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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불교의 해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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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역해 - 법성 1985년 07월 41호
현성경(賢聖經)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 때에 부처님께서는 ‘바라나시”의 선인이 사는 사슴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네가지 진리가 있다. 어떤 것이 넷인가 이른바 괴로음의 진리(苦諦),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集諦), 괴로움이 사라진 진리(滅諦), 괴로움을 없애는 길의 진리(道諦)이다.
만일 비구로서 괴로움을 이미 알아 이해하고 괴로움의 원인을 이미 알아 끊고 괴로움이 사라진 열반을 이미 알아 중득하고 괴로움을 없애는 길을 이미 알아 닦았다면 그런 비구는 앞을 가로막는 문빗장과 자물죄가 없어지고, 깊은 구덩이롤 편편하게 고루고 모든 험한 어려옴들을 건너뛴 현성이라 불리워지며 성인의 진리의 깃대를 세운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빗장과 자물쇠가 없음인가. 이른바 욕심세계의 다섯가지 번뇌를 이미 떠나고 안 것이니 이것을 빗장과 자물쇠가 없는 것이라 한다. 어떤 것이 구덩이를 편편하게 고룸인가. 무명 (無明)이 깊은 구덩이니 그는 그것을 끊고 알았으므로 구덩이를 편편하게 골랐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험한 어려움을 건넘이며 어떤 것이 모든 묶임에서 해탈함인가. 이른바 애욕을 이미 끊고 안 것이다.
다시 어떤 것이 거룩한 깃대를 세움인가, 이른바 ‘나’라는 거만을 이미 끊고 안 것이니 그것을 거룩한 깃대를 세움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잡아함경 권15)


(해 설)
1. 소외로부터 자유로
불교는 세계해석의 다양한 견해가운데 하나의 해석으로서 이 세상에 나타난 종교가 아닙니다. 불타는 세계를 자아에서 분리된 외적인 것으로 설명하시지 않고 자아와 세계가 서로 내적으로 주어진 것임을 오온, 십이처, 십팔계설 등을 통해서 극명하게 밝혀주고 있읍니다.
그리고 나중 이러한 교설은 유식불교가(唯識佛敎家)들에 의해서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는 언어로 새롭게 천명되고 었으니 불교에 있어서 세계에 관한 어떤 교설도 사실은 세계와 관련된 언간의 해방에 그 궁극적인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우리들 소외된 인간들(衆生)에게 현실의 부자유와 모순을 자각하게 하고(苦諦) 삶에 내포된 부자유와 소외의 원인을 규명(集諦), 타파하게 함(道諦)으로써 자아와 세계를 창조적인 자유의 모습(滅諦)으로 변혁하려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괴로움(苦)이라는 표현은 즐거움(樂)과 대립된 괴로움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음과 변화의 운명에 갖힌 인간의 비극적인 유한성 자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단절된 현실상황 전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한 모든 삶의 양상이 괴로움(一切皆苦)이라는 언어로 표현된 것이니 (인간의 실존적 고통이든 사회적 고통이든 간에) 우리들이 고통을 피해 추구하는 쾌락마저도 사실은 괴로움의 다른 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불타가 출현하기 전에도 고대 인도인들은 완전 무결하고 청정한 초월적 신성을 알지 못함으로써(無知) 윤회의 굴레속에 묶여 있는 인간의 삶을 괴로운 것(Dukha)이라고 표현했읍니다. 이러한 인도적인 고통의 관념과는 달리 인간의 운명에 간여하고 인간에게 진노의 불을 내리는 유일신의 실재를 믿어왔던 유다이즘의 전통은 신의 명령에 대한 거역의 댓가로서 오는 ‘죄’의 관념을 키워왔읍니다.
불교는 고통의 원인을 초월적 신성에 대한 무지나 신의 명령에 대한 거역에서 찾지 않고 세계의 실상에 대한 올바른 통찰의 결여(無明)와 열려진 인간본성의 왜곡된 실현속(貪瞋痴)에서 찾읍니다. 또한 초월적인 신성이나 신의 명령이라는 전제 조차 고통의 문제에 대한 회피이며 환상적인 허위의식의 산물임을 보여주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Marx)의 다음과 강은 종교비판은 불교에 관한 한 결코 타당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읍니다. “종교적인 고통은 현실적인 고통의 표현이며 동시에 현실적인 고통에 대한 반발이다. 종교는 억압받는 자의 한숨이고 무정한 세계의 애정이며 또한 영혼없는 세계의 영혼이며 민중의 아편이다”
위와 같은 마르크스의 종교에 대한 설명과는 달리 불교는 현실적인 고통에서 도피하기 위한 어떤 환상적인 세계의 설정(그것이 비록 신, 이데아등과 같이 영원과 불변의 옷을 입은 것이라 하더라도)도 거부한채 오히려 현실(十八界)안에 영원한 자유의 나라(法界:常寂光土)를 세우려 합니다.
경전은 인간의 소외되어진 삶의 모습을 다음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읍니다. 첫째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괴로움(生老病死의 四苦), 둘째 사랑하는 사람을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愛別離苦), 셋째 소유하고자하나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넷째 몸과 마음, 주관 객관의 분열이 끝없이 이어지는 괴로움(五陰盛苦)이 그것입니다.
연기의 교설에 의하면 세계와 관련되어지지 않는 인간의 고유한 내면의 영역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와의 살아있는 창조적인 고나계성을 잃어버릴 때 참도니 인간본성은 상실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오온(五蘊)으로 표시되어지는 현실세간에는 ‘나’와 ‘내 것’이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데도 ‘나’와 ‘내 것’의 실체적인 집착을 일으킴으로써 죽음의 불안, 사람과 사람사이의 불신과 대립, 착취와 억압의 관계가 생겨나고, 정복과 파괴라는 사람과 자연사이의 부조화된 관계가 설정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사제설은 인간과 사회의 모든 소외된 현실양상이 세계의 참된 모습이 아니라(不常無自性) 어떤 왜곡된 원인에 의해서 나타난 것임을 밝혀줌으로써 그 원인의 제거와 해소를 통해 모든 소외는 극복되어 질 수 있고 자유로운 인간과 조화로운 사회가 구현되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읍니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과 세계의 참모습은 소외되어지고 왜곡되어진 모습이 아니라, 무한히 열려져 있고 끝없는 생명력으로 충만한 진리의 땅(本覚) 임을 보여주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아지라’라는 부처님 당시의 재가 불자는 부처님으로부터 고통발생의 원인이 주관적인 것도 아니며(非自作) 객관적인 것도 아니며(非他作) 주관·객관의 괴 실체적인 결합도 아니며(非自他作), 그렇다고 주관·객관의 현실을 떠나서 있는 것도 아니다(非無因作)는 설법을 듣고 곧바로 나고 죽음의 한계를 벗어버리게 됩니다.
위 아지라경의 설법에 의하변 인간소외와 분열은 주관 객관의 어디에도 실체적인 출발이 없는 것이지만(煩惱本空) 주관 객관의 잘못된 연기관계에 의해서 순간순간 규정되어 나오는 것(煩惱不空)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와 유리된 내면세계만을 붙들고 앉아서 정신의 자유를 추구하려는 종교가도, 인간해방을 경제질서와 정치제도의 변혁만으로 달성하려는 사이비 혁명가도 인간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답자라고 볼 수 없읍니다. (주관주의와 객과주의, 관념론과 실재론의 대립의 해소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온갖 것에 머무름 없는 중도행과 주,객의 소외를 극복하려는 실천적인 노력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고통이 본래 자성이 없다는 불타의 설법은 고통이 본래 없는 현실에의 안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이 본래 없는 곳(如實空)에 끝없이 충만한 변혁의 에너지와 다함없는 생명의 힘(如實本空)을 보라고 한 것이니 열반경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읍니다.

空者一切生死 不空者大涅槃
소외된 삶의 모습이 실체가 없는 줄 알면
나고 죽음이 없는 그 곳은
영원한 생명력과 새로운 변혁의 힘이 넘치는 곳이다.

2. 열반(涅槃)과 정토(淨土)

위에서 우리는 고통이라고 표현되어진 소외된 삶의 양상이 인간본성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객관으로 주어진 전체로서의 삶의 장속에서 연기되어 지는 것임을 살펴보았읍니다.
그리고 고통의 극복이 고통스런 현실세간을 떠난 다른 어떤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출발하는 그 곳, 소외가 빚어지는 현장에서 고통의 원인과 조건이 실체성을 타파, 해소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아 보았읍니다.
그러므로 번뇌의 타는 불꽃이 사라지고 고통이 끊어진 열반의 상태는 관계와 과정이 사라진 비존재의 심연으로 돌아감이 아니라 주관-객관 인간-세계가 단절이 없는(不二) 창조적인 관계성을 회복함에 있읍니다.
즉, 고통과 소외가 인간내면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삶의 방식에 의해서 규정되어 나오는 것처럼(流轉緣起) 열반도 내면의 어두운 구석에 자리잡은 고통의 도피처가 아니라 세계의 실상에 부합된 실천적 행위(八正道)를 통해서 끝없는 생명력으로 솟구쳐 나오는(還滅緣起) 진리의 물줄기이며 꺼지지 않는 삶의 불꽃인 것입니다.
잡아함 천타경에는 “온갖 것이 실체가 없고(諸法無我) 열반이 고요하다(涅槃寂靜)면 지금 대상을 보고 듣는 이 자아는 무엇일까”라고 고민하고 있는 ‘천타’장노의 회의에 찬 모습이 기술되어 있읍니다.
이 때 ‘아아난다’존자는 그에게 있음과 없음, 이 두가지 치우친 견해를 떠날 때 여래의 중도(中道)를 볼 수 있다고 답변합니다.
즉 주관-객관 자아-세계가 실체가 아니므로 ‘나’라고 할 것도 없고 ‘내 것’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실체에 대한 부정이 결코 허무적인 비존재(非有)에로의 침몰을 의미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존재의 실체성을 타파함으로써 열려진 자유의 터전속(空)에서 필연적인 대립(주-객)의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고 필연적인 대립의 현실속에서 열려진 자유의 왕국을 구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있음과 없음의 실체성을 동시에 부정함으로써(雙遮), 있음을 새로운 있음 앞에 자신을 내어 주는 창조적인 있음으로 사려내고, 없음을 아주 없음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태로서의 있음을 싸안고 있는 없음 아닌 없음으로 살려내는 것(雙照)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와 같이 있음과 없음의 두가지 치우침을 떠날 때 세계는 더 이상 자아 밖에 물러서 있는 세계이기를 그치며 우리와 고나계지워준 무수한 ‘너’는 더 이상 나와 대립된 타인이 되기를 그칠 것입니다.
또한 나의 못가진 것을 못가진 것으로 한정하지 않음으로써 가진 자에 대한 분노와 질투, 약탈과 탐욕이 그칠 것이며, 나의 가진 것을 가진 것으로 한정하지 않음으로써 착취가 아니라 나누어줌, 억누름이 아니라 풀어줌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러한 때 우리들의 역사속에 나와 내것이 실체로서 있다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일어나는 탐욕과 투쟁(貪瞋痴)이 사라지고 보살의 끝없는 지혜(智)와 자비(慈) 세계정화의 본원(願)이 현전할 것입니다.
또한 다시 있고 없음의 한계를 뛰어넘음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스스로 창조한 이데올로기 제도 질서등에 더 이상 종속당하거나 지배당하지 않고 그것들의 무자성의 근저에서 삶의 새로운 상황에 적합한 이데올로기 제도 질서등을 주체적으로 생산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가진 것과 못가진 것, 있음과 없음이 역사의 전체성을 향해 스스로의 대립적인 실체성을 해체함으로써만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고 이용 당하지도 않으며, 억압하지도 않고 억압당하지도 않는 자유의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에 대한 부정이 결코 허무척인 비존재(非有)에로의 침 써만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이용하지몰을 의미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않고 이용 당하지도 않으며,억합하지도 않고 억압 당
오히려 존재의 실체성을 타파함으로써 열려진 자유 하지도 않는 자유의 세계가 열렬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북돋아 주고 서로가 서로를 살려내는 조화와 평화의 세계가 전개될 것이니 이러한 조화의 세계를 불교는 정토(淨土)라고 표현합니다.
즉 자아 없는 세계가 없고 세계 없는 자아가 없으므로 정토는 바로 열반의 세계관적인 표현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정토는 결코 우리들 현실의 부조화한 세계 밖에 따로 떨어져 있는 머나먼 저 세상이 아닌 것입니다. 불교의 정토신앙은 지금까지 살핀 바와 같이 연기적인 해탈관의 입장에서 고찰되어야 하는 것이지 초월자의 실재와 메시아의 도래를 전제로 한 기독교의 ‘신국설’이나 ‘천년왕국설’에 대비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무량수경에 나타난 법장(法藏) 비구의 48대원에도 자신의 참된 자아를 완성하려는 원(攝法身願)이 다른 인간과의 소외를 극복하려는 원(攝衆生願)과 인간과 세계의 조화를 달성하려는 원(攝淨土願)과 함께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중생의 잘못된 삶의 에너지(貪瞋痴)가 외화(外化)되어 이루어진 세계가 중생들의 오염된 역사의 장으로서의 삼계(三界)라면 우리들이 결단한 지혜와자비, 대립없는 삶의 의지(悲智願)가 이루어낸 자유로운 역사의 장이 정토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구제와 세계정화의 본원으로 자신을 완성하려 했던 실천적인 행위의 주체자로서 법장(法藏:因)이, 모든 대립과 소외에서 해방된 완성자로서의 아미타불(佛:果)과 둘이 아닌 것이라면, 이미 이루어진 저 나라와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우리들의 세계도 둘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 자신의 열려진 가능태(本覚)와 소외된 현실태(不覚)도 둘이 없을 것이며, 무한과 영원속에 자재한 자유의 영역(空)과 역사와 사회로서 주어지는 필연의 영역(緣起)도 둘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엄경은 우리들의 모순에 가득찬 현실세간의 부조화가 본래 실체 없음을 바로 깨치어 현실을 정토로 개조하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가 둘이 없음을 사무쳐 보는 지혜로 자신과 세계를 새롭게 변혁해 가는 보살의 실천을 다음같이 설하고 있읍니다.

遠離三界而莊嚴 滅除惑火而起燄
知法無二勤作業 了利皆空樂嚴土
보살은 중생속에 살고 있지만
삼계의 중생세간 미혹 벗어나
세계를 이름답게 꾸며 가꾸네
번뇌 불꽃 다한 곳에 지혜 일으켜
온갖 존재 둘이 없음 바로 살피어
부지런히 보살도를 닦고 또 닦네
그리하여 세계 본래 공함 깨달아
이 세계를 다시 정토로 장엄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