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천년, 지구의 지속 가능성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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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최열
2000년 01월 215호
20세기가 ‘민중의 세기’ 로 명명된 것은 민주주의 제도의 일반화와 참정권의 확대로 해석할 수 있다. 정치적 차원에서 보편성 권리를 획득한 사람들이 특권층이 아닌 일반시민들이었다는 점에서 근대 이후 사회조직의 원리로 되어온 국민의 동의가 국가를 움직이는 대원칙이라는 사실의 확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우리는 어떻게 불러야 할까? 이름 부여하는 행위는 평가인 동시에 한정하는 행위이다. 본질과 행태를 평가하고 그 표정에 주목하여 이름을 부여하면 이름을 부여 받은 대상은 바로 그 이름에 묶인다. 귀속되어 제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기의 명명은 그 세기의 끝에서야 비로소 객관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온 20세기와 21세기가 완전히 다른 시간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의 연속성과 비가역성은 과거의 업이 미래로 이어져 윤회한다는 불교적 사유와도 통한다. 우리 인류는 지난 세기 동안 어떤 업을 쌓았고 그 때문에 미래에 어떠한 상황과 마주하게 될 것인가.
이에 관한 가장 확실한 예측은 바로 21세기를 무엇으로 명명할 것인가에 관한 답과 직접적으로 연동된다. 20세기는 인류가 환경을 학대한 시기였다. 이 명백한 진실이 21세기를 규정한다. 20세기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각종 지역적인 식민전쟁, 그리고 민족·종교분쟁으로 시작했고 저물었다. 또한 가파른 산업화의 외길로 1세계가 달려나가고 3세계가 뒤를 따라 뛰었다. 그 결과 자연환경은 일방적인 파괴와 오염으로 치닫게 됐다 .
지난 백 년 동안에 상승한 지구 온도가 지난 천 년 동안 상승한 지구온도를 넘어서고 지난 십 년 동안 상승한 지구 온도는 지난 백 년 동안의 지구 온도 상승 폭을 넘어섰다. 지구는 뜨거워지고 남북극의 빙하는 일 년에도 수십 미터씩 녹아 내려 대륙의 크기가 줄어들고 있다. 이 때문에 해수면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고 세계 각지에서는 지구온난화에 따른 이상 난동으로 지역을 가리지 않고 치명적인 돌림병이 만연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파괴로 인한 위기의 징후는 21세기에는 완전히 가시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인류가 이산화탄소 둥 온난화 가스의 방출량을 극적인 수준으로 감축하지 않는다면 2030년경이면 남태평양상의 도서국가들을 필두로 지금은 빙하이지만 바닷물로 녹아버린 해수 속에 수장되기 시작될 것이다.
한편 에너지 문제는 지구 온난화와 연계된 또 다른 심각한 문제다. 특히 핵 발전의 위험성은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원자폭탄의 일란성 쌍생아인 핵 발전은 이를 개발한 미국을 위시한 서구열강들이 이미 포기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한국을 비롯한3세계 후발개도국에서는 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들은 체르노빌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거나 애써 ‘핵발전의 위험성’ 에 대해 눈감고 있다. 위험은 가중되고 있지만 3세계 지도층은 거대한 리베이트에 현혹되어 국가와 국민을 방사능 오염의 터널 속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리고도 여전히 반성은 커녕 전 시기의 국가 개발논리에 매몰되어 헤어나지 못한다.
하루에도 3백 종 이상의 생명이 멸종되고 있다. 특히 아마존을 비롯한 종다양성의 보고인 열대 우림지역의 조직적인 파괴가 종의 감소를 재촉하고 있다. 생태계는 수많은 종들의 견고한 얼개로 유지되고 있다. 연결이 끊어진 생태적 고리들은 다른 종의 멸종을 부르고 이러한 멸종의 연쇄는 또한 자연환경과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결국 그 피해는 지구 전체로 확산된다. 인류는 이러한 생태계 파괴의 최초 가해자이면서 또한 궁극적인 피해자가 될 것이다.
이러한 환경파괴의 연속과 심화가 20세기였다. 그렇다면 21세기 우리에게 지속 가능한 삶은 가능한가. 이미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린 건 아닐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그 다리를 건너고 있는 중이다. 때문에 바로 지금 우리는 돌아서야 한다. 그렇게 되돌아서는 일의 범주와 수준은 단적으로 ‘전 지구적으로 그리고 혁명적으로’ 여야만 한다
이미 환경문제는 국경을 초월해 지구적인 차원의 문제가 된 지 오래다. 해결 또한 지구적인 연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범주의 차원이 문제라면 그것은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세계적으로 2만여 개가 넘는 국제적 NGO들어 활동 중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환경분야를 비롯해 정치의 민주화, 경제정의의 실현, 인권지킴이 활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최근 WTO의 시애틀 뉴라운드 협상에서도 이들의 단결된 힘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 준바 있다. 이들의 활동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공공 이익의 확대를 위한 것으로 그 심저에 지구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탐구와 실천이 있다. 이들의 무지개연대(분야와 주제를 가르지 않는 지구적 차원의 NGO 간의 연대 활동)를 이뤄 운동한다면 지구범주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문제는 우리 개개인이다. 개인이 혁명적인 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 대중이 소비의 주체이지만소비행위 자체는 기업과 행정집단 등 거대 기구의 조작이 얼마든지 가능한 현실 때문에 중요하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이므로 사회적 변화가 선행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선택의 독자성’ 에 주목해 볼 때 결국 행위의 주체는 개인일 수밖에 없다. 소비자 대중이 반환경적인 상품과 공공서비스를 선택함으로써 반환경적인 기업활동과 행정을 수용한다면 구조적 환경파괴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선택의 기준이 ‘생태적으로, 환경적으로 건강한가’를 따지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자신의 운명을 지구의 지속가능성과 일치시키는 높은 수준의 가치관을 필요로 한다.
지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인격을 기르기 위해서는 NGO의 활동과 같은 현상적 활동과 교육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이 사회적인 차원에서 여론을 만들 수 있다면 인간의 변화 자체는 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인간의 영혼을 훈육하는 종교와 교육의 역할은 21세기에 더욱 강력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현 세기 우리 개개인의 세계관의 바탕을 이루는 낡은 가치관은 바로 물질의 확대가 행복지수를 높이는 것이라는 뿌리깊은 미신이다. 미신을 숭배했던 20세기 우리에게 남은 것은 환경의 파괴와 인성의 참담한 왜곡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뿌리로부터 변화되어야 한다. 변화의 필요성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닌 변하지 않으면 내일을 보장 받지 못하는 지구적 생존의 지속가능성이 달린 문제이다.
21세기 한국 불교가 생명에 대한 자비심을 사회적으로 연역하여 사바대중에 대한 생태적인 깨달음과 각성을 촉구하고 계도하는 역할을 하여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것이다. 개인의 내성 깊이 지구와 미래세대의 생명을 위한 친환경적 변화와 그 변화로 인한 실천궁행을 수행하도록 하는 힘의 하나는 바로 현대 생태철학이 발견한 ‘생명에 대한 외경사상’ 의 연원적 사유를 오래도록 해온 불교의 역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