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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구 유적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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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논단 - 장충식 1985년 08월 42호
Ⅰ
이땅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의 ’정신사에 막중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나아가 대소가람(大小伽藍)의 건립은 우리의 예술사상 일대 금자탑을 쌓았음이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신라 동해구(庫海口) 문무대왕의 수중릉침(水中陸寢)이 자리잡은 이 일대에 얽힌 사상적 내실은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 큰 충격과 감회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먼저 이곳에서 말하는 동해구라 함은 토함산(吐含山)의 계류(溪流)가 동해로 흘러 드는 감은사(感恩寺) 앞 바다의 어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른 것으로서 “유언을 따라 동해구 대석상(大石上)에 장사 지냈다” “세상에 전하기를 왕이‘ 용으로 화하여 나라를 지킨다고 하여 그 바위를 가라켜 대왕석(大王石)이라 하였다”고 한 것에서 유래된다. 혹자는 이 같은 “동해구”란 용어에 대하여 얼른 수긍하지 않으려 하지만 일단 우리들은 옛 기록의 문자를 그대로 따라야 하리라 본다. 뿐만 아니라 그 계류가 흘러오는 산이 저 유명한 토함산이고 보면 이 또한 동해구라는 명칭 자체와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토함산의 희미가 부처님의 서기(瑞氣)어린 자하(紫露)를 토하고 또 함(含)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그 산의 계류가 흘러드는 바다의 입구를 동해구라 불렀음직 하다.
아무튼 이곳 동해구 주변에는 대왕의 장골처(藏骨處)인 대왕암이 있고 대왕의 화룡(化龍)을 추모하던 이견대(利見臺), 그리고 대왕의 호국원찰(護圖願刹) 감은사(感恩寺)가 자리잡은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흔히 이들 유적들을 동해구의 3대 유적이라고도 하나 이중에서 대왕암은 1967년 5월에 가서 비로소 확인되어 학계에 널리 알려졌고 이후 국민들의 비상한 관심과 함께 주변 유적이 발굴 조사되었다.

Ⅱ
이들 유적가운데 이견대와 감은사는 모두 해중(海中)의 대왕암을 위하여 건립된 것으로서 이들은 오랜 세월 대왕 유적의 망각과 함께 점차 페허로 변하였으며, 이견대는 그 자취마저 잊을 뻔 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1967년 4월 해변의 고대(高臺) 푸른 보리밭 사이의 발굴에서 이견대의 유적을 찾을 수 있었고, 그 다음날인 5월 1일에는 잔잔한 바다에서 대왕암의 위적(偉蹟)을 대할 수 있었다.
다행히 필자는 첫 배로 건너가 대왕암의 험준한 바위에 내려 조심스레 절벽을 타고 내려가 그 중앙부에 위치한 릉침(陸寢) 주변에 도달하였을 때 참으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비경(秘境)에 온 듯한 감회를 금할 수 없었다. 주변에는 해초와 어패류들이 즐비하게 서식하고 있었고-해녀들의 말을 빌리면 이곳에서는 어로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하였음-어딘지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 듯 하였다. 연신 파도가 칠 때마다 정동(正東)의 수로(水路)에서는 일정량의 해수가 들어와 능침 주변을 어루만지면서 서쪽 수로를 통하여 흘러 가곤하였다. 이윽고 인솔하신 황수영(黃壽永) 은사(恩師)님의 제일성(第一聲)이 터졌다. “저 수중의 돌이 이 섬의 돌과는 다르지 않는가!” 이 말씀은 한동안 우리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였고 이윽고 식견이 없었던 우리들에게도 아! 이것이 바로 대왕 장골처의 개석(蓋石)이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수년 동안이나 강의시간이면 누누히 문무대왕과 그 주변 유적에 대하여 은사로부터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해수에 잠겨 5월의 햇빛을 받아 찬연히 빛나고 있는 거대한 자연석 ! 이 판석은 길이 3.7m 폭 2.06m, 높이 1.45m로 조사되었다. 주변을 말끔히 청소하고 참으로 오랫만에 능침 주변에서 예배와 축원을 드렸다. 이에 우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은사께서도 이 대왕암의 도선(渡船)이 처음이었기에 당시 그 위적(偉蹟)의 발견은 우리들에게 큰 충격과 감격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아무튼 이 유적의 발견으로 인하여 그 주변의 이견대를 비롯한 감은사지에 대한 주목은 더욱 고조되었음이 사실이다. 이후 이견대의 발굴이 완료되어 오늘날 그곳에는 이견정(利見享)이 복원되어 대왕암을 멀리서 참배하는 명소가 되었고 감은사 역시 대왕암의 새로운 주목 이후 십 수년이 걸려 발굴조사가 완료되었으나 가람의 복원계획은 전무(全無)한 상태로 되었다.
무릇 세상만사는 본말(本末)이 있고 어떠한 일이든 그 내실(內實)이 있어야만 생명력을 회복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제 감은사는 그 본래의 건립 목적에서 떠나 하나의 생명 없는 유적지로 전락되고 있다. 문무대왕의 유적이 중요하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정녕 국가수호의 귀감을 찾고 동시에 호국의 살아있는 교육장으로서 문무대왕의 위대한 정신을 일깨운다면 대왕의 성려(聖慮)를 외면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에 대왕의 추복(追福)을 위하여 건립된 감은사 역시 살아서 숨쉬는 복원 중창의 기틀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이에 문무대왕릉에 얽힌 역사적 배경을 다시 돌이켜 보고 감은사 건립의 필요성을 말하려는 것도 이 유적이 지난 깊은 뜻을 공감해 보자는 데서이다.

Ⅲ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은 다 알다시피 우리 역사상 최초로 반도를 통일한 그야말로 문무 겸비한 통일의 영주이다. 그는 평생 온갖 정력을 국방에 쏟아 손수 서정북토(西征北討)의 정책을 써 삼국통일을 이룩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대반석(大盤石) 위에 건설한 너무나 유명한 영걸(英傑)이시다. 다만 그는 통일 이후 바다의 우환을 근심하여 이곳 동해변에 병략적 내실을 도모하여 위대한 성려(聖慮)를 펴게 된다.
대체로 이 같은 사실은 육지와 바다의 방벽을 보다 굳건히 하기 위한 정신적 배려에서 출발되었다고 생각된다. 먼저 국도 서라벌의 수호에 있어서는 그 동쪽을 막아주고 있는 동악 토함산의 방어를 위하여 천하장사 석탈해를 동악산신으로 모시게 된다. 이는 문무왕 20년(680) 대왕의 꿈에 석탈해가 나타나 그의 유골을 소구천(疏丘川)에서 파내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라고 부탁한 것을 따른 것이지만 그만큼 국도의 수호에 동해의 중요성을 대왕 자신이 절감한 결과였다고 하겠다. 그리고 또 하나는 대왕 스스로가 동해구에 창건하다 완성을 보지 못하고 그의 아들 신문왕에 의하여 이룩된 감은사가 그것이다. 이 절은 대왕이 생전에 왜병을 진합코자(欲鎭倭兵) 시창(始創)한 것으로서 그 본래의 절 이름은 진호국가(鎭護國家)의 의미를 지닌 진국사(鎭國寺)였다. 그러나 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승하함에 그 다음해인 신문왕 2년(682) 낙성을 본 절로서 부왕(父王)의 크신 은혜에 감사하는 뜻에서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더욱 주목하여야 될 것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두 기록의 내용들이다. 이들 두 기록은 모두 대왕의 화룡(化龍)을 말하고 동시에 그 근본 목적이 바로 나라의 수호에 있음을 전하여 준 사실이다. 다만 「유사(遺事)」의 기록은 대왕의 홍서(弘誓)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여 줌으로써 대왕자신의 불교적 인생관을 알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되었고, 동시에 「사기(史記)」의 내용은 대왕의 유조(遺詔)를 자세히 기록함으로써 당시의 국방작 상황과 대왕 자신의 사상적 내실을 짐작케 한다.
먼저 「유사」의 기록이란 동서(同書) 권2 문호왕 법민조(法敏條)의 내용으로서 “왕이 재위 21년 신사(辛已)에 돌아가심에 유조를 쫓아 동해중 대암상(大岩上)에 장사지냈다. 왕이 평시에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매양 이르기를 내가 죽은 후에 호국대룡이 되어 불법을 숭봉하고 나라를 수호하기를 원한다고 하매 법사가 말하기를 용은 축생이니 무엇을 보답하리오 하니 왕이 말하되 내가 세간의 영화를 싫어한지 오래라 나쁜 과보의 짐승이 되더라도 나의 뜻에 합당하다”고 하였다.
또 동서 「만파식적조(萬波息笛條)」에는 감은사 사중기(寺中記)의 내용을 인용하여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 하여 이 절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 해룡이 되고 그 아들 신문이 즉위하여 개요(開曜) 2년(862)에 완성하였는데 금당 섬들 아래 동쪽을 향하여 한 구멍을 내었으니 이것은 용이 절에 들어와 선호(族繞)하기 위한 설비다. 생각컨대 유조(遺詔)로 장골(藏骨)케 한 곳을 대왕암이라 하고, 절이름은 감은사라 하였으며 그 후에 용의 현형을 본 곳은 이견대라 하였다”고 한 내용이라든지 또는 동서(同書) 왕력편(王曆篇)의「제10 문무왕 “릉재감은사 동해중(陸在感恩寺東海中)’이라 한 사실 등에서 감은사야 말로 호국대룡이 된 문무대왕과 함께 동해룡을 위하여 국방의 일선에 건립된 호국사찰임을 알겠다. 즉 이견대라 함은 주역(周易)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라 한 내용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 해중릉을 바라보는 고대에 위치한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7 문무왕 조에 기록된 대왕의 유조(遺照)는 매우 감동적이다. 이 중에서 대왕의 장례와 관계 있는 부분만을 옮기면 “…종묘의 주재자는 잠깐 동안도 비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니 태자는 구전(柩前)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또 산곡(山삼)은 변천하고 인간 세대는 옮겨가니 오왕(吳王)의 북산 무덤에 어찌 금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으며 위왕(魏王)의 서릉(西陸)을 바라보는 것도 오직 동작대(鋼崔臺)의 이름만 듣게 된다. 옛날에 만기團機)를 다스리던 영왕(英王)도 마침내 한 줌의 흙무덤을 이루어 초부(樵夫)와 목동이 그 위에서 노래부르고 여우와 토끼들은 그 곁에 구멍을 파고 있으니 이는 한갖 자재만 낭비하고 거짓만을 책에 남기며 공연히 사람들의 힘만 수고롭게 만드니 이는 유혼(幽塊)을 오래도록 건지는 도리가 아니다. 고요히 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상하고 이 몸이 그지없을 따름이니 이와같은 것은 나의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임종한 뒤에 10일이 되면 곧 궁문 밖 뜰(庫內外庭)에서 인도의 의식에 따라 불로써 살라 장사지내라.(依西固之式 以火燒葬) 복례(服禮)의 경중은 본래부터 정한 법도가 있거니와 상례의 제도는 힘써 검약한 것을 쫓아라…”
서라벌 국도를 보노라면 산과 같은 거대한 무덤들이 즐비하다. 이제와서 저들이 학문적인 대상은 될지언정 당시로 돌이켜 본다면 민중의 수고로움만 끼쳤다는 생각을 면치 못한다. 대왕은 이미 무상의 도리를 깊이 터득하였음인지 이와같은 일은 내가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한 몸을 불살라 그 유서 갚은 동해구 대왕암상에 장사지냄으로서 군주의 일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이는 오로지 국가의 장래와 민생의 복리를 생각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한 만대에 귀감이 될 위대한 처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직 머리 숙여 대왕의 명복을 벌 뿐이다.

Ⅵ
이와같은 동해구의 유적은 대왕과 직접 관계된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닌다. 이제 감은사지(感恩寺址)의 발굴이 완료되어 앞의 기록에 따르는 여러가지 특수한 시설이 확인되었음은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사실로 되었다. 그 같은 배치는 대왕의 화룡에 따라 정진적 내실을 찾았던 신라인의 용의 주도한 착상이었다고 하겠다.
감은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가람배치를 이룩한 사찰로서 용당산 아래 남북 자오선상(子午線上) 에 이룩된 신라의 명가랍(名伽藍)이다. 남쪽의 중문을 지나 금당 앞에는 신라 최대의 3충 쌍탑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금당 뒷쪽에는 강당이 놓여있어 이들은 모두 중문에서부터 감싸고 있는 회랑으로 연결된 전통적 가람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금당 초석 아래에 별개의 공동(空洞)을 가함으로서 일반 건축 기단과는 현저한 차별상을 가져왔고 이것이 바로 해룡을 위한 특수한 방안으로 판단되었다. 또 중문 앞의 도선장(濟船場)도 지난 해 발굴 조사되어 그 전모가 들어났다.
분명 감은사는 대왕의 성려에 힘입어 이를 추복(追福)키 위하여 건립된 사찰임이 확실하다. 이 유적을 단순히 흘러간 지난날의 사실로만 남겨두기에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구슬프지 않은가. 어찌 후손된 도리로서 대왕의 성려(聖慮)에 추념의 뜻을 같이하지 않으려는 자 있으리오만 이 사역(寺域)은 하루 속히 복구되어 용당산 포구에서 해룡의 「입사선요지처(入寺族繞之處)」 가 되었던 그 본지(本旨)를 따라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하여 대왕 승하일인 7월 1일이면 이곳에서 대왕의 추복을 위한 조출한 재(齋)라도 마련하여 감은사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였으면 하는 소망이 어찌 필자 한 사람만의 소박한 바램일 수 있을까. 대왕의 기일(忌日)이 한 달 남짓한 이렇게 무더운 여름천이면 언제나 느껴보는 한가닥 소망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