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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대각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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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탐구 - 한보광 1990년 09월 103호
5. 사원경제의 자립화

용성선사는 모든 민중을 자각케하여 각인(覺人)으로 만드는 데 있어서는 우선 무지(無知)와 무명(無明)을 타파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무지를 깨우쳐 대각인(大覺人)이 되었을 때 이 민족의 독립(獨立)도 정법(正法)의 구현도 전통의 수호도 가능한 것으로 간파했던 것이다.
선사는 이들을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고, 알기 쉬운 포교서를 저술하였으며, 도회지에서 선회(禪會)를 개설하였으며, 항일운동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모든 일에는 막대한 경제가 필요로 하게 되며, 이러한 뒷받침없이는 어느 하나도 이끌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자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한국불교는 경제적 원천을 신자들의 시주나 보시금에 의존해 왔으며, 시식(施食)이나 불공금(佛供金)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조선말기의 사원경제는 빈약하기 짝이 없었으며, 겨우 명맥을 유지하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특히 조선조 오백년의 배불정책으로 인해 사찰에 있던 토지들은 거의가 몰수 당했으며, 과다한 세금부과로 사원경제는 더욱더 빈사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승려들은 이러한 사찰을 보수하고 유지관리하기 위하여 탁발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심지어는 계율에서 금지된 양조업을 행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속에서 선사는 어떻게 하면 사원경제를 회복시키고 안정시킬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승려들 자체도 큰 문제점이 없진 않았다. 즉 신자들에게 보시만을 거듭 강조하면서 자신은 베풀줄 몰랐으며, 무엇이든지 쉬운 방법으로 해결하려고만 하였지 스스로 생산에 참여코자 하진 않았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간파한 선사는 새로운 측면에서 수행과 사원경제의 양면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생산에 참여하는 불교,. 수행하는 불교의 상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사가 주장하고 실천한 선농불교(神農佛敎)이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인 이윤의 추구만을 위한 노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그 자체를 선수행(禪修行)과 동일시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선(禪)은 선원(禪院)에서 가부좌만을 틀고 수행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언제 어디서든지 할 수 있다는 점을 스스로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 물론 옛부터 선수행(禪修行)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있다고는 하였지만, 이것은 관념적인 이해에 불과했지 노동의 현장과 연관시켜 수행하는 모습을 실천하신 분들은 그리 흔한 현상
은 아니었다.
선사는 ‘중앙행정에 대한 희망’이란 해서 사원경제의 장래와 문제점을 분석하면서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나 자신이 노농(勞農)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과거에도 황벽 임제(黃蘗臨濟)와 위산 앙산( 山仰山)이 모두 전중(田中)에서 보청(普請)하사 친히 경작(排作)하시었다.”
라고 기고하고 있다. 불교사에 있어서 선종(禪宗)이 한 종파로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마조 도일(馬祖道一)의 제자 백장 회해(百文懷海:720∼814)선사의 백장청규(百丈淸規)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즉 백장선사가 선가(禪家)의 생활규범을 정립함으로써 선종이 완전한 선불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선불교의 구성요소인 조사(祖師)와 어록(語錄) 및 청규(淸規)가 완전히 정립되게 되었다. 따라서 선불교에 있어서 청규는 대승불교의 계율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와 같은 청규를 처음으로 제정한 분이 백장(百丈)선사이며, 이 청규를 우리는 백장청규(百丈淸規)라고 부른다. 여기서 백장선사는 그의 생활신조를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고 하고 있다. 즉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라는 철저한 생활태도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인도불교에서는 승려들이 생산에 참여하는 노동을 일찍부터 금지해왔다. 이러한 것은 부처님 재세시부터 문제가 되었으며, 여기에 대해 부처님은 승려들의 저축생활이나 생산업에 참여하는 노동을 절대 금지하는 말씀을 여러 경전이나 율전에서 하고 계신다. 그러나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부터 사원생활의 구조자체가 인도와는 다르므로 노동에 관한 조항에 근본적으로 수정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러한 현상을 가장 잘 반영한 것이 바로 백장청규(百丈淸規)의 노동에 관한 태도이다. 그러나 중국불교나 한국불교에 있어서 이 노동에 관한 문제는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노동을 금기시 해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용성선사는 자신의 선농관(禪農觀)을 백장청규에 그 근거를 두면서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실천하였다. 이러한 점은 한국불교에 있어서 용성선사가 최초일 것이다. 그는 위의 글에서 산중에 있는 각 사찰에서 하루 속히 농사를 직영하며, 약초단지를 조성하고 과수원 등을 만들어 농업에 종사하면서 수행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또 승려들의 생활태도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의 노력에 의해 살아갈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노력의 대가로 살아 가려면 유심유물(唯心唯物)이 둘이 아닌 경지에서 노력할 때 반종교자(反宗數者)를 없애고 의뢰심을 없애며, 당당하게 포교하여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사원경제가 신도나 세인(世人)들에게 의존만 하고 있다고 한다면 승려는 이들에게 아부하고, 성스러워야할 도량은 무도장(舞蹈楊)이 될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선사는 3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즉 첫째는 사찰의 유휴지에 각 지역에 맞는 특산물의 개발을 주장하고 있으며, 둘째는 승려들의 노동에 관한 관념적인 의식전환을 말하고 있다. 또 셋째는 사원경제를 스스로 자립하지 못했을 때 승려들이 경제력 있는 신자나 세속인들에게 예속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에 ‘성스러워야할 도량은 무도장이 될 것이다’라고 하는 대목은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신 듯하다. 즉 전국의 사원은 관광수입에 의존하다보니 수도의 도량이 아니라 하나의 관광지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사찰 주위는 세속의 유흥장으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이 노동을 천대시 해옴으로써 경제적인 자립을 이룩하지 못하다 보니 자연히 관광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 이어서 선사는 ‘대각인은 삼계의 대몽(大夢)을 깨닫고 생사를 해탈해야 할 막중한 사명을 가진 불자가 세인에게 아부나 하고 천대를 받는 것은 경제적 자립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승려가 사리(私利)를 도모하고 비도덕적이며, 게으름에 빠져 있다고 한다면 자만심이 많은 세속인들은 불교를 흡혈적(吸血的) 종교요 사기적 종교며, 기생적(寄生的) 종교며,아편과 다를 것이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라고 승려들이 자각하여 노동에 참여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또 이어서 ‘내가 천하의 대세를 살펴보니 장차 불공(佛供), 시식(施食)에 의존해 살아가기 어려우며 부처님 당시처럼 걸식(乞食)할 수 없는 형편이니 스스로 호미와 팽이를 들고 자작자급(自作自給)하고 남에게 의지하지 말자’고 부르짖고 있다. 여기서 선사는 미래의 사원경제의 구조적 변화가 오리라고 하는 것을 예측하고 있으며,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스스로 팽이와 호미를 들고 노동에 참여하는 신성한 선농불교(禪農佛敎)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단순한 이론만이 아닌 실천으로 모범을 보여주었으니 그것이 유명한 화과원(華果院)의 설립과 만주의 대각교당의 설립이다. 선사는 망국(亡國)의 한을 품고 고국산천을 등지고 이국 땅에 살고있는 내 민족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이들을 위로키 위해 1927년 간도(間島)의 연길(延吉) 명월촌(明月村)과 영봉촌(寧鳳村)에 토지 70여 정보를 구입하여 대각교당(大覺敎堂)을 세우고 반농반선(半農半禪)하면서 독립군의 독립자금을 대어주기도 하였다. 특히 여기서는 고향의 농토를 떠난 농민들에게 정착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이뿐만 아니라 국내의 함양(咸陽) 백운산(白雲山)에 30여 정보의 토지를 마련하여 감나무·밤나무·사과나무 등 유실수 만여 그루를 심어서 화과원(華果院)이라고 이름지었다. 이 화과원이라고 한다면 중국 6조 혜농스님이 주석하시던 곳과 같은 이름이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선사의 뜻은 노동의 현장에서 철저한 수행을 주장하는 선농일치사상(禪農一致思想)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외에도 북청(北淸)에서 3년간 광산(鑛山)을 경영한 일도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선사가 주장하는 선농불교(禮農佛敎)의 사상은 한국사원경제의 구조적인 모순점을 해결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무엇보다도 사원경제를 스스로 자립해야 하겠다는 승려들의 정신적인 자각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호미와 팽이를 들고 일하면서 화두(話頭)와 씨름함으로써 솔선수범하였던 선구자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