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씻던 물로 큰 불을 끄다-나옹선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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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이야기 - 편집실
1985년 07월 41호
대가람에는 어디든 전설과 일화(逸話)가 많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화재는 인간에게 있는 재앙 중에서 가장 큰 재난이기 때문에 화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해인사는 지리적으로 개울이 멀리 떨어져 있는 까닭에 늘 화재에 대한 조심을 하고 있으며, 특히 세계적인 성보(聖寶) 팔만대장경이 모셔져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해인사에서는 오월 단오에는 화기(火氣)가 많다고 알려진 남산에 선원 대중스님네가 매년 소금을 묻어 화기를 예방하기도 한다.
가야산중에 크고 작은 화재를 당한 것을 역사적으로 보면 이조의 숙종 20년 을해년부터 순조 17년 정축년까지 120년간 여석 차례의 큰 화재가 났으며 그 이전에도 여러 번 대 화재가 있었다고 한다.
연대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고려 공민왕 때의 일이다. 경상북도 문경군에 소재한 대승사(大乘寺)에 호침암(好寢庵)이라고 하는 산내 암자에 훗날 한국불교사에서 명승으로 이름높은 나옹(懶翁 1320-1376) 스님이 어린 동승(童僧)으로 주지스님의 시봉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여름날 아침 일찍이 주지스님 아침 공양상에 올리기 위해 밭에서 상치를 한 바구니 뜯어다가 그것을 씻기 위해 샘물로 나갔다.
깨끗한 샘물로 상치를 씻느라고 한참 동안 아무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고개를 들어 동남쪽으로 보니 벌겋게 화기가 충천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자세히 그것을 살펴보니 멀리해인사의 대적광전에 불이 나고 있는 것이다. 어찌나 급한지 씻고 있던 상치를 들어 하나씩 둘씩 공중으로 날려 보냈고 또 물을 손으로 떠서 해인사 있는 쪽으로 훌훌 뿌려 보냈다. 그랬더니 동천에 화기가 점점 꺼지면서 하늘로 올라가던 검은 연기가 차차 사그러져 가는 것을 보고 나옹사미는 암자로 돌아왔다.
약간 모자라는 상치를 즉시 조반상에 올려 주지스님께 드리니 주지 스님은 「오늘 아침에 조반이 왜 이리 늦었느냐 그리고 상치를 놓으려거든 좀 듬뿍 놓을 것이지, 이것은 마치 누군가 먹다가 밥상에 올려 놓은 것이로다. 이 어찌된 영문이냐」하고 묻자 나옹사미는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과 그 까닭을 소상히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스님께서는 역정을 내면서 「그런 당치도 않은 거짓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해인사가 여기서 수백리 떨어져 있거늘 그런 거짓말을 뉘 앞이라고 지껄이고 있느냐. 이 고약한 놈 같으니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상치와 한 웅큼의 물로 불을 껐단 말이냐」 심히 꾸중을 하셨다.
나옹사미는 아무말 없이 조반이 끝난 뒤에 조반상을 들고 부엌으로 나가려 했다. 나가다가 나옹사미는 그만 장작에 발이 걸려서 상을 안고 앞으로 엎어지면서 부뚜막에 놓였던 천수(天水) 물을 엎지르고 말았다. 무엇이던지 조심조심해서 하는 일에 더 실수가 많은 법. 가뜩이나 꾸중을 듣고 마음이 불안한데다가 또 이렇게 일을 저지르고 보니 주지스님은 뒤따라 나오면서 더욱 헝화를 부리셨다. 「스님 염려 마십시오. 소승이 엎지른 천수물은 다시 주워 담아 놓겠습니다」그리고는 엎지른 물을 두손으로 모으자 마치겨울에 어린애들이 눈을 모으듯이 구슬처럼 물들이 모여서 커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그 물 덩어리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길로 한 번 차 버리니 그 물덩이가 굴러가다가 바위에 부딪치자 한꺼번에 물 덩어리가 깨어 터지는 동시에 물이 스쳐간 바위 등에는 밭고랑처럼 물이 지나간 자리가 났다.
이것을 보고 난 뒤로부터 모든 사람들이 나옹사미가 보통 스님이 아닌 줄 알고 급히 해인사로 주지 스님이 직접 가서 알아보니 해인사에 큰불이 났던 사실이 있었으며 어디에선지 공중에서 상치 잎사귀와 물방울이 소낙비 처럼 쏟아져 대적광전에 무섭게 타오르던 불길이 순식간에 꺼졌다고 하였다.
주지스님은 해인사를 단숨에 다녀오던 길로 즉시 나옹사미를 찾았으나 나옹사미는 이미 그 산을 떠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