稽首如空 第一痛切 唯重加被 開我迷雲 (下略)
허공과 같은 법신자리에 절하옵고 평등한 일심으로 간절히 임하나이다.
오직 가피를 드리우시어 저희 미혹한 구름을 열어 주소서…
발원을 마친 뒤 스님은 세속과 관련된 사람노릇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리고 ‘오로지 중노릇만 잘하리라’ 결심하며 오른손 네 손가락을 심지로 삼아 불을 붙였고,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잊으시면서 한밤에 시작된 연비는 날이 환해지면서 끝이 났습니다. 이듬해 1955년(27세)에 경북 봉화군 소쳔면 태백산 도솔암으로 들어가 동구불출洞口不出, 오후불식午後不食, 장좌불와長座不臥를 지키며 홀로 6년의 결사結社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정진을 하다가 1956년 음력 3월 22일에 큰 환희의 경지를 이루어 게송을 지었습니다.
頓忘一夜過 時空何所有
開門花笑來 光明滿天地
몰록 하룻밤을 잊고 지냈으니
시간과 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문을 여니 꽃이 웃으며 다가오고
광명이 천지에 가득 넘치는 구나
깊은 산 봉우리 위에 앉아 산새와 솔바람 소리를 벗삼으며 깊은 삼매의 도를 이루었던 일타 큰스님! 노년에도 스님께서는 이 도솔암에서 정진할 때가 ‘참으로 좋은 시절’이었다고 회상하셨습니다.
태백산 6년 정진을 통하여 정법正法과 대원大願과 대행大行을 구족하신 스님은 1960년(32세)에 산에서 내려와 걸림없는 교화의 길을 열어 보였습니다. 때로는 당대의 도인을 찾아 선문답을 나누었고 조계종단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종회의원, 교육위원, 법규위원, 감찰위원, 역경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통합종단에 정법正法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언설변재言說辯才를 갖추었던 스님은 30대의 젊은 나이에 대법사로 추앙받아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걸림없고, 쉽고, 편안한 법문으로 중생을 교화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와중에서도 스님은 해인사, 화엄사, 통도사 극락암 등의 선원에 들어가 하안거, 동안거 결제에 한 차례도 거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45세 때인 1973년, 스님은 인도의 팔대성지와 동남아시아 10여 개국의 불교성지를 순례하면서 불교의 뿌리와 우리 불교의 장단점을 살폈으며, 이듬해에는 유럽 10여 개국을 돌아보았습니다. 그 때 스님은 겉모양이나, 언어, 문자를 떠난 마음이야 말로 세계 어디에서나 통한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귀국하자 곧바로 태백산 도솔암으로 다시 들어가 안거 정진하였습니다.
1976년(48세)에 해인총림의 율주로 피임된 스님은「사미율의」,「불교와 계율」등 계율과 관련된 여러 책을 발간하고 후학들을 양성하여, 일제 강점기 때부터 무너졌던 이 땅의 계율을 재정립하는데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또한 1980년부터는 미국 LA의 고려사 포교를 시작으로 2년 동안 북미, 남미, 중미의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한국불교를 세계에 널리 알렸습니다.
1987년(59세) 봄에 스님은 간경화라는 난치의 병에 걸렸습니다. 14년 전 인도에 갔을 때 옮은 간염을 방치하여 간경화로 진행된 것입니다. 이러한 큰병이 찾아들었어도 스님은 오히려 정진으로 일관하며 더 큰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1990년 봄, 스님은 지리산 칠불암으로 들어가 용맹정진하시며 다음의 시를 남겼습니다.
藥病俱放下하고 亞字房中坐하니
遠看白雲飛하고 近聞杜鵑啼로다
追念古聖蹟하니 於此得大機할새
我欲默無言하고 殘年度如如하리라
약과 병을 함께 다 놓아 버리고
아자방 한가운데 앉았으니
멀리 바라보니 흰구름이 나르고
가까이 들으니 두견새가 우는구나
옛 성인의 자취를 좇아 생각하니
이 아자방에서 큰 기틀을 얻으셨도다
나도 여기에서 묵언정진하며
남은 해를 여여하게 보내리라.
죽음을 넘어선 정진으로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은 스님은 1992년부터 불자들의 올바른 신생 생활을 위해 알기 쉽고 읽기 편한 집필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도」,「생활 속의 기도법」,「윤회와 인과응보 이야기」,「자기를 돌아보는 마음」,「불자의 기본예절」,「범망경 보살계」5책, 법어집인「부드러운 말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등 스무 권에 가까운 책을 내셨고, 열반에 드신 지금에도 우리 곁에 남아 무명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997년에는 일어판으로 「불안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는 불교의 기도」라는 책을 일본 법장관法藏館에서 출판하여 일본의 좋은 책 10선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1993년(65세)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구족계 단일계단 전계대화상으로 추대되어 모든 승려에게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를 전하는 중임을 맡았으며 1994년 5월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으로 추대되셨습니다. 그리고 해인사 지족암에서 칠불암 아자방과 비슷한 선방을 만들어 틈틈이 정진하셨고, 이후 제 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조실로 계시면서 후학을 지도하셨습니다.
1996년(68세)부터 스님의 몸은 열반을 감지했음인지 생사리生舍利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연비한 오른 손에서 한달에 한두과 또는 세과씩 나와 열반하시기 전까지 백여과의 사리가 나왔고, “혜천 너도 필요하면 주겠다”고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그 사리 중의 일부는 증장增長하거나 분신分身을 하며 여러 개로 나누어 지기도 하였습니다.
만년에 스님은 “다음 생에는 지구상의 최강국인 미국에서 태어나 거룩한 상호를 갖추고 학업을 마치면 한국으로 와서 출가하리라. 그래서 젊은 나이에 부처님과 같은 대도大道를 이루어 일체중생을 제도하고 이 땅의 불교를 세계에 펼치리라”는 말씀을 자주하셨으며, 3년 전부터는 해마다 가을철이 되면 미국을 찾았습니다. 올해 들어 스님은 금강산에 다녀오셔서 너무 장엄하고 아름다운 산이라 자랑하며 기뻐하셨고, 또 지족암 앞에 탑을 세워 놓으시고는 입적한 뒤 절대 복잡하게 하지 말고 소박하고 단순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지난 여름 손수 도량을 청소하시다가 도자기가 떨어지면서 손에 정맥이 끊어져 수술을 했습니다. 그러나 수술이 잘못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재수술을 하였고, 수술 경과가 좋아서 다시 스님을 뵈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는데 이젠 꿈이 되었습니다.
혜인, 혜국스님이 하와이로 가시는 것을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지난 11월 22일 하와이로 가셨고, 11월 29일 하와이 와불산 금강굴에서 상좌 혜인, 성진, 혜국, 도범 스님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임종게를 쓰셨습니다.
一天白日露眞心 萬里淸風彈古琴
生死涅槃會是夢 山高海濶不相侵
하늘의 밝은 해가 참 마음 드러내니
만리의 맑은 바람 옛 거문고 타는 구나
생사열반이 모두가 오히려 꿈이러니
산은 높고 바다 넓어 서로 침범하지 않네
게송을 남긴 스님은 편안한 모습으로 열반에 드셨으니, 세수는 71세가 되시고 법랍은 58년이십니다. 스님은 불교의 세가지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선과 교와 율을 모두 갖춘 대선사요 대법사요 대율사이셨고, 모든 행을 걸림없이 하시면서 한쪽에 치우치거나 기울어짐이 없이 당당하고 떳떳하게 모든 불자에게 투명하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 주셨습니다.
스님을 차(茶)를 사랑하고 무척 좋아하셔서 다향산방茶香山房을 즐겨 쓰셨으며 조주 선사가 끽다거喫茶去라고 하신 부분을 끽다거래喫茶去來라고 표현하기도 하여 다정다감한 스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항상 붓을 곁에 두고 ‘글씨 한 장 받으로 왔습니다,’ 하면 누구에게나 시원시원하게 일필휘지해 주셨고, 그 자리에서 쓰지 못할 처지면 다른 사람에게 주기로 약속된 써있는 글씨르 먼저 주실 만큼 갖고 계신 모든 것을 주셨던 스님입니다.
멋과 맛과 아름다움을 몸과 마음에서 따뜻하고 깨끗한 향기로 중생들에게 심어 주셨던 스님은 차별심이 없어서 모든 불자를 똑같이 대해 주셨고, 늘 친견이 자유롭게 허용되었으며 언제보아도 한결같이 밝고 맑은 미소로 불자의 마음을 즐겁고 편안하게 해 주셨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자비의 족적과 깨달음의 법문을 남기셨던 스님!
공부를 하고자 하는 이를 보면 아픈 몸을 일으켜서까지 자상하게 깨우치고 또 깨우쳐 주셨던 큰스님!
스님께서는 정토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불타는 집에 살고 있는 중생을 위해 틀림없이 우리 곁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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