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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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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시명 1985년 07월 41호
7월의 햇살은 숯불처럼 이글거리고 마녀(魔女)의 주술처럼 우리들의 이성(理性)을 마비 시킨다.
실존주의 작가 까뮤의 소설 이방인(異放人)에 주인공 뫼르소우는 여름날의 뜨거운 햇살 때문에 결국 살인하는 장면이 나온다.
연일(連日) 30도를 윗도는 날씨가 계속되는 날이면 아파트촌에서는 싸움이 잦아지고 어디든지 손바닥만한 그늘이라도 있으면 숨어 버리고 싶은 한여름. 불쾌지수는 우리를 압도한다.
인도인(印度人)들이 왜 극락세계를 해가 지는 서쪽에 있다고 생각했는지 7월의 햇살을 보면서 저절로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종교는 이러한 극한(極限)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를 일찌기 제시하였고 보다 현명하고 슬기롭게, 주어진 극한 앞에서 더 높고 숭고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이글거리는 인도의 하늘을 이고 카스트 제도의 굴레가 인간의 숨통을 조이고 있을 때 부처님은 모든 인간은 불성(佛性) 앞에서 평등하다고 가르쳤으며 한량없는 자비와 지혜로서 무지(無知)와 무명(無明)을 벗어나 영원한 해탈과 열반으로 극한을 헤쳐가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대제국(大帝國) 로마에게 정치적으로 핍박받던 민중과 절대적인 권위로 인간의 사유(思推)를 을법이란 미명 아래 질식 시키던 때에 예수는 을법으로 심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임을 가르치시고 로마에 힘과 권력으로써가 아니라 사랑과 기도로써 인간의 극한을 뛰어 넘으셨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적 종교상황은 과연 어떠한가 종교적인 아집과 독선과 권위는 이제 저 카스트 제도나 을법을 방불케 하고 어리석은 민중을 잘못 가르쳐서 자비와 사랑의 사도가 되게 합이 아니라 종교적 편견에 눈멀게 하여 이방 종교에 대한 까닭없는 비방과 시비를 서로 일삼고 있다. 그리고 종교적 사명이 민중을 올바르게 일깨워 이땅을 참되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참된 사회의 목탁과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고 있다.
종교는 사회적이고 조직적이기 전에 자기성찰(省察)의 심화(深化)요 각인(各人)의 영혼에 불당김 질일진대 개인적 수양과 수덕(修德)이 그 바탕이 되어야함은 물론 수양과 수덕의 빛을 이웃과 함께 나눌 일이다.
교단이란 무리를 짓고 파당을 지어 물리적이며 파괴적인 거대한 조직이 되어야 함이 아니고 각인의 수덕과 수양의 빛을 나누기 위한 모임이요, 빛과 소금과 목탁됨을 함께 하기 위한 다짐의 모임이어야 한다.
그러나 요즘 종교들은 오히려 조직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민중에게 불안과 불화의 요소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그런 일이 있다면 모든 종교인들은 마땅히 그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누가 기독교와 불교가 마치 철천지 원수처럼 느끼게 하도록 만들고 있는지 우매한 민중들을 그렇게 느끼도록 선동하는지 가슴에 한번 손을 얹고 생각해 볼 일이다. 이에 대한 책임은 진실로 우매하고 독선적이며 자기 교단 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소아병적(小我病的)인 성직자들의 탐욕과 어리석음 때문이다.
이제 이 시대는 마녀 사냥이나 하던 시대가 아니라 서로의 종교를 막무가내로 비방만 하고 자기 껍질 속에 들어 앉아서 견고한 막을 치는 우물안 개구리 식의 시대는 이미 될 수가 없다. 오히려 아놀드 토인비의 말처럼 20세기의 위대한 발견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발흥과 만남이 아니라 서양 사상과 문화를 대표하는 기독교 사상과 문화가 동양사상과 문화를 대표하는 불교적 사상과 문화가 어떻게 만나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것도 그저 그런 일상의 만남이 아니라 서로가 대화를 통하여 새로운 문화를 재창조하며 인류에게 새롭고 위대한 정신적 금자탑을 세움에 있다고 말하였다.
동서양은 그 동안 인위적 사회적 문화적 제 요소가 달랐으므로 그 사유 방법도 다르고 사물을 보는 관점의 차이도 당연히 있을 수 밖에 없었을 젓이다. 그러한 차이를 이제는 대화를 통하여 좁혀야 할 것이며 서로의 다른 점은 다른 대로 일치한 점은 일치한 대로 서로가 만나 인정하면서 각 종교들이 공동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할 것이다.
세계는 지금 절반 정도의 인구가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삶을 살아가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이고 그 밖의 사회적인 면에서 난무하고 있는 각종 부조리의 문제나 구조적 모순에서 나온 여러 병리 현상과 이 시대가 앓고 있는 공해문제와, 산업사회에서의 인간의 소외 문제 물질 만능과 향락주의 쪽으로 계속 나락(奈落)하고 있는 이 시대적 고뇌의 문제를 종교인들 끼리 대화하고 협력해서 공동으로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큰 당면의 문제를 제외해 두고 종교간의 분쟁이나 일삼는다면 세인들의 지탄을 받아 마땅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최근 국조(國祖)이신 단군을 모신 사당이 너무 초라하여 그 성전을 새로이 개축 단장하는데 대한 반대가 일부 기독교 신자들에 의해 기독교 교리에 위배된다는 등, 으례히 들고 나오던 우상숭배의 건을 내세우면서 반대를 자행하고 있음이 각종 매스컴에서 보도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일본도 아니고 이스라엘도 아닌 이 나라에서 이런 보도를 접할 때 마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관과 종교관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불쾌감 마저 갖게 한다.
천지창조설에 의한 성경의 말씀은 자연과학 교과서를 수정해서라도 믿을려고 하면서 우리민족 고유의 전통사상을 부정하고 반대하고 나서는 그들의 의식은, 극히 피상적이고 유치한 우상 숭배에 대한 종교적 계명이 민족적 자각보다도 더 중요한 일인지, 그러면서 민족의 복음화를 외치는 행위는 민족을 바로 말살하자는 말과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서구 사상에 의해 말살되어 가는 민족사상에 대한 복귀(復歸)-이런 일들은 민족 복음화를 부르짓는 한국기독교가 주도해야 할 일이 아닌가. 언제 까지나 뾰족탑만 세우고 서양 사람의 흉내만 내고 있을 것이라면 기독교의 한국화 내지 민족화 하고는 아주 전도(顚倒)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민족 복음화란 말을 우리가 이해하기로는 한국의 기독교가 이제까지 서양의 문물에 경도되어 있던 것을 다시 그 서양적인 탈을 벗고 우리 한국 풍토와 역사관에 새롭게 참여하려는 의지로 받아들였는데 그 생각하고는 전혀 다른 그들의 이번 행위를 볼 때 아직도 그들이 전 근대적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음에 애석하다 못해 측은하기까지 하다.
우리가 아무리 서구 지향적이라 하더라도 한국의 전통과 뿌리를 뽑아서 그 민족적 신념마저 팔아 넘기려고 하는 종교가 있다면 우련 결코 좌시(坐規)해서도 안될 것이며 그런 엉뚱한 발상을 용서해서도 안될 것이다.
민족과 역사란 하루아침에 이룩되는 것이 아니기에 어떤 일개의 사상이나 주의나 종교적 신념에 따라 바꿀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민족과 역사를 날조하는 행위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예로 삼국이 통일되고 난 뒤 백제사가 없어졌으며 유교가 지배한 이조시대에 불교사가 말살되었으며 지금도 북한에서는 민족과 역사를 그들 나름대로 그들의 사상과 주의로 날조하고 있지 않는가. 영광된 역사는 영광된 역사대로 부끄러운 역사는 부끄러운 역사대로 새로 바꿀 수 없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것이 세상이고, 사상도 역사도 변천해 갈 것이다.
그러나 진실과 진리 쪽으로 그것이 변해가야 할 것이며 민족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서 발전되어 가야 할 것이다
이제 각기 백 년 이백 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기독교는 한국의 근대사와 함께 현대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종교로 성장했다. 성장이란 말이 주는 의미를 우리는 자꾸만 양적으로만 이해하는 데 양적인 변에서 뿐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그러해야 하리라.
이제 교회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명진흥 목사식의) 전근대적인 전도방법은 지양하고 보다 성숙하고 의연한 기독교도의 자세를 기대한다.
어느 교단이든 교조가 살아 있던 원시교단의 숭고한 이상과 소박한 생활이 자꾸 죽어가는 이 시대에 성직자가 해야 활 일들이 무엇인지 뜨겁게 쏟아지는 7월의 햇살을 보면서 다시금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