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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성보 팔만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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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논단 - 서수생 1985년 07월 41호
(5) 부장경(副藏經:補遺藏經)
이 부장경은 대장목록(大藏目錄)에 들어 있지 않은 장경으로 이른바 국간장경(國刊藏經)인 정장경(正藏經)에 대해서 부장경(副藏經)이라 한다. 이 정장경은 고종(高宗) 23년(內申 A.Dl236)에 국력을 기울여 착수하여 동 35년(戊申 A.D 1248)까지 13년간 걸려 회향(廻向)하고, 동35년에 대장목록(大藏目錄)을 완성함으로서 일단락 지었다. 이듬 해 동36년(己酉)엔 1년간 쉬고, 동37년(庚戌 A.D.1250), 통38년(幸亥 A.D.1251)에 양년간에 걸쳐 정장경에 넣었던 1부 경전을 빼내어 새로 몇 가지를 더 입장(入藏)시켜 보유장경(부장경)을 만들어 정장경 맨끝에 봉안하였다. 이것은 당대의 권신 최이(崔怡)가 사재를 희사(喜捨)하여 보유장경을 만들게 했다. 이 보유장경중에 종경록(宗鏡錄)만이 남해(南海) 분사도감(分司都監)에서 이룩되었다. 보유장경을 총괄 표시하면 ‘T’ 1525 종경록〈千字函別祿(640)〉 T 1541 보유목록(補遺目錄)〈千字函別務(663)〉까지가 이에 속한다.
①보유목록판(補遺目錄板)엔 을축판(Z丑板)과 정축판(丁丑板)이 있는데, 전자는 조선말 고종(高宗) 2년(A.D.1865)에 2질을 인경(印經)한 뒤에(後人)의 인출(印出)에 편의를 주기 위해 신조(新離)한 것이고, 장웅(壯雄)이 기록하고 비구(比丘) 희일(希一)이 글씨를 썼다. 후자는 A.D.1937년에 2질을 인경한 뒤에 신조하였는데, 경성대학 교수인 고교형(高橋亨)이 전자인 을축판을 못찾아서 을축판대로 복원 신조하였다. (사간장경판전에 을축판이 봉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몰랐던 것이다. 필자가 이를 찾아보유장경 맨끝에 봉안하였다)
②보유목록판에 기록된 “증도가숙실(證道歌肅實)”은 “증도가사실(證道歌事實)”의 잘못이다. 후인의 정성이 부족하였다고 본다. ③보유목록판에 “15부·231권”이라 기록하였으나, “17종·238권”으로 바로 잡는다. ④대장경판전 면함(綿函:新架46)을 조사해 보면, 분명히 대장일람(大藏一覽) 〈10권 124판 479장〉이 봉안되어 있고, 그 다음 같은 면함(綿函)에 대장일람집목록〈1권 15판 56장〉이 봉안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보유목록엔 이것을 누락시켰다. 필자는 이것을 한데 뭉치지 않고 분종(分種)하여 처리하였다. ⑤보유목록판에 표시된 첩장(牒張)을 총계해 보니 “5,437장(2동71축 3장)”이었으나, 필자가 경판을 재확인 해보니 “906장”이 더 많은 “6,343장(3동 17축 3장)”이 옳음을 주장한다. ⑥천자함별(千字函別) 「祿·侈·富·車·驚·肥·輕·策·功·茂」함이 대장경속에 이중(二重)되어 었다. 정장인 “신집장음의수함록19권(新集藏音義隨函錄 卷十九 祿函)에서 사집화엄경(四十華嚴經 卷21~卷3O茂函)까지에 이미 상기 천자순이 나와 있었다. 그런데, 종경록(宗鏡錄)에 중출되는 상기 천자함별을 천자순대로 바로 잡으면 “祿·侈·富·車·驚·肥·輕·策·功·茂”을 “庭·曠·遠·綿·邈·岩·巖·岫·冥·治로 고쳐야 옳다. ⑦보유목록에 나오는 천자함별「庭~務」 (14函)은 정장(正藏)처럼 경판안에 새겨져 있지 않았던 것을 고종 2년(A.D.1865)에 보유목록을 신조할 때, 그 목록판에만 새겨 넣었던 것이다. 철자순대로 배열하면, 「庭~務函」을 「本~黍函」으로 바꾸어야 옳다. ⑧보유목록판엔 괘션·판심이 있고, 화문어미가 있는 것이 특색이다. 정장엔 괘선·판심이 없으나, 판심이 있고, 흑구어미(黑口魚尾)가 있는 것은 “대장목록”과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뿐이다. ⑨보유장경 17종을 서체상으로 보면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弼陀通場懺法)만이 촉체(獨#)요 보유목록은 솔체촉정(率體獨情)의 필치로 되어 있으며, 나머지 15종의 서체는 솔경체(歐陽詢體)를 받은 대장경체였다. ⑩특히 균여전(均如傳)은 보유장경 중의 화엄교분기원통초 맨 끝에 10권 깨〈19~28장〉에 해당하니 〈총 5판10장〉이다. 그개판 정사연대는 고종 38년(A.D.1251)이요, 균여가 입적한지 백 여년만에 혁연정(赫連挺)이 엮은 것이며, 문체는 사륙변려체(四六駢仙休)였다. 특히 여기엔 사뇌가인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11수와 역게(譯偈) 11수가 실려 있어 국문학 연구에도 귀중한 보전이다. ⑪종경록(宗鏡錄) 〈100권 ·835판〉만은 남해분사대장도감(南海分司大藏都監)에서 병오(丙午 高宗 33年) ·정미(丁未 高宗34年) ·무신(戊申 高宗 35年)의 3년만에 각성(刻成) 되었다. 남해분사대장도감

(6)팔만대장경의 해인사 전수(轉輪) 이안(移安)
대장경의 해인사 이안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많다.
①해인사 고문헌에 나타난 경판설 :사전(史跡券一)
·제발문(諸發文卷一) ·해인사사적비문등인데, 경판과 관계있는 것은 해인사유진팔만대장경개간인유(海印寺留鎭八萬大藏經開刊因由)이다. 그 속에 신라 이거인(李居仁)이 이당(李唐) 대중(大中) 임술년(大中壬戌이 아니라, 會昌二年 壬戌일듯)에 삼목구(三目狗)를 사랑스럽게 기르던 공덕으로 명부(莫府)에서 다시 나왔다. 때에 신라의 공주가 난치병을 앓고 있기에 왕이 이거인을 잘 대접하고, 사재를 보시하곤 나라안의 양공(良工)을 불러 제주도에 가서 재목을 내어 판을 만들고 장경을 새기게 한 뒤 해인사에 모시고 열 두번이나 경찬회(慶讚會)를 베풀었다고 하고는 끝에 “대장경발을 실었다”고 기록하였으니 그 때 어떤 대장경이 이룩되었는 듯하나, 너무 홍황해서 믿기 어렵고, 현존 해인사 소장의 고려판 재조 대장경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또 현재 해인사 홍제암 앞에 서 있는 해인사사적비(영조45년 A.D.1769 己丑)에 “고려 문종(文宗) 때, 대장경판을 봉안하고, 세조 무인(戊寅 A.D.1458)에 판전을 중수하곤 또 그 경을 인출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아마 초조장경(顯宗板) 일부가 이 곳에 봉안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현존 재조장경과는 관계없는 기록이며, 초조장(初雕藏經)의 조조연대를 유추해서 잘못 기록했으리라. 신라의 이거인(李居仁) 개판 연기설도 신빙할 것이 못되며, 사적비에 문종(文宗) 때 해인사 이안설은 잘못된 기록이다.
②고려말설 : 일본인 고교형(高橋享)은 재조장경이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이안된 연대(移安年代)를 “고려 숙종(肅宗) 5년(A.D.1318)에서 우왕(禑王) 7년(A.D 1381)까지 63년간이라 주장하였다. 그가 주장한 유일한 근거는 도은집(陶隱集)에 보이는 수암장로(睡庵長老)의 “인장경우해인사(印藏經于海印寺)”란 제목만으로 현존 혜인사 재조장경을 인출했다고 볼 수는 없다. “장경”이란 말은 경·율·론 삼장을 가리키기도 하고, 또 일부 경전도 가리킨다. 그리고, 해인사엔 재조장경(팔만대장경)보다 연대가 오래된 삼본화엄경(三本華嚴經)과 금강경 등 많은 고려판 경전이 봉안되어 었으므로 반드시 이 팔만대장경(재조장경)을 가리킨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태조실록(太祖實錄) 7년 5월 병진(丙辰) 기록에 대해선 한마디언급이 없으니 더욱 믿을 수 없다.
③그래서 필자는 조선건국초에 해인사에 이안되었다고 주장한다. 정확히 말하면 태조 6년(A.D.1397)에 강화 선원사(禪源寺)에서 이안하기 시작하여 동 7년(A.D.1398)에 서울의 지천사(支天寺)에 옮겼다가 해인사로 옮겨 온 것으로 아무리 늦잡아도 정종(定宗) 원년(A.D.1399) 정월 이전일 것이다. 보유장경 속에 화엄교분기원통초(華嚴敎分記圓通鈔) 권10 10장의 판곽밖에 음각문이 있는데 “정축년에 경판을 출육했을 때, 이것을 잃어버렸으므로, 지식도원과 함께 동원하여 경판을 새겨 넣었다. (丁丑年 出陸時 此開失 與知識道元同願 開板入上)”라고 하였다. 여기 정축년은 태조 7년(A.D.1397)이니 강화에서 해인사로 출육하기 시작한 연대라 볼 수 있고 태조실록 7년(A.D.1398) 5월 10일조에 “용산강(龍山江)에 납시어 강화 선원사에서 대장경판을 배로 옮겨다 대장 등 2천인을 시켜 지천사(支天寺)에 수송했다”란 기록이 있을 뿐아니라, 정종실록 원년(A.D.1399) 정월 9일조에 “경상겸사에게 명하여 해인사에서 장경을 인출(印出)하는 승도(僧徒)들에게 공양을 제공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아 조선 건국초 태조 7~8년 경이라 생각한다.

(7)대장경(再雕藏經)의 서체

대장경판에 나타난 서체는 초당(初唐)의 3대 서도가의 한 사람인 솔경체(率更體:歐陽詢體)를 본받아 주류를 이룩한 이른바 대장경체였다. 현재 해인사에 봉안중인 재조장경판(海印寺板) 보다 그 이전에 조성된 초조장경판(初雕藏經板:顯宗板)도 역시 솔경체였다. 그리고, 해인사 사간판전(寺刊板殿)에 봉안중인 수창본(壽昌本) (三本華嚴經板 壽昌 4年 A.D.1098)과 송광사(松廣寺)에 봉안중인 수창본 대반열반경소(大般涅槃經疏) (壽昌 5年 A.D.1099) 등이 모두 솔경체였고, 재조장경인 해인사판(高宗板)의 서체는 정려(精麗)하고 근엄(謹嚴) 깔끔하긴 하나, 수창판본에 비해 약간 소졸(疏拙)한 느낌이 난다. 최근 불국사 석가탑(釋迦搭)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의 인본이 세계 최고의 현존 인본으로 추상되고 있는데, 그 필치가 당대(唐代) 사경체(寫經體)와 비슷하여 구체안정(歐體顔情)의 서풍이라 할 수 있다. 신라의 서풍은 대체로 진체(晋體)·육조체(六朝體)·솔경체(率更體)·노공체(魯工體)가 유행되었으나, 고려조에 이르러서는 솔경체가 그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여말에 이르러 동방시계정종(東方詩界正宗) 이익재(李益齋)때 와서 진체를 익혀 대성한 촉체(蜀體)가 들어왔으나, 역시 솔경풍이 간본화(刊本化)되어 천하를 풍미하였다. 그런데, 현존 재조장경(海印寺板)인 이른바 팔만대장경판중엔 정장경(正藏經:正藏)과 부장경(副藏經:補遺藏經)이 있다. 정장경은 모두 솔경체로 이른바 대장경체를 이루고 있으나, 부장경(補遺藏經) 17종의 서체를 살펴보면, 솔경체·송설체(松雪體)와 솔체촉정(率體與情) 등으로 3대분 된다. 보유장경 대부분이 솔경체였으나,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과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은 조선 초기에 중간된 경판인데, 전자는 유려한 송설체(松雪體)이며, 후자는역시 정장경과 같은 솔경체였다. 부장경에 들어 있는 보유목록판은 솔경체가 아니며, 솔체촉정(率體蜀情)의 느낌이 난다. 국말 고종(高宗) 을축(乙丑) (A.D.1865)에 조조(雕造)되었으며 비구(比丘) 희일(希一)이 썼는데, 고려 당시의 대장경체에 비하면, 족탈불급맴(足脫不及)이라 하겠다. 이른바 팔만대장경체의 서풍을 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이것은 사람의 글씨가 아니라, 신선이 쓴 글씨라”고 극찬하였으니 뛰어난 명필(名筆)이다.

(8)재조장경판의 규모·교감
대장을 만들 때 본사 대장도감을 강화에 두고 분사를 남해에 두어 “자작나무”를 거제도 동에서 찍어서 판을 만들고 경문을 붓글씨로 써서 새기고, 두 끝에 마구리를 붙치고 옻칠(재리옻)을 하여 네 귀에 동판으로 장식하였다. 장마다 총길이 7Ocm, 총넓이 23cm 각자부길이 51cm 각자부넓이 22cm, 두께 3cm로 한장의 중량은 양 1관이며, 위아래 계선을 그었고, 1변에 23행, 1행에 14자(한 자 방 5푼)씩 양변에 새겼고, 판의 한 끝에 경명·권차·장수와 천자문 차례로 함호를 새기고, 두 끝의 각목에도 같은 표시를 새겼다. 현존 제조장경 중엔 수기(守其)가 엮은 신조 대장교정별록(新雕大藏校正別錄) 30권이 있는데, 국본(國本)〈초조대장경 현종판〉·송본(宋本:北宋開寶勅板)·란본(丹本) (契丹藏經板) 등을 서로 대교 교감을 철저히 하였기에 세계 30여 한역장경 중에 가장 정확한 성보였다. 그리고, 팔만대장경 중에 우리의 고승들이 엮은 경판도 입장되어 었다. 「신조대장교정별록(30권 엮음) ·대장목록(3권 元曉 엮음?) ·금강삼매경론(3권 元曉 엮음) ·선문염송집(30권 慧諶 지음) ·지귀장원통초(2권 均如 엮음) ·십구장원통초(2권 同上) ·삼보장원통초(2권 同上) ·화엄교분기원통초(10권 同上) ·보유목록(1권 壯雄 엮음)」 동 9종이다. 민족의 성보요, 세계적 성보인 팔만대장경에 대하여 대강 몇 대문에 나누어 설명했으나, 지면관계로 완전히 밝히지 못함을 유감스럽게 여긴다.

3. 맺는 말
국보 32호인 팔만대장경은 모두 81,332판이다. 이 가운데, 정장경이 78,500판이요 부장경 (보유장경)이 2,740판이며, 2중 판이 92판임을 확인해 둔다.

글자마다 판판마다 오직 마음뿔(字字惟心板板精)
무아로써 이룩했네 여민 그 정기(刻成無我麗民情)
천년 풍상 겪어도 무사한 말이(千年凌露卧雲在)
타투어 기리누나 세존 저 슬기(爭說沙門大佛明)


천하부비(天下無比)의 세계적 성보(聖寶) 팔만대장경! 그 옛날 몽고병이 이 강산을 침범하였을 때, 부처님의 법력을 빌어 몽고병을 퇴치함으로써 이 땅을 불국토를 만들기 위해 이 대불사를 완성하였다. 참으로 거룩한 그 존재, 어떤 무아적(無我的) 신앙적 민족단결력이 아니고는 이롤 수 없는 창세기적 각판 예술의 정화임을 새삼 느낀다. 우리 5천만 동포가 한덩어리로 뭉쳐 그 옛날 대장경을 조조할 때처럼 믿음·지성·단결·무아(無我) 통일(統一)로 정진한다면, 새 문화창조의 무슨 대업인들 성공못하랴. 그렇다. 배달민족의 호국·호법정신이야말로 이 대장불사에 엉겨 더욱 빛났다. 여기 팔만대장경은 만고불역(萬古不易) 저 우두(牛題)와 더불어 천수에 길이길이 빛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