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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덜도 말고 한암스님만큼만 중노릇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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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박원자 2000년 01월 215호
범룡/동화사 비로암 조실

내 나이 열두세 살,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날 이었을 것이다. 탁발승 한 분이 대문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있는 것을 사랑방에 있던 아버지가 ‘밥이나 자시고 가라’며 집안으로 맞아들였다. 점심 한상을 잘 대접하고도 그 스님은 우리 집을 나서지 않은 채 저녁을 넘기었으니 아버지는 밤이 깊도록 객승과 얘기를 나누었다. 예수를 믿었다고는 하나 박학한 한학자였던 아버지는 대화의 내용이 무궁무진했고 어느 분야에라도 막힘이 없었다. 밤 늦도록 사랑방에 앉아 두 분의 대화에 취해 있던 내게 그 날 밤 얘기 한 토막이 마음에 와 박히었으니, 그것은 ‘인생사난득人生四難得’이라는 대목이었다.
“스님께선 ‘인생사난득’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대화를 나누던 객이 아무런 답이 없자 아버지께서 설명한 ‘인생에서 얻기 어려운 네 가지’는 이랬다.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사람으로 태어나도 장부되기 어려우며, 장부가 되어도 출가하기 어렵고, 출가해도 외도를 만나지 않고 불법 만나기 어렵다”는 그 말씀은 어린 소년의 가슴에 오랜 여운으로 남았다. ‘불법’이란 게 무엇이길래 장부보다도, 출자보다도 더 만나기 어렵다는 것일까. 아마도 그 날 밤 사랑방 아버지 곁에서 들은 그 말씀 끝에 얻은 ‘의문’이 내 출가에의 종자가 되었을 것이다.
스무살이 되던 해 집을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저 ‘인생사난득’속의 출가는 아니었다. ‘세계일주’를 해 볼 생각이었다. 일제치하였으나 먹고 살 걱정이 없을 만큼 집안 살림이 넉넉했던 덕분에 서당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고 유복하게 지냈던 소년 시절, 「조선」이라는 잡지와 ‘동아일보’를 보며 나라 밖의 소식을 접하면서 내가 살던 평안남도 오지의 맹산을 벗어나 더 큰 세계를 체험하고 싶은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출가할 인연이어서 그랬는지 여행을 앞두고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세계 일주에 앞서 그 산수가 수려하다는 금강산을 먼저 봐야 되는 것이 아닐까. 세계일주를 하다가 그 곳 사람들이 그 유명한 금강산이 어떠냐구 물으며 무어라 대답하나.’
집을 나와 금강산 유점사에서 본 스님들의 모습은 다름 아닌 ‘신선’의 모습이었다. 세속의 세계가 전부인 줄 알고 있던 내게 신선의 모습을 품고 있는 스님들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세상엔 이런 세계도 있었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그분들의 사는 모습이 한눈에 마음에 들어 세계로 나아가려던 내 발길이 망설임 없이 그곳에 머물렀던 걸 보면 불연이 깊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아마도 어린 소년시절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인생사난득’ 속의 ‘불법’이라는 별빛 하나가 가슴 속에서 비로소 빛을 발하고 있었을 것이다.
유점사에서의 생활은 ‘마실집’에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좋은 것이었다. 그 당시 유점사엔 참선을 하는 선방과 경을 공부하는 강당, 또 염불당이 있었는데 저마다의 처소에서 조용히 수행에 정진하는 스님들의 모습은 불법으로 향한 내 마음을 설레게 했으니, 혹독하리만큼 추운 금강산의 겨울에 냉수 한 통 떠가지고 몸에 끼얹으며 목욕을 해도 거뜬했다. 출가할 결심을 하고 절집에 있으면서 고향의 아버지께 ‘출가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운을 떼어 편지를 보냈더니, ‘나는 허락 못 하겠노라’는 답이 왔다. 당신의 반대에도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자 한 달뜸 지나 다시 편지 한 통이 왔는데, ‘인생이 일장춘몽이 아니더냐, 너 좋을 대로 해라’는 내용이었다. 지금 돌아보아도 내 아버지는 세상을 향한 통찰이 깊은 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는 처음 절에 들어와 한 삼 년을 행자로 있으면서 중이 될 만하다 싶으면 게를 받게 하는 것이 절집안의 법도였다.
또한 행자 생활이 시작되면 채공이며 공양주를 시키는 것이 관례였는데, 어쩐 일인지 나는 그런 것을 하지 않고 곧바로 공부를 하게 되었다. 내 은사 스님은 만허滿虛 스님이었다. 젊은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해도 권위를 내세우는 법 없이 반박하지 않고 다 받아 주셨던 심성이 매우 좋은 분이었다. 각별히 나를 아끼고 공부시키려 했던 스님께서 하루는 강사 스님 한 분을 불러 ‘이 아이 강원 보내 좀 가르쳐라’ 하셨는데, 강사 스님은 열다섯 어린 스님이었다. 절집에서야 나이와 관계없이 하루라도 먼저 절에 들어온 사람이 선배이니 깍듯이 모셔야 하는 버, 그래서 나는 나보다 나이가 몇 살이나 밑인 어린 스승에게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초심, 발심, 자경의 세 권으로 되어 있는 ‘초발심자경문’을 앉은 자리에서 한 시간만에 배우고 ‘치문’을 읽어 보겠다고 하니, 강사스님께선 그럴 것 없이 ‘서장’을 읽으라고 했다.
목판본으로 되어 있던 ‘서장’을 붓글씨로 한 쪽씩 써서 외우면서 서서히 불법에 눈을 뜰 무렵, 서장을 채 다 읽지 못한 채 유점사를 떠나게 되었다. 그 당시 오대산 상원사엔 참선과 경을 가르치는 수련소가 있었는데, 그 곳을 마치면 ‘승려수련서’라는 걸 주었다. 한 본산에서 열 사람을 추려 그 곳으로 보냈는데 은사 스님이 권해 나도 떠나게 되었다. 한 해 남짓한 유점사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상원사로 떠나던 날, 내 은사 스님께선 절문 밖까지 따라 나오면서 하던 말씀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얘야, 더도 덜도 말고 중노릇, 그 곳의 한암스님만큼만 해라”
간곡한 은사스님의 말씀이 그릇이 작은 제자에게는 너무나 큰 주문이었다는 것을 상원사에서 한암스님을 처음 뵙는 날부터 그 뒤로 스님을 모시고 살 때도, 그리고 오늘 날까지 느끼고 있으니 한암스님이라는 거봉을 어린 제자가 넘을 수 있으리라고 내 은사 스님도 생각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한암스님은 경학에 밝고 오랜 동안 참선하여 선지가 깊었으며, 계행이 청정한 분이셨다. 곁에서 보기만 해도 찬바람이 살살 나고 명필에다가 못하는 것이 없었던 도인을 곁에서 모시는 복을 누렸으니 그 때나 지금이나 스승에 한참 못 미치는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다.
스무살에 출가해 올해 내 나이 여든여섯, 아직도 쉰머리가 안 나오는 걸 보면 몸은 건강하나 아무래도 너무 오래 산 것 같다. 이곳 내가 묵고 있는 비로암에 토요일이면 세속의 바쁜 일 다 떨쳐 버리고 여나믄 되는 이들이 모여 밤을 밝혀 참선하고 있는 걸 보면 마음이 흐뭇하다. 저 달마스님이 제자 혜가에게 설파한 것처럼 ‘참선이란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 아닌가. 많은 사람이 참선으로 마음을 편하게 갖고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참선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걸 보면 말세 중생은 참선할 최상 근기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순전히 자기 힘으로 해야 하는 참선보다는 내 힘이 반이요, 가피의 힘이 반인 ‘주력’을 권하기도 한다. 염불이나 참선이나 간경이나 주력이 다 부처님 법이거늘, 무엇이라도 하나 지극한 마음으로 수행하여 삼매에 들면 될 터인데, 웬일인지 ‘주력’을 권하면 대체적으로 싫어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저마다 제 근기를 바로 알고 부처님 법을 확실히 공부해 마음을 편히했으면 좋겠다.

정리/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