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여름날씨는 유난히 습도가 많다. 제주 공항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빳빳하게 풀을 먹인 나의 베옷은 금새 풀이 죽어 녹녹해졌다.
서귀포로 가는 길가에는 유도화꽃이 만개하여 절정을 이루고 있었고, 여행객인 듯싶은 사람들이 도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서귀포의 외곽지역에 있는 약천사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해 넘어갈 즈음 일몰의 시간이어서 바다 저편으로 낙조가 지고 있었다.
혜인스님께서도 육지에 가셨다 막 돌아올 시간이어서 그런지 피곤해 보이셨지만 애써 반가이 맞아주셨다. 스님은 제주도가 고향이시기는 하지만 해인사가 본사이며 일타스님의 상족(上足) 이시다.
“스님, 굉장히 큰 불사를 시작했습니다. 제주에서뿐 아니라 전국에서도 가장 큰 법당건물이
되겠습니다.”
“제주도 불교의 근대역사가 짧기도 해서 그러하겠지만 해인사와 같은 종합수도원이 없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사부대중이 함께 수도정진할 수 있는 종합수도원을 건립하려고 했습니다만 10년 계획 불사이므로 지금까지한 불사보다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이 남아 있는 셈이지요”
서귀포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대포리에 자리 잡은 약천사는 원래는 아주 작은 암자터였던 것을 스님이 절 뒤터와 앞터를 조금씩 조금씩 사들여 3만 5천평의 대터를 이루어 이곳에 가람터를 일구었다.
“본래 제주도가 옛날부터 물이 귀한 곳이었지만 그러나 이곳 약천은 사시사철 이렇게 마르지 않고 계속 물이 흐릅니다. 그럴 뿐 아니라 이렇게 앞이 창망하게 트여서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장소가 많지 않은 천혜의 명당입니다. 그래서 제주의 여러 곳을 찾다가 이곳을 보고 이곳이야말로 천추만대의 도량이라고 생각하고 불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스님은 열여섯살에 출가하였고, 열여덟살에는 현대의 고승 효봉스님을 시봉하는 틈틈이 그 당시 말로 \'살아있는(生) 치문(緇門)\' \'살아있는 사집\'을 배우기도 하고 동화사 등지를 시봉하고 다니면서 참선 정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때의 상황을 스님은 이렇게 서술하였다.
\"출가 후 나는 해인사 강원에 있었지요. 계속해서 그때 강원 공부를 했으면 아마 현재 해인사 강주로 계시는 종진스님과 같은 졸업생이 되었을 것이지만 효봉스님을 듣게 되었고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가 통하면 일체가 통한다(一通一體通)\'라는 법문을 듣고 나서는 선원으로 따라다녔지요.
그런데 또 한가지 이유로는 그 당시 효봉스님께서는 의치를 하고 계셨어요. 그 의치는 잘 뽑아지지를 않아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지요. 그 의치를 신통하게도 나는 아프지 않게 뽑는 유일한 기술자였으므로 스님은 늘 의치를 뽑을 때는 나를 부르신곤 했지요. 그래서인지 지금 송광사 방장이신 일각스님께서도 나를 꼭 효봉스님의 시봉으로 데려가기를 원했어요. 그래서 이겸 저겸 나는 선원의 수좌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걸망을 메고 다니던 그 당시 나의 기상은 곧 견성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어요.
또 그만큼 열심히 정진했습니다. 그 이후 해인사 선원을 비롯하여 극락암, 보광전 등에서도 정진했지요.”
그때 그 불퇴전의 대 정진심을 30살에 이르러 이런 발원을 하게 된다.
\"내가 30살에 군대에서 제대를 하고 돌아와서 100만배 참회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의 군대생활이 대개 그랬습니다만 몹시 고된 생활이었습니다. 일등병 시절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
스님은 잠시 옛날을 회상이라도 하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내무반에서 한 사병이 탈영을 했다가 잡혀와 모든 장병이 보는 앞에서 소위 시범 케이스로 죽을만큼 맞는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얼마를 때렸던지 탈영했던 장병은 거의 초죽음이 되어 있었습니다. 견디지 못해 기절을 하자 물을 끼얹고 또 때릴려고 할 때 나는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렀습니다. \' 더 때리면 안됩니다. 만약 더 때리겠다면 제가 대신 맞겠습니다. \' 하고 나서자 조용하던 연병장이 잠시 술렁거렸습니다. 겁없는 일등병이라고 한편에선 수군거리고 한편으로는 놀라기도 해서 일단 그 탈영별의 처벌은 그것으로 중단되었으며 나의 행동에 대한 문제가 부대 내에서 화제가 되자 한편에서는 겁없는 일등병놈이라고 욕도 하고 , 한편으로는 전우애가 있는 사병이라는 등의 의견이 엇갈리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내가 군입대 전의 승려였음이 알려졌을 때, 나의 행동에 대한 의견은 호의적으로 나타나서 그 사실이 대대장에게까지 알려지자 그 당시 위수지역 철원에 있던 도피안사의 위수 사병으로 근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에만 군복을 입었지 사실상 승려생활로 군복무를 한 사실이 너무나 큰 부처님의 가피였습니다.
그래서 그 부처님의 가피에 대한 감사와 또한 서른살 나이가 되도록 살면서 알면서 저지른 죄업, 모르고 지은 죄업 그 모두를 참회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5천배씩 200일을 참회기도정진을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 해인사 방장스님께서는 이런 말씀으로 나의 결심을 다져 주셨지요.
‘마음으로 결정한 것이라 해도 실천해야만 한다. 부처님 앞에서 절하다가 죽었다는 사람 아직 보지 못했고, 설령 절하다가 죽는다고 해도 절대로 지옥에는 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크게 힘이 되기도 했지요. 매일 5천배를 하면서 육체적 고통이 하나 둘 찾아들기 시작했습니다. 무릎에서 피가 나고 몸살과 피곤이 겹쳐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인내하기 힘든 고통과 아픔이 찾아왔지만 그것을 극복해내고 100만배를 마쳤을 때의 그 떳떳함,
그리고 고통과 아픔마저도 어떤 한계를 가진 것일 뿐이라는 자신감을 얻었을 때 일생일대(一生一大)의 신념과 신심이 용솟음치듯 솟아났습니다.
이젠 앞으로 어떤 고통과 어려움이 오더라도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용기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뒤 나는 묘하게도 크게 배운바도 없지만 글씨를 쓰고 법문을 해도 큰 두려움 없고 막힘도 없게 된 것입니다.”그 뒤 스님께서는 불법이 한량없는 진리인 것은 틀림없으나 최근래 불교의 침체 원인이 포교를 등한히 한 결과라고 판단하여 포교의 일선에 나서시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약천사를 건립하게 됨도 역시 포교의 일환 아니겠느냐 말씀을 이으셨다.
“약천사는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로서는 동양 최대규모의 건축물입니다. 꼭 커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차츰 종교의 다원화를 요구하는 현 사회에서 청소년을 위한 수련장, 선수련회, 법당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고루 혜택을 주기 위해서 건립하다보니 건물이 커졌습니다. 법당 내부에는 옛 화엄사 각황전과 같이 대리석에 중요한 대승경전을 한글로 서사(書寫)하여 모실 계획입니다. 바로 현대판 석경(石經)이 되겠지요,”
스님은 또 대웅보전에는 삼존불을 모실 예정이라고 한다.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을 모실 예정인데 은사이신 일타스님의 말씀을 따라 중앙의 비로자나불은 높이를 15자 크기로 모실 예정인데 부처님 복장에 열명 이상의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보처보살로는 문수, 보현, 관세음, 지장보살님을 비롯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의 보처로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모실 계획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대웅보전이 다 되면 그 뒷편으로는 다보탑형 석존법당을 만들고 그 법당에는 약사여래를 모실 계획이라고 밝은 표정으로 청사진을 피력하였다.
이렇게 불사(佛事)를 하는 가운데에서도 스님께서는 포교 또한 게을리하지 않으시는데 서울, 부산, 대구를 비롯한 각지로 끊일새 없는 초청법문을 다니시면서 현대인들에게 부족하기 쉬운 효순사상(孝順思想)과 자비사상을 강조하는 법문을 하신다.
“범망경에 보면 보살행을 함에 있어 가장 많이 강조하는 행(行)으로 효순사상과 자비사상이 있습니다. 효순사상은 은혜에 보답하라는 불교용어인데, 즉 부모와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라는 사상이자 동시에 모든 중생을 수순(隨順)하라는 사상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러한 보은사상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은혜를 갚기는커녕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학대하고 폭력이나 살인마저도 일삼는 어지러운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은혜를 모르는 사회란 곧 짐승의 사회가 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므로 스님 법문의 주제로는 주로 부모은중경과 범망경 등 효에 대한 경전이나 말씀들이 중심이 되고, 사회윤리나 도덕적인 말씀을 누구나 알아 듣기쉬운 말로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왔던 것이다.
특히 심성이 고운 우바이들은 법문 도중에 많이 울기도 하는데 분위기가 너무 무거우면 금방 우스운 법문으로 주제를 바꾸는 등 그야말로 신도들을 울리고 웃기는 자유자재로 이끌고 나가는 이 도리는 결코 재주가 아닌 백만배의 신념에서 나온 결과라는 사실을 알면 자연스레 이해되어질 것이다.
스님의 법문 가운데에서 특히 인기가 있다고 알려진 요일법문(曜日法門) 또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된 것으로 각 요일마다 그 요일이 가진 글자를 잘 풀이함으로써 보다더 쉽게 불교에로 접근을 갖게 해왔던 것이다.
가끔 가다 오다 골격만 세워놓은 큰 건물을 보는 사람마다 걱정을 하면 ‘10년 동안 할불사가 어디 그렇게 쉽게 이루어집니까? 나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불사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다 하실 일인데 무엇이 그렇게 걱정이 되십니까? 저는 제 성의껏 다 하다가 안되면 부처님께 매달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스님의 결의와 신심이 놀라웠다.
곧 제주도가 자유무역항이 되면 10년 뒤쯤 틀림없이 약천사는 국제적인 불교명소가 될 것이며 우뚝한 포교의 전당이 될 것이라 기대된다. 10년 아니 백년, 천년을 내다보고 건립하는 도량 약천사.
창망한 푸른바다를 향하여 영원한 불법의 등대가 될 약천사를 뒤로 하고 나서니 한라산은 헌출하게 이마를 드러내고 한낮의 햇살 속에 더 더욱 빛나고 있었다.
글/시명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