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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음 속에 계신 일타 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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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김현준 2000년 01월 215호
답. 불자 현준(鉉埈)에게
공든 글씨, 간정 어린 편지. 해인사를 둘러 멀리 이곳 태백산 깊은 곳까지 당도하였네. 또 하나의 연륜이 지난 이 때, 부모님 잘 모시고 공부에 열중하겠지? 숙세에 불법 선근이 깊은 사람 ‘돈’에만 끌려 사는 인간 세상에서도 ‘도’를 닦지 않을 수 없으려니, 참선하고 경을 읽고 기도 주력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리라.
나는 세계 여행 끝에 느낀 바 있어 이런 심심산곡으로 들어왔다네. 세계 속의 백천 모든 중생들이 언어보다 미소로 먼저 통하고, 그보다 더 중한 건 언어 이전의 무언 설법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음을 똑똑히 보고 절실히 느꼈다네. 나의 정신 에너지가 원자탄만 같다면 무량 중생계에 이익을 주련만, 그렇지 못함에 다듬어야 하겠다.
且待 明春三月 好時節에 鷓鴣啼處百花香이라
돌아오는 춘삼월의 좋은 시절에 자고새 우는 곳 백화향을 기대하노라
Then, see you again. So long.
경북 봉화군 태백산 도솔암

이 편지는 스님께서 2년 동안의 세계 일주를 마치고 1974년(46세) 가을에 귀국하여 태백산 도솔암에 들어가 계실 때 저에게 보내 주신 편지입니다. 이 짧은 한 통의 편지 속에는 스님의 평소 모습과 가르침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고둥학교 1학년 때 스님과 처음 인연을 맺어, 자주 스님을 찾아뵙고 불법의 궁금한 점에 대해 여쭈면, 어린 나에게 손수 차를 다려주시며 밤을 새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법문을 들려 주셨습니다. 아침 공양 때에는 손수 잣을 까서 맛있는 잣죽을 끓여주시기까지 하셨는데, 그 잣죽의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아, 스님의 자애로움----몇 해 전 스님의 저서 때문에 지족암을·찾아갔던 어느 날, 스님께서는 손수 빗자루 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며 어떤 방을 치우고 계셨습니다.
“스님 방도 아닌데 왜 이렇게 직접 치우십니까?” 스님께서는 그냥 미소를 지으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잘 방을 청소하신 것이었습니다. 저녁 늦게 지족암을 찾으면 손수 밥상도 차려 주셨고, 건강이 좋지 않으신데도 손수 차를 달이고 과일을 깎아주시며 한밤중이 되도록 법문을 해주셨으며, 이불을 손수 펴서 잠자리까지 보살펴 주신 때도 있었습니다. 세상에 큰스님은 많지만, 정녕 이와같은 큰스님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와 불법을 묻고 가르침을 청하면, 스님께서는 언제나 정성을 다해 길을 일러 주셨습니다. 노년의 병환 중에 있을 때에도, 공부하는 이들이 찾아오면 아픈 몸을 일으켜서 까지 자상하게 깨우쳐주고 또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때마다 옆의 시자들은 스님께서 건강을 해치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며 간곡히 청하곤 하였습니다.
“스님, 피곤하실턴데 그만 하시지요.”
“괜찮아.”
스님께서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시며, 계속 가르침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찾아오는 이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바라밀을 이루는 공부를 할 것을 권했습니다.
“참선하고 경을 읽고 염불기도하고 주력을 하여 마하반야바라밀을 이루어라. 네 속에 있는 마하심을 잘모아 집중하면 반야지혜가 샘솟고, 그 지혜로써 살게되면 피안의 바라밀은 저절로 이루어지나니….”
이것이 큰스님께서 항상 강조하셨던 가르침입니다.
자애롭고 자상하기 그지없어 자비보살로 추앙받았던 일타큰스님…. 하지만 스님의 내면은 오직 참선정진과 깨우침으로 충만되어 있었습니다. 입을 열면 광장설廣長舌이셨지만 입을 다물면 화두삼매話頭三昧에 젖어들었습니다.
스님께서 1954년(26세)에,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하루 3천배씩 7일기도를 하고 오른손 네 손가락을 연비하신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1955년부터 수십리 밖까지 인가라고 찾아볼 수 없는 태백산 도솔암으로 들어가 홀로 ‘6년 결사結社’를 하실 때의 내용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스님은 이때 동구불출洞口不出·오후불식午後不食·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며 용맹정진 하셨습니다. 때로는 적막강산에 한없이 고독감을 느끼기도 하셨고, 때로는 무섭도록 밀려오는 졸음을 물리치기 위새 수없이 허벅지를 꼬집고 머리를 쥐어박기도 하였습니다. 한밤 중에 가끔씩 정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 <한산시>나 조사스님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천인이나 신장들이 찾아와 경청을 하고는 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용맹정진을 하던 중, 하루 저녁에는 화두삼매에 들었는데, 깨어보니 한낮이 되어 있었습니다. 방문을 열자 뜰 앞의 목련이 벙긋벙긋 미소를 지으며 피어나고 있었고, 산새들은 물론이요 나무들까지 법문을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온통 그대로 진리의 법계였던 것입니다.
보통의 수행승이었다면 이 때를 오도悟道의 순간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님은 그 경지에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당신 스스로 한번도 ‘깨달았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끔 깨달음에 대해 여쭈면 언제나 ‘완전히 못깨달았으니….’라고 표현하셨으며, 이러한 말씀을 들을 때마다 스님이 더욱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럼 왜 스님은 어느 정도라도 ‘깨달았다’는 표현을 쓰지 않은 것일까? 스님의 깨달음은 총이나 대포 정도가 아니라 ‘원자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언제나 참선정진을 하셨습니다.
몇 년 전 일어판 『기도』책을 내기 위해 일본에 갔을 때에도 스님은 밥을 먹거나 말을 하거나 오로지 화두삼매에 들어 있었습니다.
“스님, 지금 화두 잡고 계십니까?”
“응? 응.”
깊은 병환 때문에 수술을 받으러 수술실로 들러가실 때에도, 스님은 오로지 화두삼매에 드셨습니다. 보통사람이라면 한번도 극복하기 어려운 대수술을 여덟 번이나 받고도 능히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화두삼매 속의 스님을 저승사자가 찾을 수 없어 그냥 갔기 때문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수술을 통하여 죽음의 문턱을 여덟 차례나 넘나든 것은 스님께서 여덟 생(生)동안 받아야 할 죽음의 업보를 한 생 동안 모두 받았다고 확신합니다.
아! 스님의 유언처럼, 스님께서는 다음 생에 틀림없이 부처님과 같은 대도를 이루어 우리를 제도해 주실 것입니다.
남을 대할 때는 자비보살이요. 자신에게는 철저한 선수행승이셨던 일타큰스님, 스님께서는 열반에 드셨지만, 스님을 그리면 언제나 활짝 웃고 계신 모습만 떠올라 저는 슬프지 않습니다. 그 미소와 법문과 실천으로 보여주신 아름다운 모습들은 언제까지나 우리의 마음 속에 남아, 인생의 나침반이 되고 깨우침을 주시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스님의 크신 은혜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나무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