교적 실천을 상정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보살은 끝없는 역사초월을 실현함으로써, 스스로의 태어남을 이미 끝내고(我生已盡) 존재의 얽매임을 다시 받지 않으며(不受復有), 역사속의 좌절상황에 상처받아 왜곡되거나 한(恨)을 실체화 시키지 않는 크나큰 청정(梵行已立)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살은 다시 역사의 피안에 머물지 않고 역사에로의 끝없는 자기참여를 계속함으로써 세상을 향한 윤리적 실천의 길을 가는 자(所作已作)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엄경은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有:有識,有産, 지배권력)이 실로 가지고 있음이 아니며(非有) 민중의 갖지 못함(無:無識, 無産, 피지배자)이 갖지 못함이 아닌 줄(非無)을 사무쳐 보는 깊은 지혜로, 역사의 구체적인 현실상황(三世) 속에서, 사회의 모든 계층에 들어가(普入法界) 세상을 위한 헌신적 삶을 살아가는 보살의 길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읍니다.
如來甚深智 普入於法界
能隨三世轉 與世짧明導
여래는 중도의 깊고 깊은 지혜로
널리 가없는 법계에 들어가
과거 현재 미래에 따라 구르며
세상의 밝은 스승 되어 주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