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십 노승인 내게 조그만 수첩 하나가 있다. ‘행자교육行者敎育’이라는 제목의 이 수첩은 내가 행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틈틈이 메모해 놓은 손바닥만한 공책이다. 오계·십계의 계율에서부터 예배공덕, 청소공덕, 발원문, 건강, 공양, 출가수행, 주인의식까지 모두 스물아홉 가지를 적어 놓았다. 판단분별이 아니고 지혜의 마음을 배우길 바라면서 정리해 놓은 것이다.
얼마 전 누가 이 공책을 보더니 ‘행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배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옳은 얘기다. 인간의 성숙은 ‘발심發心’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발심에 무슨 행자와 일반인의 구별이 있겠는가. 가장 간절한 초발심을 낼 때가 행자시절 아닌가. 누구나 초발심 낼 때의 그 간절한 마음을 지속시키고 ‘하심’과 ‘인욕’을 평생 간직하고 산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출가한 이래 마흔 명쯤의 상좌를 두었으니, 아마도 내게 행자교육을 받은 자는 그보다 더 될 게다. 나는 그들에게 다음 세 가지를 먼저 가르쳤다.
첫째, 자신의 종교에 대한 확신을 가져라.
둘째, 행자 때 잘못해 버리면 갈 데가 없으니, 행실 바르게 하라.
셋째, 다섯 가지 은혜를 잊지 말라.
교육은 말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참된 의미를 가르쳐 체득,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늘 ‘~ 해라’ 할 때,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에 따르는 공덕을 설명해 납득하게 했다. 예를 들어, 예배의 공덕을 나는 이렇게 설명해 준다.
“예배는 자기 부처님인 자성自性에 대한 공경이다. 그리고 거만을 항복시키는 일이다. 거만보다 자신을 저해시키는 것은 없다. 거만함만 없다면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게 인간이다.
거만함을 버리지 못하면 초등학교 수준에 있는 것. 삿된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을 보라, 얼마나 거만한가. 또한 예배는 업장을 소멸하게 한다. 사람이 지혜롭지 못한 것은 수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어놓은 업장 때문 아닌가. 그리고 예배는 건강·장수하게 하며, 법계 장엄 중의 제일이다.”인식이 깊어지면 실천은 저절로 행해지는 법, 그러므로 교육은 깊이 인식되도록 이해를 열어 주는 일이다.
행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아마 ‘청소’일 것이다. 청소하는 일을 하찮게 여기거나 싫어하는 이들이 아마 청소가 주는 공덕을 알게 되면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주변을 쓸고 닦고 해 보라. 자심自心이 청정해질 것이다. 또한 타심他心도 청정해지니, 깨끗한 것을 보는 이들이 환희심을 내기 때문이다. 깨끗한 것을 보고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청소를 깨끗이 하면 제신諸神도 환희한다. 자신의 깊은 정신에서 환희를 느낀다는 뜻이다.
마음이 환희로 가득 차 보라. 그보다 행복한 일이 없을 것이다.
또 권속이 화합한다. 화합은 부처님도 부러워하는 바다. 화합한 집에서 만든 음식은 약이 된다.
또 청소는 근로부익勤勞富益, 부지런하게 하고 부자 되게 한다. 부지런하지 않고 부자 된 이는 없다.
내가 머물고 있는 절에선 항상 하루 세끼 공양 후면 청소하는 것을 규칙으로 하고 있다. 그 만큼 청소가 가지는 공덕이 지중함을 알기 때문이다.
은혜를 아는 사람의 인생은 즐겁고 자비행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그 은혜란 무엇인가. 내가 강조하는 다섯 가지 은혜는 부모의 은혜, 국가의 은혜, 동포의 은혜, 스승의 은혜, 그리고 자연의 은혜다. 하나하나 잘 살펴보라. 이 다섯 가지 가운데 하나만 빠져도 사람은 한시도 건재할 수 없다. 자신의 생명을 있게 한 일체 중생의 은혜를 알아서 그 은혜를 갚고자 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효孝이다. 이 다섯 가지 은혜를 철저히 안다면 살아있음이 감사하고 즐겁지 않을 수 없다. 감사한 마음은 일체 중생을 받들어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우러나게 한다.
자유보다 좋은 것이 ‘받들어 섬김’이다.
‘군산 은적사에 도인 스님이 있다’고 해 그 곳에 놀러 다니다가, 1958년에 은적사에서 전강 스님을 은사로 승려가 되었다. 대학에서 수의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 잠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사회생활을 했는데, 입산할 인연이었는지 도무지 세상살이가 재미 없었다. 그러다가 은적사에 들르면 그 때 한창 선방에 다니며 공부하고 있던 송담 스님, 능파 스님 등이 ‘이 선생 머리 깎아 주어야 하는데……’ 하며 반 농담을 했는데 얼마 후 실제상황이 되고 말았다.
전강 스님께 출가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잘 되었다’ 하시면서 바로 ‘판치생모板齒生毛’라는 화두를 내리셨다. ‘다른 화두엔 조사스님들의 해석이 붙는데 이것엔 붙질 못한다’ 하시면서. 공양주 노릇을 이레 동안 하니 스님께서 그만하라고 하셔서 염불 익히고 불공드리며 틈틈이 화두를 참구하면서 반 년 동안 행자시절을 보냈다. 남들은 행자시절에 고생도 많이 하고 사연도 많은 모양이지만, 나는 그저 특별한 일 없이 담연히 지냈다.
계를 받고 나중에 흥복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공부할 때 야단맞은 일이 하나 생각난다.
밤중에 화장실엘 가는데 그날따라 얼마나 깜깜하던지 화장실 곁 소나무 밑에 성냥을 그었다. 떨어져 있던 솔가지가 타면서 불을 밝혀 화장실엘 잘 다녀왔는데, 그만 그 불로 소나무 한 그루가 타버리고 말았다. 다음날 ‘누구 짓이냐’ 하시던 스승 앞에 서니 ‘내가 심어 놓은 나무에 불을 놓다니, 내가 그렇게 보기 싫더냐?’ 하시면서 사흘을 내리 불러 혼을 내시던 기억이 난다.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다. 그렇게 나무라시던 스승은 오래 전에 떠나셨고, 서른 안팎이던 내가 스승의 그 때 세수를 넘어선 세월에 와 있다.
출가자는 항상 무엇 때문에 삭발 염의하고 출가했는가를 돌아봐야 한다. 이를 잊고 살면 범부와 다를 바 없다. 또한 무소유 정신을 견지하고 있는가, 수행정진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출가자라는 이름으로 소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수행자는 지족知足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족할 줄 모른다면 이 또한 출가자로서 자격상실이다. 나는 한평생 이 세 가지를 항시 염두에 두고 살아왔고, 후학들에게 이를 일러 왔다.
“행자여, 먼저 사람 되고 승려 되라. 사람 되지 않은 것이 승려 되니 공부할수록 업장만 깊어간다. 걸레를 깨끗이 하고 청소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누가 보아도 온당한 사람이 되고나서 승려가 되자. 속히 속가에서 익힌 습에서 벗어나 궤도 수정하라. 아는 것 모르는 것 다 비우고 하심하라. 자아관념의 우물에서 벗어나라. 아집과 아상의 우물에서 벗어나야 신도 부처도 보이며, 융통성과 포용성과 총명함이 생긴다. 지혜로운 자는 마음을 비우고 육신을 억제하여 자신을 잘 지킨다. 자기만의 세계로 도망 가지 마라.” ‘행자교육’ 공책 스물네 번째 ‘행자여’에 적어놓은 내용이다.
부모를 버리고 출가한 자가 머리에 난 불을 끄듯 열심히 수행 정진하지 않으면 속가와 불가 양가에 죄인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출가자는 항상 간절했던 초발심을 잊지 말고 정진하기 바란다.□
취재·정리/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