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慈悲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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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윤구병
2000년 01월 215호
제가 워낙 불교 소양이 시원찮다 보니 부처님 말씀 뜻을 알아듣지 못하거나 제멋대로 곡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좋은 보기 하나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이라는 말인데, 저는 마지막 글자를 한자로 ‘높을’ 존尊이 아니라 ‘있을’ 존存자로 바꾸는 게 더 좋다고 고집을 부려 ‘온누리에 온통 나뿐이로구나, 그러니 ‘온 누리에 나 아닌 것이 없구나’로 풀어야 한다고 우긴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아직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말 풀이, 뜻풀이가 알량하기 이와 같으니, 이제부터 하려는 말도 언제 어떻게 어느 길로 잘못 접어들지 몰라 저으기 걱정스럽습니다. 그러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려도 좋겠습니다.
‘자비慈悲’ 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산스크리스트어도 팔리어도 모르는 데다가 제대로 된 불교사전 하나 책상머리에 없는지라 그냥 제가 아는 한자만으로 풀어 보렵니다. 틀리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도 없는 것으로 보아 ‘아니면 그만이지’ 하는 무책임한 정치꾼 처사와 제 심뽀가 태평하기로는 오십보백보일듯합니다.
‘자비慧悲’라는 글자를 깨뜨려 늘어보면-유식한 말로 파자破字한다 던가요?- 이 말은 玄玄心 非心이 됩니다. 현玄이라는 글자는 ‘검을 현’, ‘감을 현’으로 읽는다고 배웠습니다. 천자문 첫머리에 나오는 글자지요. ‘하늘 천天’, ‘따 지地’, ‘감을(검을) 현玄’, ‘누르 황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는 말인데, 언어학자들 말에 따르면 형용사(그림씨) 가운데는 같은 뜻을 지닌 명사(이름씨)가 바뀌어 이루어진 것이 꽤 많답니다.
따라서 이 말은 ‘하늘은 검(감, 개마, 고마, 구마, 곰, 굼)이요(히늘=검)’, ‘땅은 눌(누리, 누르)이니라 (땅=누리)’ 라는 말에서 나왔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리라 여깁니다. – 곁들여서 우리 말에서 빛깔을 나타내는 형용사들 가운데 ‘검다’, ‘누르다’, ‘희다’, ‘푸르다’, ‘붉다’ 같은 말도 모두 ‘검’(하늘), ‘누리’ (땅), ‘히’(해=태양), ‘풀’(초목), ‘붉’(불)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검’(玄)이 ‘하늘’(天)임을 증명한답시고 구시렁거리다 보니 멀어 길어졌습니다. ‘자慧’ 가 ‘하늘 마음’ 을 드러내는 글자로 보고 싶은데 그냥 ‘현심玄心’ 이라고 써도 될 것을 왜 ‘현현심玄玄心’ 이라고 써야 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하늘이 두 개라? 하늘이 두쪽이 났다? 아닌 듯싶습니다. 저 하늘과 이 하늘? 이 하늘과 저 하늘? 검디 검은 마음? 도둑놈 심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보다 제 깜냥으로는 바깥 하늘과 안 하늘이 다르지 않은 마음이라면, 바깥 하늘은 안 하늘이 짝어 되어 더 넓어지고, 안 하늘은바깥 하늘을 맞이해서 더 깊어지겠구나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렇게 보면 ‘자慧’는 ‘하늘 마음’이자 ‘마음 하늘’ 이요, 넓고도 깊은 지방 세계(우주)가 티끌 속에 갖추어져 있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는 말과도 동뜨지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게 바로 부처님 마음자리이자 기독교식으로 표현하자면 ‘하느님’ 이겠지요.
‘자慧’는 그렇다 치고 ‘비悲’ 는 ‘미 뭐꼬?’ 이 글자는 ‘슬플 비’ 로 배웠는데, 왜 ‘아닌 마음(非心)’ 이 ‘슬픔’ 이 될꼬? ‘아니야, 이거 아니야. 아니야, 저것도 아니야. 아니지, 그것도 아니지’ 이렇게 자꾸 마음으로 도리질하다 보면 마음이 찢어지니 아프고 마음 아프니, 그게 슬픔으로 드러날까? 그러고 보니 불교역사에서 ‘아니, 아니, 아니…’ 라고 진저리 쳐지도록 고개를 도리질하던 분이 문득 떠오릅니다. ‘중론中論’ 을 쓰신 ‘나가르주나Nggarjuna(龍樹)’ 가 바로 그런 분이 아니셨나요? 그분 글을 수박 겉핥기로 훑어 본적이 있는데 제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끝없는 ‘비非’자 행렬뿐입니다. 비비비비非非非非...
부처님께서 중생이 사는 모습을 살피실 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살갗으로 문질러도 이건 아니다 싶어, 혹시 내가 잘못 보아서 잘못 들어서 그러나 하고 ‘눈으로 듣고(觀世音)’, ‘귀로 보고(廳世相)’ … 감각 기관을 거꾸로 뒤집어 살피셔도 역시 이것도 아니로구나 싶어 갈기갈기 찢기는 가슴을 부둥켜 안고 엉엉 우시는 그 마음자리가 바로 ‘비悲’ 일까? 그 부처님의 마음 하늘, 하늘 마음이 찢기고 잘라져서 별 무리를 이루고, 떠도는 바람 되고, 흐르는 물이 되고, 눈비가 되어 내리는 걸까?
부처 마음과 중생 마음이 둘이 아니고, 일체 유정 무정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데, 부처님의 하늘 같은 마음이, 마음 같은 하늘이 왜 갈라졌을고? 갈라섬이 없는 세상에서는 ‘아니’라는 마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데, 부처님 마음자리에서 보면 온 누리에 나 아닌 것이 없을 텐데, 왜 온누리에 나 뿐이구나하는 외로움도 함께 느끼셨을까? 깨치지 못한 중생이 아무리 머리를 감싸고 굴려 보았댔자 미망의 먼지구름만 사방에서 자욱할 뿐이니, 입을 벌려도 틀리고, 입을 다물고 있어도 몽둥이 찜질감입니다.
이럴 때는 머리를 잘라버리는 게 상책인데, 하나 자르면 둘이 돋아나고, 둘 자르면 넷이 돋아나는 메두사 같은 괴물이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흔들고, 또 흔들어 보아도 안개만 자욱합니다. 그나마 먼지구름 잠깐이라도 잠재우는 길은 몸 놀려 일하는 길밖에 아직 찾지 못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경전에 보면 하느님이 빚은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살다가 뱀의 꼬임에 빠져 좋고 나쁨을 가르는 열매를 따 먹고 사량분별이 생기자 하느님이 이제 너희는 여기에서 살 자격이 없다. 나가서 뼈 빠지게 일해서 너희 먹을 것, 입을 것을 너희 손으로 장만해라 하고 내치셨다는데, 혹시 구슬땀 흘려 가면서 일하다 보면 사랑분별이 끊어져 머리가 개운해지고 다시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는 첫 마음자리로 되돌아갈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둥지 틀고 사는 이 곳에서 머지않은 산 속에 달 밝은 암자가 있는데 어느 날 어린 스님 한 분이 내려오셨습니다. 밑에 깔고 그 위에 호박이나 꽂감 깎아 널어 말릴 청정한 벗 짚 몇단 얻을 수 있을까 하여 내려온 스님을 꼬여 바쁜 일손을 거들게 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여러 날 동안 붙들어 두었으니 절집에서는 난리가 났겠지요. 고작 볏짚 몇 단 선뜻 들려 보내지 못하고 볏짚 한 단에 하루 일품이라니, 그런 도둑놈 심뽀가 어디있느냐고요. 나중에는 걱정이 되셨는지 스님 몇 분이 길 잃은 이 어린 스님 찾아 산길을 내려오셨습니다.
‘방하착放下着’ ‘마음 놓으시지요.’
‘이 스님께서 지금 자비행을 하고 계십니다.’
내일이면 결제에 들어가 용맹정진을 해야 한다는 스님 붙들고 제가 마음으로 되뇌인 말입니다.
‘마음놓으시지요(放下着)’
부처님께서도 마음을 놓으십시요. 슬픔을 머금으면서도 마음 놓으시기는 쉽지 않으리다. 그러나 여기 이 많은 중생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냥 마음 턱 놓으시지요.
하늘 같이 너른 마음, 마음 깊이 스민 하늘, 그 큰 하늘에 가득한 슬픔 다 오롯이 간직하시되, 기꺼이 놓아 버리시지요(慧悲喜捨).
두손 모아 빕니다. 일하라고 빚어 주신 이 거친 손을 잠깐 거두워(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