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활짝 핀 연꽃 향기를 들이마시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남국선원에서 결제를 맞게 되었고 결제를 한 뒤 얼마 안 되어 급히 하와이로 갔습니다. 가보니 스님께서는 이미 마음 정리를 끝낸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사흘이 지난 다음 혜인스님, 성진스님, 도범스님, 혜국 이렇게 상좌 넷이서 지켜보는 가운데 그렇게 조용히 입적하신 것입니다.
마침 하와이에서 정진하고 계시는 현호스님과 그 곳에 상주하는 대원스님, 그리고 대원사에서 동안거를 나시는 선원 구참스님등 많은 대중이 스님의 법구를 향하여 조용히 합장을 하셨습니다.
스님! 편안히 가십시오. 그리고 원력 세운대로 저희 곁으로 속히 돌아오십시오. 나도 몰래 눈물이 볼을 타고 내리는데 그 당시 마음은 수행인의 마음이 아니라 다정다감한 아버님을 마지막 떠나 보내는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마치 막을 내린 연극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대단원의 막을 내린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겨우 자신을 억제하며 정중히 절 삼배를 드리고 말씀드렸지요.
“스님 다른 것은 모두 유언대로 따르겠습니다만 장례식을 치루지 말라는 말씀은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 일만은 저희들이 충분히 의논해서 처리하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것이 스님 가시는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하루 전에 손수 적어 놓으신 임종게에는
일천백일로진심一天白日露眞心 만리청풍탄고금萬里淸風彈古琴 생사열반증시몽生死涅槃會是夢 산고해활불상침山高海濶不相侵
“하늘의 밝은 해가 참 마음 드러내니, 만리의 맑은 바람 옛 거문고 타는 구나. 생사열반이 모두가 오히려 꿈이러니, 산은 높고 바다 넓어 여시여시로구나.”
내가 은사 스님을 모신 이래 이번처럼 제자들의 간청을 완강하게 거절하시는 모습은 처음 보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스님은 본래 거절을 모르시는 분입니다. 거절하지 못하는 그 성품 때문에 자비보살이란 존경도 받았지만 그 어른으로서는 힘들어 하신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한가지 생각나는 일화를 말씀드리죠. 70년대 중반일 겁니다. 내가 송광사 선원에서 지낼 때였으니까요. 구산 방장 스님을 모시고 삼년 결사를 끝내고 나서 은사 스님께 인사를 갔었습니다. 삼년 결사를 마쳤다는 얘기에 그렇게 좋아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야야, 나는 말이야 태백산 시절을 빼고 나면 한평생 결사다운 결사를 못해 봤어, 이번에 혜국상좌가 내 시봉 좀 해 주지. 다른 시봉은 필요 없고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나한테까지 못 오게 하고 돌려보내는 일만 해 주면 되네. 그러면 내가 이 방에서 문 닫아 걸고 결사정진을 해 보려네.”
평소와는 달리 사뭇 심각하게 말씀하시기에 “스님 그러십시오. 그 일이라면 혜국이 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스승 상좌 사이에 약속이 이루어졌던 거죠. 은사 스님께서 정진을 시작하신 지 칠일쯤 지나서 일입니다. 부산에서 보문성 보살 일행이 큰스님 뵈러 왔다면서 스님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더군요.
그래서 사실을 말씀드렸죠. 보문성 일행은 얼른 합장을 하고 돌아서는데 혼자서 따라온 신도 한 분이 쇳소리 나는 소리로 열을 내는 겁니다. 서울에서 새벽 차 타고 일부러 큰스님 친견하려고 힘들게 왔는데 잠깐 만나 뵙고 간다며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그래서 호통을 치고 겨우 돌려보냈지요. 그러다 보니 실랑이하는 소리가 스님께서 정진하는 방에까지 다 들렸던 겁니다. 조금 뒤에 저녁 공양 시간이 되었는데 스님께서 저녁을 안 드시는 겁니다. 왜 저녁 공양 안 하시냐고 물어봤죠.
“야야 남의 마음을 그렇게 불편하게 해 놓고 어떻게 저녁을 먹겠냐. 그 먼길을 일부러 찾아 왔는데 어찌 그리 몰인정하게 쫓아 보내느냐 말이다. 전화라도 한 통해 줘서 마음을 풀어 주도록 해라.”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기분이 묘하더군요. 정말 이 어른이 특이한 분이구나 싶은 거예요. 그래도 어쩝니까. 어른 말씀이라 전화를 했지요. 그런데 웬걸 보문성 보살 대답이 오히려 신심이 더 나더라는 거예요. 큰스님 위치에서 문 닫아 걸고 정진하는 모습이 그렇게 기쁘더랍니다. 스님께 직접 말씀드려 달라고 전화를 비꿔드렸죠.
그 전화를 받고 나서야 얼굴을 펴시는 거예요. 그제야 저녁을 자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혜국수좌에게 된통 혼이 나고서도 오히려 기쁘다니 거참 희안한 일이다. 그것 참 묘한 일이네.“
그러면서 웃으시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누구의 청이든지 거절하는 일이 없으셨지요. 그런가 하면 당신의 삶에 대해서는 분명한 소신이 있었던 분이기도 합니다.
70년도 였을 겁니다. 당시 해인사 대중이 모여서 은사 스님을 해인사 주지로 선출했습니다. 그런데 뒷날 새벽에 보니 스님이 없는 겁니다. 이상하다고 찾고 있는데 성철 큰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느그 스님 도망갔다. 해인사주지 안 할라꼬 줄행랑 했다 말이다. 갈아입을 옷이나 챙겨다 드려라.“
해인사 주지 안 한다고 피하신 은사 스님이 성철 큰스님께서 볼 때 좋게 보였던 게지요. 그 때만 해도성철 큰스님께서 해인사 큰절에 같이 살 때입니다. 새벽마다 회초리를 들고 선방에 올라오셔서 졸고 있는 수좌들을 사정없이 두들겨 팰 때입니다. 어쩝니까? 은사스님께서 입은 옷 바람에 새벽 걸음하셨으니 갈아입을 옷이라도 가져다 드릴 수 밖에요.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기고 스님을 찾아 나섰지요. 사방 수소문하여 찾다보니 도봉산 어느 토굴에서 조용히 지내고 계시더군요. 가지고 간 옷 보따리를 풀어 드리면서 “스님 옷이나 갈아입으시지요. 해인사 산중 어른들이 모두 스님건강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그러자 스님은 당신이 스물여섯살 한창 나이에 연비할 때 얘기를 들려주시는 겁니다. 현 종정 혜암스님과 강원도 오대산 서대에서 용맹정진을 하고 난 다음이랍니다. 한세상 안 난 셈치고 이 한 목숨 부처님께 바친다는 심정이었다며 그 때의 마음을 게송으로 낭랑하게 읽어 주시는 겁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께 머리 숙여 절하오며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하옵니다. 불보살님 증명하소서. 세세생생 날 적마다 발심 출가하여 필경에는 활연대오하고 부처님 혜명을 이어 보리군생하여지이다.” 이런 발원을 하고 연비를 하셨다면서 “큰스님이니 주지니 이런 이름이 붙기 시작하면 이 공부하기가 어려워 부디 헛 이름 나기 전에 부지런히 공부해야 돼” 하셨습니다.
당시 숙연했던 내 모습이 지금도 큰힘이 됩니다. 그렇게 해인사를 떠났던 스님은 결국 후임 주지가 결정된 다음에야 돌아오셨습니다. 그 때부터 스님은 가끔 외국으로 나가셨습니다.
태국 핫벤자라는 절에 가서 수행을 하시는가 하면 하와이 어느 아란야를 찾아 조용히 지내곤 했습니다.
평생 거절하지 못하는 성품의 소유자로서 외국이란 피난처요, 또한 모든 반연을 떠나는 수행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스님이다 보니 무얼 하나 버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입적하시기 이, 삼년 전 내가 살고 있는 님국선원에 오셔서 며칠 지내실 때 일입니다.
밖에 나가서 잠깐 일보고 돌아와 보니 스님께서 내 방에서 뭔가를 부지런히 붙이고 계셨습니다. 신도들의 이름이 쓰인 편지 봉투를 종이 조각-으로 일일이 풀칠하여 글씨 쓰인 곳을 붙이고 계신 겁니다. 이렇게 기운 봉투를 쓰셨기 때문에 스님은 평생 새 봉투 사는 일이 없으셨지요.
그러기에 길가에 버려진 애들 장난감이며 버려진 포장지 하나까지 전부 모아 놓았습니다. 온갖 잡통사니로 스님 벽장이 가득했지요. 그런가 하면 어디 나갔다가 오실 때마다 적은 돈으로 불상들을 사오는 겁니다. 그런 유물들로 우리 스님 방은 가득 채워진 겁니다. 그래서 일반 대중은 은사 스님 방에 뭔가 무척 많을 것으로 생각하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스님께서 떠나시고 난 다음 금고를 열어 봤더니 금고 안에 있던 물건치고는 너무 예상 밖이었습니다.
내가 십 수년 전에 청원스님께 부탁하여 불감을 조성하여 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 불감과 조성할 때 남은 나무 조각과 톱밥이 그대로 금고 안에 모셔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금이 100만원, 5백원자리 동전이 일곱 개, 그 밖에 망치와 펜치, 드라이버가 전부였습니다. 금고가 아니라 연장 통이더군요. 정말 잘 사신 삶이었구나 싶었습니다.
스님은 사바세계의 연꽃이셨고 삶 자체가 법공양이셨습니다.
스님의 그 아름다운 삶에 삼배 드리며 머지 않은 날 다시 뵈옵기를 간절히 발원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상좌 혜국 삼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