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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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전우익
2000년 01월 215호
서울 북아현동 산중턱에 자리잡은 편집실 낡은 한옥이 웬지 그립고 정이 갑니다. 그 집엔 작고 나즈막한 쪽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녹슨 대문과 \'해인 편집실\'이란 작은 문패도 집과 어울리고 문 옆에 서 있는 그리 크지 않은 한 그루 감나무도 집이랑 뒷산과 잘 어울립니다.
몇 해 동안 편집실을 드나들며 가을엔 매연에 찌든 새까만 감을 나무가질 타고 올라가 따먹기도 했습니다. 껍질은 까맣지만 속은 곱고 맛이 좋았습니다.
몇 해 째 못 가봤는데, 이번엔 가봐야지 하고 마음을 내 봅니다. 편집을 맡은 스님은 몇 해만큼 바뀌지만 집과 감나무는 그대로 있습니다. 주인과 나그네가 있다 하고, 불역不易과 유행流行이 있다는데, 이 땅에 산과나무, 사람이 살고 있는데 누가 주인이고 누가 나그넬까. 아마도 주인행세를 하려고 기를 쓰는 쪽이 나그네 같고, 아무 말 없는 편이 주인인 게 분명한 것 같습니다.
멀쩡한 집 뜯고 흉칙한 괴물 짓는 판에 그 낡은 집과 감나무를 그대로 간수하고 지켜준 편집실 스님이 정말 고맙습니다. 옛 집이 없어진다는 건 그리움과 마음의 고향이 없어지는 것 같고 가슴 속에 찬바람이 부는 것 같습니다.
이 원고 부탁받고 좀 얼버무렸습니다. 혹 집 뜯고 감나무 했겠지 싶어서요. 며칠 뒤에 편집실에 전화를 했는데 집도 그대로 있고 감나무엔 올해도 감이 달려 있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쓰기로 했습니다. 뜯고 했으면 난 저주했을 거고 하늘과 부처님도 저줄 내렸을 텐데…
며칠 전에 라디오에서 인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사람이란 뭘까. 내가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 들였습니다. 그래서 편지나 소포 부칠 때 ‘보내는 사람’ , ‘받는 사람’ 을 보고 깜짝깜짝 놀랍니다. 그래서 보냄, 받음만 쓰고 사람은 뺍니다. 참사람 구실은 도저히 못할 것 같고 가짜 사람 노릇은 하고 싶지 않아서요.
인권人權에만 매달린 사람은 가짜요, 목권木權, 옥권屋權, 산권山權, 강권江權 천지만물에 두루 성스러움과 존엄성이 깃들어 있음을 알고 받들고 대접하는 게 참 사람 아닐까 싶습니다. 저희들이 자랄 때 어른들께서 자주 말씀했어요, 복 까불지 말라고. 행동을 함부로 하고, 물건을 아끼지 않는 지금 세상은 온통 복 까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근원수필에 나오는 성북동 노시산방老枾山房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글 읽는 이의 마음을 허전하게 합니다. 어찌된 셈인지 편집실이 노시산방을 연상시킵니다.
그래서 이 세밑에 근원수필을 뒤적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봅니다.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한 때 대가족이 살던 큰집에 살고 있으나, 마음에 그리는 건, 토끼나 짐승처럼 작은 굴에서나, 근원수필에 나오는 ‘참새 보금자리 같 은집”에서 살고 싶습니다.
‘퇴옥파창頹屋破窓-집은 허물어지고 물은 떨어짐-일 망정 이런 집에서 알토란 같이 산다’는 글도 있습니다.
그래서 참새 보금자리 같은 집에서 알토란 같이 살자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음엔 노시산방기老枾山房記에 나오는 감나무를 두고 쓴 글을 적어 봅니다.
“내가 감나무를 사랑하게 된 건 그 모습이 아무런 조화造化가 없는데도 고풍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나무 껍질이 부드럽고 원시스러운 것도 한 특징이요, 잎이 원활하고 점잖은 것도 한 특정이며, 꽃이 초롱같이 예쁘며 가지마다 좋은 열매가 맺고, 단풍이 구수하게 들고, 낙엽이 애상스럽게 지고, 여름에는 그늘이 그에 덮을 나위 없고, 겨울에는 까막 까치로 하여금 시흥詩興을 돋우게 하며 그야말로 회조花朝와 월석月에 감나무가 끼어서 풍류를 돋우지 않는 곳이 없으니 어느 편에서 보아도 고풍스럽고 운치 있는 나무는 이마도 감나무가 제일일까 한다. 처음에는 오류五柳선생의 본을 받아 양류楊柳를 많이 심어 볼까고도 생각한 적이 있었다. 너무 짙은 감나무 그늘은 우울한 내 심사를 더 어둡게 할까 저어한 때문이다. 그러나 한해 두 해 지나고 보니 요염한 버들가지보다는 차라리 어수룩한 감나무가 정이 두터워진다.”
예부터 감나무한텐 일곱 가지 뛰어난데(七絶)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수壽이니 오래 사는 것이요, 둘째는 다음多陰이니 그늘이 짙은 것이며, 셋째는 무조소無鳥巢이니 새가 집을 짓지 않으며, 넷째는 무충두無蟲蠹이니 벌레가 끼지 않습니다. 다섯째는 상엽가완露葉可玩이니 단풍이 아름답고, 여섯째는 가실가담桂實可啖이니 열매가 먹음직하며, 일곱째는 낙엽비대가이임서落葉肥大可以臨書이니 잎이 커서 글씰 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보기엔 단풍 든 감잎은 참 아름답습니다. 그 많은 잎이 한잎 한잎 서로 다르게, 한 잎에도 여러 가지 색깔로 물든 것이 놀랍습니다. 같고 닮는 것 못지 않게 다른 것도 소중한 자연의 이치인데, 같기와 닮기만 바라는 건 자연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요사인 단감이 판을 치는데, 단감은 단맛뿐이며 그리 달지도 않습니다. 젊은 감은 짧고 달고 고소하고 목이 메이기도 하지만 주먹으로 깨면 짧은 맛이 덜합니다. 한겨울에 떫은 감으로 앉힌 바싹 언 홍시를 따뜻한 구들방에서 먹는 맛은 일품입니다. 자연이 빚은 아이스크림입니다. 단것만 먹고 사는 것이 과연 행복할까요?
늦가을에서 초겨울쯤의 쌀쌀한 날씨와 파아란 하늘 아래 감나무 가지 끝에 달린 빨간 감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결 드높여 줍니다.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기쁨에 넘치게 합니다. 미물 같은 인간이 자연의 조화 속으로 녹아들어 제법 순하게 되기도 합니다.
감나무 이야긴 이쯤하고 근원수필 첫머리에 나오는 “매화’를 읽습니다.
“요즘은 턱없이 분주한 세상이올시다. 며칠 전 어느 친구한테 X선생 댁에 매화가 피었다니 구경이나 갈까 하였더니 말이 맺기도 전에 ‘자네도 꽤 한가로운 사람일세’ 하고 비웃음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글은 정해丁亥년에 쓴 글입니다. 정해년은 1947년이니까 52년 전입니다. 지금은 그 때와 비교해서 더 분주해졌습니까, 좀 한가로워졌습니까. 농한기農閑期-가을걷이를 하고 한가로운 겨울을 보낸단 말인데, 한가롭게 보내는 이는 줄어들고 시설농사 짓는다고 분주합니다.
가득, 힘겹도록 짐을 지고 달려 얼마나 갈 수 있을까요.
“한해 두 해 지나는 동안 내 머리에서 모든 꽃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끝내 사라지지 않는 꽃 매화만이 유령처럼 내 신변을 휩싸고 떠날 줄을 모릅니다.
매화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나요? 세인이 말하기를 매화는 늙어야 한다 합니다. 그 늙은 등걸이 용의 몸뚱이처럼 뒤틀려 올라간 곳에 성긴 가지가 군데군데 뻗고 그 위에 띄엄띄엄 몇 개씩 꽃이 피는데 품위가 있다 합니다. 매화는 어느 꽃보다 유덕한 암향暗香이 좋다 합니다. 백화百花가 없는 빙설리永雪裏에 홀로 소리쳐 피는 꽃이 매화밖에 어디 있느냐 합니다.
그러나 내가 매화를 사랑하는 마음은 이러한 조건이 아닙니다. 그를 대하여 아무 조건없이 마음이 황홀해지기 때문입니다. 매화는 그 등치를 꾸미지 않아도 좋습니다. 제 자라고 싶은 대로 우뚝 뻗어서 제 피고 싶은 대로 피어 오르는 꽃들이 가다가 훌쩍 향기를 보내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제가 방 한구석에 있는 체도 않고 은사隱士처럼 겸허하게 앉아 있는 품이 그럴 듯합니다.”
근원은 매화를 보며 이조 백자를 연상하면서 ‘희미한 보름달처럼 아름답게 조금도 그의 존재를 자랑함 없이 의젓이 제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 수줍어하는 품이 소리쳐 불러도 대답할 줄 모를 것 같습니다. 고동古銅의 빛이 제아무리 곱다 한들 용천요龍泉窯의 품이 제아무리 높다 한들 이렇게도 적막한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