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겪어 보지 않고 어찌 인생을 말할 수 있겠는가. 배고픔과 절망, 공포, 그리고 그 많은 시체들…. 초등학교 삼학년 어린 나이에 육이오 동란이라는 전쟁을 체험했고, 그 혹독한 세월을 거치면서 나는 인생이라는 거친 항해에서 나침반 역할을 해 줄 스승이 절실했다. 영원히 흔들림 없는 확신을 심어 줄, 정확한 방향을 잡아 줄 스승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내 사정을 알고 있던, 지금은 미국에 있는 전강 스님의 제자 종달 법사가 ‘자네를 지도할 만한 스승은 사회엔 없다’며 입산을 권하는 것이다. ‘절간에 가면 스승이 있느냐’는 내 물음에 그는 ‘물론’이라고 답하며 내게 다음과 같은 다섯 분의 스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종이를 전해 주었다. 금오, 효봉, 운허, 동산, 설봉 스님의 이름이 보였다.
그날로 다섯 분에게 편지를 냈다. 출가 입산이 뭔지도 모르고, ‘찾아갈테니 제자로 받아주십사’ 하는, 지금 생각하면 건방지기 짝이 없는 편지였던 것이다. 아무 데서도 답장이 없던 차에 해인사에 주석하고 계시던 운허 스님께서 편지를 보내 주셨다. ‘지금은 역경譯經일 때문에 바쁘니 한가할 때 오면 좋겠다’는 친필로 쓰신 내용이었다. 기약도 없는 편지를 받고 망연해 있는데, 마침 출가한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범어사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 곳엔 당시 동산 스님과 설봉 스님이 주석하고 계셨다. ‘좋다, 간다’란 연락을 하고 금방 범어사로 갔으나, 친구는 마침 오대산으로 가고 없었다. 그렇게 나를 범어사로 부른 친구가 나와는 동향인 지금 서울 대각사 주지로 있는 흥교 스님이다.
지금으로부터 사십 년 전, 그렇게 해서 나는 프라스틱 바리때 하나 남기며 철저히 한평생을 무소유로 일관하셨던 스승과 해후했다. 구김살없이 지성과 야성을 함께 드러냈던, 내 일생에 다시는 만나기 어려운 스승 설봉 스님을 친견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스님이 아니었으면 극보수와 극진보를 함께 지니고 있던 나를 어느 누구도 통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스승은 ‘원시原始와 순간’을 전혀 격의없이 넘나들면서 무애자재함 바로 그것으로 한평생을 사신 분이다.
무엇 하나 가릴 것 없는 순수한 그 모습으로 적나라하게 있는 그대로를 다 보이셨던 그것이 스승이 내게 보여 준 모든 것이었다. 뺄 것 빼고 가릴 것 가린 그런 위엄을 내세운 모습만 보여 준 스승이 아니었다. 나는 내외경전에 거친 바 없었으며, 모든 것에서 무애자재했던 내 스승의 모습에서 출가자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무엇으로,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를 보았고 확립했다.
입산하고 보름 정도 되었을 때다. 점심공양을 준비하기 위해 광주리와 낫을 들고 미나리밭으로 내려가는데, 계명암에서 내려오신 우리 스님께서 대중 스님들에게 둘러싸여 무슨 얘긴가를 하고 계셨다.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부산 선암사에 계신 석암 스님에게 가려고 하는데 대중들이 서로 미루고서 따라 나서질 않는 것이었다. 내가 끼어들어 ‘제가 모시고 갔다 올까요?’ 했더니, 재무스님께서 돈 200원을 주며 다녀오라고 했다. 들고 있던 광주리와 낫을 내던지고 화가 나셔서 이미 혼자 저만치 걸어가고 계신 스님을 쫓아 밖으로 나가니 스님께서 《선문촬요》 번역원고가 들어 있는 당신의 걸망을 건네주시며, ‘앞에 가라’고 하셨다.
그 이후로 스님께선 어딜 가든지 나를 대여섯 걸음 앞에서 걸어가게 했다. 그러곤 산문을 들고 날 때의 모든 행동거지를 보시고 지적을 하셨으니, 제자를 철저히 가르치시는 스님의 각별한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지나고 보니 그것은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아침 아홉시쯤 범어사에서 나와 동네까지 버스 타고 내려 전차 타고 선암사가 있던 서면 정류장에 내린 것이 오후 세시경이었다. 같은 부산에서 여섯 시간이나 걸린 것이다. 팔송정까지 모시고 나오며 술을 다섯 번이나 사드렸기 때문이다. 왜 대중스님들이 우리 스님을 따라 나서지 않으려고 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마, 술에 성현聖賢이 있다면 바로 우리 스님일 것이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가 물 흐르듯 거침없이 나왔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걸 ‘주워 담았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전날 술이 좀 과하셨어도 목욕하고 나오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은 도화 빛이었던 분이다. 팔순의 연세에도 술을 잡숫고 하신 말씀을 정확히 기억하셨고 술이 깨시고 난 뒤에도 말을 바꾸시는 법이 없었으니, 술을 드셨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곡차였다.
그날도 그랬다. 오후 세시에 서면에 있는 음식점에 들어가 설렁탕 한 그릇을 시키고 40원하는 ‘낙동강’ 술 한 병을 받아드렸다. 그랬더니 스님께선 낙동강과 함께 훌훌 설렁탕을 드시더니, ‘옛다, 너 먹어라’ 하시며 남은 국물을 밀어 주셨다. 배고프던 차에 술 섞인 설렁탕 국물을 얼마나 맛있게 싹싹 훑어 먹었는지 지금도 그 꿀처럼 달던 그 맛을 잊지 못한다. 그런데 이미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잠이 든 스님께선 일어날 생각을 안 하시는 것 이었다. 그래서 걸망은 앞으로 안고 스님은 업고 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 가파른 길을 걸었다. 열 발자국쯤 가다 앉아 숨을 고르고 다시 스님을 업고 걸어 선암사에 도착하니 새벽 한 시였다.
스님을 가까이 모시다보면 무서운 게 많았다. 목욕을 시켜드리다 보면 엉덩이가 썩어 있거나 곪아터져 있곤 했다. 몇날 며칠을 좌선한 채 앉아 있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스님께 문안드리며 ‘제가 스님 상좌 되려고 편지 올렸던 아무갭니다’ 했더니, 스님께서 ‘그러면 너 범어사로 올라가라. 내, 닷새 여유 줄테니 오든지 말든지 그건 네가 결정해라’ 하셨다. 범어사로 돌아와 닷새가 지나기를 기다리는데 하루가 삼년 같았다. 드디어 닷새째 되던 날 선암사로 스님을 찾아뵈려고 하는데, 대중스님네들이 다 말렸다. ‘스님 상좌 되려고 했던 사람들이 얻어맞고 다 쫓겨났으니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갔다. 그리고 평생 딱 둘 두었던 스님의 마지막 상좌가 되어 스님을 따라다니느라 강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 채 스님을 시중들고, 그 분이 지닌 모든 것을 존경했고 가르침을 마음에 담았다. 스님께서 내렸던 매 또한 많이 맞았다. 매를 맞는 게 법이고 도리라고 생각했다.
범어사로 다시 돌아와 스님을 모시고 살던 행자시절, 스님께 들었던 가장 간절한 법문은 ‘인정이 덕이라’는 말씀이었다. 스님은 가끔 ‘혜민아’ 하고 날 부르셨다. 내가 ‘예’하고 대답하면 다른 말씀 없이 ‘인정이 덕이니라’ 하시곤 했다. 스님의 그 말씀은 만고의 진리였다. 수행자는 마음이 풍요로워야 한다. 마음에 넓은 호수도, 정원도, 숲도 있어야 한다. 마음이 사막이 되어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한다면 자비문중이라 할 수 있으며 중생제도를 할 수 있겠는가.
열아홉에 행정고시에 합격했을 만큼 머리가 뛰어나셨던 내 스승은, 일제시절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셔서 한평생 맡은 소임이라곤 산감 노릇 딱 사흘 한 것 말고 걸림없이 살다 가신 분이다. 스님께서 번역해 놓으신 《선문염송》 《벽암록》 《선문촬요》를 보면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거침이 없으며, 부처님 말씀처럼 간결하고 쉽다. 평評과 송頌을 다시 한 《무문평송》은 우리 스님이 남기신 업적으로 꼽힌다. 선방수좌들에게 다시 돌려주고 싶은 책들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누구인가. 다리가 없고 눈이 없고 귀가 없는 사람인가. 아니다. 눈이 안 보인다고 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 못할 것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스승이 없으면 모든 것을 잃어 버린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잃은 육신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러므로 일곱 달간의 내 행자시절은 내가 걸어가야 할 인생의 방향을 정확히 잡아 준 스승을 모셨던, 내 생애의 가장 값진 세월이었다 할 것이다.□
취재·정리/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