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통상 불교를 ‘붓다의 가르침’ ‘붓다에 대한 가르침’ ‘붓다가 되는 가르침’ 등으로 정의 내리곤 하는데, 그렇다면 이렇게 정의 내려지는 「볼교」와「사회」는 어떤 관련을 갖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비단 오늘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아주 오랜 과거부터 「불교」란 이 「사회」완 무관한 종교, 이 「사회」를 초월하는 종교, 이 「사회」를 초월한 그 어떤 영역으로 지향하는 종교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교와 사회가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고, 나아가 관련 청도가 아니라 언어에 있어서 종교의 언어와 세속의 언어로 달리 표현될 뿐 완전히 일치된 하나의 영역이라고 말한다면 아마 깜짝 놀랄 일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 이 둘은 하나의 영역이요, 하나의 영역에 대한 지향이요, 그에 대한 실천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왜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에 대해 그릇 알고 있고 심지어 독실한 불교신자까지도 가끔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혹 부처님의 일생과 가르침을 그릇 알고 있지는 않은가? 불교의 언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기에 대해 올바른 성찰이 있어야만 불교인이 왜 역사와 사회에 대해 거론하고 애정과 관심으로 이 역사에 동참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2
불교를 ‘붓다의 가르침’이라 할 때 ‘붓다’는 물론 2500여년 전의 ‘고오타마 신다르타’ 그 분이다. 주1) 그분은 누구나 다 알듯이 출가의 길을, 구도의 길을, 그리고 성도 후엔 설법과 실천의 길을 걸었던 분이다. 그 분이 특출한 생애를 살게 되었던 계기나 출가구도의 과정에서 해결하려 했던 문제, 그리고 설법한 것은 무엇에 대한 것이었던가 하는 점은 분명하다.
그 분은 삶들(衆生)의 불행과 고통에 대해 자신의 일과 같이 민감하게 생각했으며, 이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찾기 위해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특수생활을 택했으며,45년 간의 설법기간에서도 삶들의 불행과 고통에 대한 해결점을 설명해 주었다.
삶들(衆生)의 문제는 실로 불교의 첫 출발점이었고 그 귀착점이었다. 문제가 없으면 해결에 대한 움직임이 있을 수 없듯이 붓다 그 분에 있어서의 문제는 삶들(衆生)의 고통이었는데 그것은 통상 생·노·병·사,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성고 등으로 불리는 8고(苦)로 대변된다. 이 8고는 삶에 있어 나타나는 육체적, 정신적, 사회제도적, 실존적인 모든 고통을 다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첫출발한 그는 이러한 고통이나 불행의 문제들이 존재나 삶에 대한 여러가지 잘못된 판단이나 이해 그리고 선입견으로 야기되고 있는 점을 통찰했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 먼저 모든 사람들이 ‘올바른 이해(보디)’ 위에 설 때 이 불행한 상황들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존재에 있어서 개체거나 전체거나 물질적이거나 관념적이거나, 또 존재들이 파생시키는 상황이나 움직임 등 그 어떤 것이라도 그것이 실체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이 상호 관련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아는 그것이 바로 ‘올바른 이해(보디)’며 이러한 ‘올바른 이해(보디)’야 말로 삶들(衆生)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우선적인 키(Key)라는 점이다.주3)
이러한 ‘올바론 이해’의 입장은 ‘연기(상호관련성)의 법칙’으로 불리며 달리 ‘공(연기적으로 이루어진 존재의 양상)’이라고 표현된다.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애초 출발했던 문제를 살피게 될 때 그 자신이 가졌던 삶의 문제가 새로운 각도에서 풀어지게 됨을 그는 깨닫게 된다. 즉 삶의 문제는 개체의 문제, 독립된 상황의 문제, 실체적이고 고정불변한 문제가 아님이 이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통해 밝혀지게 된 것이다. 하나의 삶의 문제는 이제 이렇게 하여 사회적 성격의 문제로 승격하게 되는데 이러한 이야기들은 삶의 문제에서 시작된 불교가 붓다의 성도의 과정을 거치면서 삶들의 관계성을 파악하게 되고 모든 삶의 사회성을 통찰하게 되었다는 말과 다름이 아니다. 그리고 붓다는 바로 이 점을 평생토록 설법했고 또한 당시의 사회와 삶의 태도를 개조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음을 그의 일생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 분이 지향했던 곳은 하늘나라나 초월적인 삶의 영역이 아닌, 바로 우리의 삶의 자리요 문제였으며, 또 그것들은 변화의 과정 속에 노정되어 있는 존재틀 상호간의 관계성의 문제였음이 역력하게 된 것이다.
3.
불교를 ‘붓다에 대한 가르침’이라 정의 내릴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붓다’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해답을 바로 불교의 세계관, 역사관이라 할 수 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고 묻는 일은 구도자가 가져야 하는 진지한 물음 중 그 첫 번째의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의 답은 불교 그 전체의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떤 것이 부처인가’ 또는 ‘부처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뛰어난 선사(禪師)의 번뜩이는 말투로 ‘부처란 바로 사회’라고 말하면 어떨까? 붓다에 대한 이해의 문재는 부처님 당시부터 진작에 비롯된 문제이지만 그에 대한 해답은 대승경전이 성립할 즈음이 되면 가히 점입가경을 이루게 된다. 대승경전의 정화인 화엄경에 의하면 부처란 ‘고오타마 싯다르타’를 지칭함을 뛰어넘어 모든 「존재일반전체」를 가리키게 되며, 또 이 「존재일반전체」는 각각의 상황이나 개개의 영역이 서로 교감되면서 변화해가는 장(場)으로서 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인 뜻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또 이 경에서는 이러한 ‘존재의 장’을 달리「삶들(衆生)」 또는 「마음(心)」이라고 부르며 「부처」「삶들」 「마음」이란 똑같은 ‘존재의 장’을 지칭하는 다른 표현일 뿐이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마음」온 요즘 현대인들이 말하는 심리적 현상으로서의 마음을 지칭함이 아니고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분리될 수 없는, 주관과 객관이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면서 어우러져 있어 명사화될 수 있는 독자의 영역조차도 없는 ‘존재의 장’을 뜻한다. 「마음」이란 이러한 ‘존재의 장’을 표현하는 하나의 약속언어일 뿐이다. 따라서 불교를 통상 ‘마음’을 찾는 종교 ‘마음’을 깨치는 종교, ‘마음’으로써 모든 것을 설명하는 종교라고 하는데 이런 경우의 ‘마음’도 「부처」 「삶들」과 같은 뜻으로 「존재일반전체」라는 말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대가 만약 과거 현재 미래로 연결되어 있는 시간상에 드러나 있는 「부처」를 알고자 하면 「존재일반전체」의 속성을 관찰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마음」의 구현임을 알 것이다’ (화엄경)
한 경전의 말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부처」니「마음」, 「삶들」이니 하는 말은 ‘A
는 ……… 한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A처럼 실재개념이 아니고, ‘……… 한 것을 A라 부르기로 한다’의 경우에서 A처럼 하나의 약속부호, 또는 언어로 보아야 한다. 이는 모든 존재를 실재들의 집합이 아닌 상호관련성으로 보는 불교의 존재관을 언어에까지 적용해 보면 명약관화하게 드러나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주어+서술부로 되어있는 모든 훈장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것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것이 오히려 적절하다는 말이 역설적으로 통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불교상에 나타나는 많은 용어들의 실재화, 절대화, 심지어 신비화 현상은 불교 본래의 존재관에 비추어 불식되어져야 하리라 본다.
이런 점은 물론 「불교」 뿐만 아니고 「사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회」란 여러 개인이 모여 이룩한 다수의 유기적 구성체를 뜻함인데 이런 많은 삶들(衆生)의 문제는 독립된 한 개인 또는 개체들이 양적으로 다만 집합되어 있음만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한 부분의 삶은 다른 부분 또는 전체의 삶에 상호연관적 관계에 서 있다. 그리고 한 사회 전체의 삶은 한 부분의 삶에 상호규정, 구속, 관련 등의 영향속에 얽혀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단순히 「사회」란 것은 혈연, 풍속, 법 등으로 맺어져 있는 어떤 ‘전체사회(토탈소사이어티)’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그야말로 「사회」란 불교식의 용어로 말한다면 하나(一)도 아니요 많음(多)도 아니요, 동일함(同)도 다름(異)도 아닌, 다만 유기적 관련으로 이루어진 그 어떤 것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사회」라는 것은 「불교」에서의 ‘붓다’‘삶들(聚生)’ ‘존재일반전체’ ‘마음’이라는 것과 얼마나 닮아 있는가? 불교를 「붓다에 대한 가르침」이라 정의할 때 달리 「사회에 대한 가르침」이라 말할 수는 없는가?
4.
우리는 이제 ‘붓다’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다이너믹한 개념을 도출하게 되었다. 그것은 ‘붓다’를 ‘고오타마 싯다르타’ 일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모든 ‘존재일반: 즉 ‘역사’와 ‘사회현상’을 뜻하는 일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마지막 불교의 정의인 「붓다가 되는(이루는) 가르침」을 살피게 될 때, 이 명제에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역사적 의미가 깃들어 있음을 즉각 통찰할 수 있다.
즉 ‘붓다’가 된다 함은 무엇인가, 바로 존재일반’이 된다 함이며 ‘역사’ ‘사회’가 된다 함이 아닌가, 한 개체나 부분의 문제가 아닌 부분과 전체가 어우러져 있는 것이 된다 함인데 이렇게 되어야만 그릇된 이해로 빚은 개체화되고 편협화 된 현상을 떠나게 되고 또 그로 인한 불행과 고통을 떨칠 수 있다는 것이다. ‘붓다가 된다’함은 모든 존재와 삶을 안락과 명화로 이끄는 일이다. 이 말은 ‘붓다가 된다’는 말과 ‘올바른 역사의 구현’ ‘건전한 사회의 실현’이라는 말이 표현만 다를 뿐 실상은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일깨워 준다.
그런데 이 명백한 「붓다가 되는 가르침」을 앞두고 우리는 뜻밖의 함정에 빠져 있음을 본다. 그것은 다름아닌 ‘종교적 언어’와 ‘세속의 언어’에 대한 혼돈이다. ‘부처완성’ ‘중생제도’ 등의 모든 불교적 언어들은 상징적인 종교언어다. 그리고 불교는 이러한 상징적인 언어체계로 구성된 관념상의 형태며 실상 그것의 바탕과 지향점(회향처)은 바로 구체적인 현실의 역사다. 우리는 불교라는 것이 그것 자체로서 독자적인 실재영역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불교란 구체적인 현실역사 속에서 파생된, 종교적인 의미와 언어체계의 집합성이라고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불교(法)까지도 연기적(상관적) 법칙의 구조 속에서 볼 수 있어야 불교적 시각에 걸 맞는 일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불교와 사회를 각각 다른 세계에 대한 설명이라고 하는 이원론에 빠져 있다. 불교는 현실 역사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태동된 가르침이다. 변화 다양한 현실을 설명하고 그것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상징적인 종교언어의 표현을 빌었을 뿐 실상은 똑같은 문제와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불교인은 이러한 종교적 언어를 세속적 언어로 풀이해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마치 외국어를 구사함에 있어 문장을 읽고 난 뒤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읽으면서 동시에 그대로 번역하여 이해하는 것처럼 그렇게 불교언어를 세속언어처럼 사유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교언어가 구체적이고도 살아있는 바로 우리의 문제에 연결된 것이며,역사성과 사회성을 획득한 불교의 견해가 -F체적인 사회과학적 토대 위에 구현되게 될 것이다.
이제 불교인은 흔히 무의식적으로 남발하는 이야기들-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악을 짓지 말라, 선을 행하라,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부처를 이루어야 한다, 불국정토를 이룩한다는 등-에서 각각의 언어에 대해 명확한 이해와 구체성을 결여할 땐 철학적으로 동어반복(토틀러지)의 순환논리에 빠지게 되며, 현실적으론 무엇에서 출발했으며 무엇으로 지향하는 삶인지, 수행인지 모르는, 그야말로 종일토록 울었는데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됨을 통감치 않으면 안될 것이다.
5. 오늘날 불교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비역사적인 태도에서 본래의 역사적 모습으로 종교적 상징언어체계 에서만 안주함에서 구체적인 현실언어로 돌아오는 일이다. 동어반복적인 논리에서 구체적인 사회과학적 논리를 읽어내어, 현실상의 우리의 문제와 결부된 실천이론과 고도의 도덕의식(大悲心)으로 현실 속에 참여하는 일이다. 이러한 입장에 서는 사람을 우리는 “보살’이라고 하는데 이 뜻은 ‘올바른 이해로 비춰본 세계관(보디)’이 ‘구체적 역사현실(사트바)’과 결부된다는 뜻이며, 포는 ‘구체적 역사’가 ‘올바른 시각’ 위에 건립되어 있음을 말한다.
한편 이 ‘보살’이라는 개념에는 또 한번의 함정이 있는데, 그것은 보편적인 사회과학적 이론 그 자체까지도 바로 현실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자연과학의 경우와 달리 한 사회가 공통적으로 지지 또는 근거하는 사회과학적 「패러다임」이 과연 존재하는가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어느 시대나 장소 상황에도 적용되는 사회학적 이론이란 사실 불가능하니까, 따라서 하나의 사회 과학적 「패러다임」이 고정화되고 절대화 될 때 그에 따른 병폐는 클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오늘날 사회과학적 이데올로기들이 일면으로는 역사와 사회를 설명하는데 이바지 했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이 절대화됨으로써 대다수 계층, 그 구성 인자들의 올바른 성장과 삶의 구현을 가로 막았던 것이다. 그래서 불교가 사회과학화 되어야 한다. 역사성과 구체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말은 단순히 현금의 사회과학적 언어와 이론으로 포장한다든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사회이론으로 고정화됨을 뜻함이 아니며, 그야말로 구체적인 현존의 실상, 바로 우리들의 문제와 부단히 만나고, 인식하고, 대처해 나가는 일이다.
보살은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틀에서 부단히 벗어나 변화하는 현실과 대응해 나감으로서만 가능하다.
{(보디+사트바(상징적 종교언어))+사트바(사회과학이론)}+사트바(구체적 현실)=보 살
보살의 삶은 이렇게 보디와 사트바를 끝없이 지양하면서 역사적 의식으로 실천적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사는 오늘날 한국땅의 보살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
보디의 시각은 기본적으로 갖춰야 될 불자의 본분사(근본일)이므로 묻지 않거니와 보디의 시각이 귀착되고 뿌리박혀 구현되어야 할 우리의 현실상황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인가? 현대인 또는 한민족을 규정짓는 현 사회 이데올로기나 체제, 내지 사회규범에 대해서는 ? 아니 처음부터 다시 말한다면 보디의 시각이란 본디 무엇이었던가? 바로 현존재 일반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뜻함이 아닌가. 그런데 현세계와 역사사회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보디를 갖추었다고 할 수는 없다. 보디와 사트바는 상호연관적(연기) 개념이다.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은 텅빈 허공에다 보디의 시각을 상정시키고는 이러한 시각을 먼저 확립하고 난 뒤 역사와 사회에 참여하자고 말한다. 그러기 전엔 관심조차 눈길조차 사회나 역사에 돌리지 말자 한다.
‘그대 만약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붓다」를 알고자 하면(즉 보디의 시각을 얻고자 하면), 먼저 마땅히 존재일반의 속성을 통찰하라’ (화엄경)
우리는 이제 진정한 불교 본래의 입장으로 돌아와야 한다.
역사와 사회에 관심가짐이 올바로 인식함이 올바른 실천적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불교적 삶이요, 불교는 다만 이 이야기를 상징적 종교언어로 표현했을 뿐이라고.
※주
1) 물론 정통적인 볼교인은 이 경우에도 붓다를 고오타마 그분에게 한정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문제는 결국 ‘붓다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물음을 낳게 된다.
2) 그의 가르침의 체계인 4가지 진리(고의 인식, 고의 원인, 고의 소멸, 소멸의 방법론:四諦)가 그의 일생과 닮은 정은 대단히 흥미롭다.
3) 여기서 조심할 점도 ‘어떠 어떠한 것’틀이 있어 상호 관련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이라는 그것조차도 독립실체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서로 이루어 주면서 동시에 이루어 지는 것이며 무엇보다 우전 그러한 일들이 변화의 과정에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이 변증법적 논리와 불교의 연기적(상호관련적) 법칙의 중요한 차이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