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흥대사(憬興大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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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등불을 이어온 이 땅의 스님들 - 편집실
1990년 09월 103호
경흥대사는 신라 신문왕(681∼691)대의 고승으로 알려져 있지만 생몰연대 등 확실한 근거가 없는 것이 아쉽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그의 생애에 대한 간단한 일화와 삶의 일부가 전하고 있으며, 스님의 저술이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남아 있어 스님의 학문적 세계를 포함한 통일신라기의 학문적 체계를 엿볼 수 있어 퍽 다행스럽다 할 수 있다.
스님은 백제의 옛땅이었던 웅천주(熊川州) 태생으로 18세의 나이로 출가하였고, 일찍이 경 ·율·론 삼장을 통달하고 학덕을 겸비하였으므로 국사로 책봉되었다. 그의 학덕을 흠모하였던 많은 사부대중이 구름Ep처럼 항상 스님의 주위에 몰려 들었다.
「삼국유사」에는 스님에 대한 이런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스님께서 삼랑사에 주석할 때 병을 얻어 오랫동안 고통을 받고 있었다. 약을 썼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스님의 병의 원인은 우로(憂勞)에 있었으므로 약물로는 치료할 수 없고 희락(喜樂)하여 크게 웃으면 치유될 병이었다.
그런 어느 날 한 니승(尼僧)이 찾아와서 즉석에서 열한 가지 모습의 가면을 만들어 가면을 쓰고 기이한 춤을 추니, 그 괴상한 모습을 보고 스님은 큰소리로 웃으며 기뻐하였는데 그 이후 차츰 스님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이에 니승은 조용히 삼량사 남쪽에 있던 남항사 법당에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사람을 보내어서 그 뒤를 추적하니 가지고 있던 주장자가 11면관음상 앞에 놓여 있었다.
또 한 이야기는 스님께서 국사이었을 때 이야기이다.
스님께서 어느 날 왕궁에 행차할 때였다. 스님은 말을 타고 있었는데, 그 행색은 매우 화려하고 엄중하였다. 그래서 행인들은 물러나서 길을 비켰다.
그때 행색이 몹시 초라한 노승이 석장을 끌며 광주리를 메고 지나가고 있었다. 광주리에는 마른 물고기가 들어 있어 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대사가 꾸짖기를 ‘네가 승려의 행색을 하고 어찌 불법에서 금하는 물건을 짊어졌느냐’고 하였다.
그 노승이 답하기를 “두 다리 사이에 산고기를 낀 것보다 시장의 마른고기를 지고 있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깨달은 바 있어 사람을 시켜 뒤를 쫓게 하였더니 남산 문수사 앞에 지팡이와 자루가 놓여있었는데, 자루 속의 마른 물고기는 소나무 껍질이었다.
이 사실을 국사에게 알리자 크게 감탄하고 그뒤에 스님은 두 번 다시 말을 타지 않았다.
스님께서는 원효대사와 같이 엄청나게 많은 저술을 남겼지만, 지금까지 현존하는 저술은 「미륵상생경소」·「미륵성불경소」 각각 1권과 「무량수경연의술찬」 3권만 남아 있을 뿐 많은 저작이 일실되었음은 참으로 애석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