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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강주 응각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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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2002년 08월 246호
경주.
천 년 고도의 정적을 깨뜨리는 자발없는 고층 아파트가 없지 않으나, 아직 이 도시는 평화로워 보인다. 하늘보다 땅에 더 자욱한 빗줄기, 불국사 앞에는 우중을 무릅쓴 단체 참배객들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었다. 강주 스님이요? 저어기 구내 매점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주욱 들어가면 됩니다. 매표소 직원이 이르는 대로 길을 따라 들어가다 말고, 석축과 돌계단 앞에 멈춰 선다.
빗발이 지어낸 푸른 기운이 어린 곳, 저 너머는 극락이라 했다. 안양문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에 연꽃잎을 새겨 넣은 석수는 어떤 상호였을까. 평생을 돌을 쪼아 손은 다 망가졌더라도, 얼굴만은 아마도 이지러진 바 없이 원만한 보살의 그것이었을 것이다. 천 년이 넘도록 안양에 가 닿고자 오르내리던 무수한 발길이 차단된 지금, 희미해진 문양에 고인 듯 만 듯한 빗물이 애잔하다. 절이 빗장을 걸어 중생들의 출입을 단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으나, 연중 무휴로 몰려드는 세인의 조심성 없는 발길은 절을 지치게 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 비 내리시는 도량은 어지간히 생기를 되찾은 듯해 보인다. 당우와 당우를 이어 놓는 행랑, 지금은 우산을 접은 관람객들이 오가고 있는 그 곳에서, 파랗게 머리 깎은 스님들이 지으셨을 안행을 머리 속으로 떠올려 보는 것도 이 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청복이다. 관음전의 나무 기둥이 떠받치는 세상, 나도 함께 장엄하리라. 주춧돌도 제 몸에 기둥을 따라 둥근 원을 수줍게 새기어 놓았다. 처마에서 떨어진 빗방울들이 젖은 땅에 지어 놓는 작고 동그란 흔적과도 같다. 온 누리에 내리시는 법우法雨, 소리도 없이 펼쳐 보이시는 장엄 염불이로군. 도량 한 귀퉁이에서 동그란 꽃잎을 무수히 달고 있는 여름꽃 수국도 그 빗방울의 자취로군.
대웅전 뒤의 무설전은 불국사의 당우 가운데서도 그 역사가 가장 오래 된 것이다. 문무왕은 이 곳에서 의상과 그의 제자인 오진에게 《화엄경》을 설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불국사 최초의 강당이다. 당호가 뜻하는 바, ‘말없는 설법’이란 무엇일까. 유마는 말했다. ‘둘이 아닌 데 든 법(入不二法)’이 무엇이겠습니까. 서른두 번째로 나선 문수사리보살이 답했다. 일체법에 대해 말하지 않고, 설하지 않고, 보여 주는 바 없고, 분별하지 않고, 모든 문답을 떠나는 것이 입불이법문입니다. 그리고 문수는 유마에게 말했다. 이제 거사님이 말할 차례입니다. 그러나 유마는 말이 없었다. 이에 문수는 감탄했다. 과연 옳습니다! 문자와 말과 설명,
그런 것이 일체 없는 것이 진짜 입불이入不二법문입니다. 원효는 이런 유마를 두고 “두구杜口 대사요, 목격目擊 장부가 아니고서야 누가 이 대승의 참뜻을 알겠는가”(<대승기신론소>) 하고 탄성을 질렀다. 사교입선 하기 전에 경을 읽되, 그것이 궁극으로 삼을 바는 “입은 닫은 채(杜口) 참지혜의 눈으로 보게 됨(目擊)”이다.
불국 강원의 비롯됨이 그러했거니와, 오늘 불국사 승가대학에서도 무설전의 옛 그늘 아래 학인들이 《화엄경》을 배운다. 오늘 설법하시는 분은 응각 스님, 한 달 전에 강주(학장) 소임을 맡고 이 곳으로 왔다.

돌계단 앞에서 왼쪽으로 비껴 보이는 범종각과 당우 서너 채, 당우 사이를 낮게 가로막은 돌담에는 담쟁이가 철에 맞게 무성하다. 끄트머리에 능소화가 곱게 피어 있는 그 돌담 뒤로 기역자 당우 한 채가 보인다. 불국 강당. 한자로 적힌 현판의 굵은 붓글씨는 스무 해도 더전에 이 곳에서 화엄산림을 펼치셨던 운기 스님이 손수 적으신 것이다. 응각 스님은 그 글씨가 새삼스럽다. 그 무렵 그는 바로 이 곳에서 운기 스님으로부터 《화엄경》을 배웠던 것이다. 그리고 전강을 내려 주셨으니, 대둔사에서 《화엄경》을 배우다가 이 곳으로 강석을 옮겨 온 스님을 따라온 뒤의 일이었다. 그 세월 얼핏 지나고, 이제 그가 운기 스님께 배우던 그 곳에서 후학들에게 《화엄경》을 가르치게 된 것이다.
“소임 맡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곧 방학입니다. 강당채를 새로 짓느라고 어수선해서 한 달쯤 앞당겨졌어요. 그저 학인들에게 제 자리를 지키라는 한 마디만 당부해 두었습니다.”다른 절에 비해 저자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이니, 학인들이 우선은 밖으로 나도는 일없이 자신을 단속하게 하려는 것일 터이나, 그 말을 새겨 듣자면 그렇게 녹록한 뜻이 아니다. 옥이라도 쪼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못한다 했다. 이곳의 원훈이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人不學) 도를 알지 못한다(不知道)”(《예기》 〈학기〉)라는 것인 만큼, 그 본분에 충실하면 네 해 과정 동안에 기본이 튼실해질 터이고, 수행자로서 지킬 것 지키고 버릴 것 버리는 본분에 충실하다면 이루지 못할 바 없을 터였다. 그리고 나로서는 교이반학敎而半學올시다.
운기 스님이 그에게 내린 전강게 중에 있는 말. 학인들을 제접하는 것이 그가 지킬 자리이기는 하나, 가르치는 일이란 그 절반이 자신에게는 배움이기도 한 것이다.
현재 불국사 강원 학인 수효는 23명, 이 가운데 대교반(화엄반)은 9명이다. 가을철 공부 기간이 남아 있다 하지만 팔십 화엄을 다 읽어 내기에는 부족할 듯하다. 많이 읽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나, 하루에 5장쯤 읽는다. 그렇게 해서 《화엄경》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십주, 십행, 십회향을 해마친 다음, 십지까지 해 보려 하지만 만만치는 않을 듯하다.
자신의 경우로 보더라도, 삼십 년 가까이 더듬고 있는 경전이다. 백양사에서 각성 스님 모시고 혜남, 통광, 혜권, 보광, 수진 스님 등과 함께 처음 화엄을 배우기 시작한 뒤로도, 해인사 강원 대교반을 거치고, 다시 대둔사 운기 스님 회상에서 혜남, 도형, 제선, 무착 스님 등과 함께 《화엄경》을 공부했었다.
해인사에서 사교반을 가르치고 학감 노릇을 좀 하다가 함안 관음사 주지를 맡았으나, 도무지 ‘신도 단련’ 하는 일은 서툴기만 하던 터에, 은해사에 종립 승가대학원이 신설된다는 소식을 듣고 입학 원서를 냈다. 그 때 그의 나이 이미 쉰이 넘었으니 대학원 학인 중 최연장자였다. 지원서를 낸 그에게 무비 원장 스님이 두어 가지를 다짐 받았다. 차를 버릴 수 있겠는가. 탈 것 버리고 제 자리를 지킬 수 있겠는지를 물은 것이다.
그리고 1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도반들과 화애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에 차도 버렸고, 최연소 도반에게는 아버지뻘 되는 나이도 잊고 3년 내내 입승을 보면서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3년을 다시 팔십 화엄을 읽고 나니, 비로소 “알 듯 말 듯해지더라” 했다.
그 기간 중에 깨친 것은 컴퓨터의 유용성에 대한 것도 있다. 해인사에서 학인들을 가르칠 때도 그것은 손 가까이 있었으나, 그저 책이나 열심히 읽으면 될 줄 알고 거들떠보지 않았으나, 대학원 학인 기간 중에 《벽암록》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책으로 묶어 낼 수 있었던 것도 컴퓨터 덕분이었던 것이다. 와 보니 이곳 학인들도 컴퓨터 쓰는 법을 익히고 있으니 다행한 일이었다.
컴퓨터가 실용성의 의미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이라면, 승가대 과정에서 기존 교과목 이외 그가 추가하고 싶은 것은 《유식》과 《구사론》이다. 그리고 《아함》 등 부처님의 육성에 가장 가까운 초기 경전을 접하게 하는 것도 기본 교육 과정인 학인 기간 동안에는 뜻있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대중을 외호하거나 포교 따위의 일이 중요한 것이기는 하다. 자신도 교도소 포교에 매진해 본 적도 있고, 큰절 교무 소임을 맡아 본 일도 있지만, 그 기간은 길지 못했다. 해방동이로서 산문에 든 지도 서른 해를 훌쩍 넘기게 된 지금, 돌이켜 보자니 그저 방을 지키고 앉아 책이나 보면서 지낸 세월이었다. 그러나, 그 방 안에서 내다보이는 이즈음의 산문 안 형편은 여러 가지로 걱정되는 바가 적지 않다. 먹고 입는 것에서부터 부처님이 이르시는 것과는 아주 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질이 풍요로워지고, 그런 만큼 스님 위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여기는 속인들이 어설프게 거드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수행인들이 그것에 휘둘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로서는 은사 지종 스님을 만나 백양사에서 비구계를 받기 전까지, 서너 해, 남보다 몇 곱은 더 긴 행자 시절을 거쳤다. 밥 짓는 솥 뒤로 구렁이가 스윽 지나가던 곳, 월정사는 유난히 뱀이 많던 곳이었다.
지난 밤 책을 읽다가 늦게 이룬 잠, 정신이 옳게 돌아오지 않은 채로 불을 지피다가 솥이 쩍 갈라졌다. 빈솥이었던 것이다. 가까스로 내쳐짐을 면하고 소달구지를 타고 진부장으로 가서 새 솥을 마련하니, 이제는 밥 잘 할 일만 남았구나, 신바람이 절로 났었다. 이 곳 아니면 내가 갈 곳 없을 터, 그런 마음을 이제는 찾아보기 쉽지 않게 되었다. 어느 때인가, 두 해 동안 애쓴 끝에 목판본 《화엄경》 한 질을 갖추고 기꺼워했던 일은, 굴러들어오기도 하고, 사서 볼 형편도 어렵지 않게 된 지금으로서는 후학들에게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일들, 어느 때 법주사에서 우룡 스님 모시고 《서장》을 읽을 때를 그는 떠올린다. 이즈음 강원에서는 책 읽는 소리를 듣기가 어렵다. 간경을 하되, 묵독을 할 뿐 소리 내어 글을 읽는 독송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룡 스님이 이르셨던 대로, 그 때는 참 탈진이 되도록 글을 읽었다. 그래야 잡념이 끼어드는 법이 없이 내용이 제대로 머리에 들어간다.
오늘의 학인들에게 다시 권하고 싶은 점이다. 사집 과정에서 배우는 《서장》, 《도서》, 《선요》, 《절요》는 그럴 수 있다. 《화엄경》과, 사교 과정의 《능엄경》, 《원각경》, 《금강경》, 《기신론》 따위의 경전까지 그리 하면 더욱 좋겠지만, 연구에 더 힘써야 할 내용이니 무리할 수는 없는 일이라 했다. 소리 내어 글을 읽는 공덕은 또 있다. 글 읽는 소리에 마구니가 달아나고 만다.
길을 걷는 자를 딴지 거는 갖가지 마장 가운데서도, 스님에게 가장 쉽지 않았던 것은 병마였다. 80년대 초에 크게 입은 교통 사고, 그리고, 은해사의 승가대학원에 갓 입학한 뒤에 그를 덮친 병마로 큰 수술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이제는 안심할 만큼은 되었다 하나 아직까지 먹는 일에서 썩 자유롭지는 않은 형편이라 하니 그 손길에서 아주 놓여 난 것은 아니다.
스님의 말이 높낮이가 심하지 않고, 그리고 차가운 기운은 없으나 표정에 큰 기복이 없는 것은 타고 난 성품이겠거니 했었다. 그러나, 다시 떠오르는 일이 기약되지 않는 아득한 깊이에 빠져 보았던 그로서는, 그래서 오온개공의 이치를 몸으로나마 근접해 보았던 이후로 깔고 앉게 된 밑자리일지도 모르겠다. 아팠던 것이 공부하는 사람으로서는 나쁘지 않았더라 했다.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지요. 지금은 돋보기 쓰는 일말고는 다 성합니다. 우리 몸뚱이가 너무 건장해도 마구니가 생겨요, 하며 그는 웃었다.

지난 유월 말에 불국사 강원은 교육원으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으면서 그 동안의 가인가 상태로 운영되던 시절을 접었다. 나 같은 사람이 와서 지나치게 조촐한 회상이 되지는 않을지, 하고 겸양을 보이시지만, 부임 직후에 있었던 그 일도 상서로운 것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산식만 남겨 두고 있는 종상 새 주지 스님이 도제 양성에 대한 의욕이 크신 것이 크게 미덥다. 이제 응각 스님은 그가 지난날에 큰스님들께 배워 익힌 바를 후학들에게 되돌려 줄 일만 남았다.
비가 아직 성이 덜 풀렸는지, 새벽녘 도량은 천둥과 번개 소리로 한바탕 시끄러웠다.
절집에 울려 퍼지는 목탁 소리는 도량석이나 공양 시간 알리는 것말고는 아는 바 없었던 객의 귀에 들리는 목탁 소리, 웬 목탁 소리인가 했더니, 학인 스님들이 강의에 앞서 올리는 상강례가 시작됨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어 반별로 학인 스님들이 흩어져 가고, 칠판을 앞에 두고 수업을 시작하는 강사 스님들 강의가 이어진다.
어여쁘다. 댓돌 위에는 흰 고무신들 줄 지어 반듯하게 벗어 놓였고, 우산을 접어 두되 우산 통에 들지 않고 벌로 놓인 것도 없다. 강당 앞에는 파초 여섯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이 몸은 파초와 같으니, 그 속에 단단한 것이 없음이로다.” 《유마경》에 적힌 말이다. 절간에 서 즐겨 파초를 심는 것은 단단히 지니어 갈 ‘나’란 도무지 없는 것임을 시시로 경책받기 위함이다. 그 생물을 심는 뜻은 그렇게 육중하나, 오늘 강당 앞에서는 도레미파솔라, 키대로 그렇게 명랑하게 심기어져 자라고 있었다.□


취재·글/김영옥, 사진/백종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