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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이 악보를 들고 나타날 것 같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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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담는 오솔길 - 진명 2002년 07월 245호
생방송을 시작하고 삼년이 되던 해 7월이었다. 매일 아침 9시 5분이 되면 어김없이 “안녕 하십니까?”로 시작해야 하는 ‘차 한 잔의 선율’ 시간을 잠시 마음 뒤로 밀어두고 단신으로 길을 떠났었다.
그 이유는 서양 고전 음악을 소개하는 프로를 진행하는 사람이 막연한 분위기로 매일 주어진 시간을 메꾸어 간다는 것이 가끔은 뜬구름을 잡는 기분이 들어서 썩 마음이 유쾌하지 않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궁리를 한 끝에 짧은 시간이나마 여름 휴가를 꼭 필요한 시간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 정한 여행 타이틀이지만 ‘음악여행’이라고 주제를 정하고 길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니까 음악홀이나 음악가들의 고장을 찾아 조금이나마 느껴 보겠다는 야무진 생각에서였다.
처음 찾은 나라가 영국이었다. 낮에는 그 어딘가를 찾아서 길을 떠나고 밤에는 좋은 음악회장을 찾았었다. 물론 아주 세계적인 뮤지션들의 연주는 반환되는 표를 구하거나 아슬아슬하게 두어자리 남은 좌석을 예약하거나 아니면 입석을 사서 연주를 관람하기도 했었다. 유럽은 대부분 밤 8시가 넘어야 시작되는 음악회는 10시가 넘어야 끝나지만, 밤 11시가 되어도 해가 지지 않는 밤의 이색문화를 엿볼 수도 있었다. 아마 영국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려서 “아! 정말 박물관이라는 곳이 이런 곳이구나” 하는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대영 박물관이 아닐까 싶다. 박물관만을 찾아 여행하는 사람은 며칠씩 가까운 숙소에 여장을 풀고 박물관을 찾아 박물관 내부 지도를 들고 꼼꼼하게 나라별로 관람을 하거나 주제별로 관람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무엇보다 순수한 자기 나라의 지난 역사 속에서 발생된 유물이 아닌, 식민지에서 탈취하거나 발굴이라는 미명하에 힘없는 나라 사람들의 문화유산을 뺏아온 물건에 대해서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단지 부유한 나라 영국 런던에서 내가 찾은 대영 박물관에서 잠시 부러운 마음이 있었던 것은 타국이나 자국의 문화유산을 소장하는 관리방법이나 기술에 대해서였을 뿐이었다. 1795년에 개관한 대영 박물관에는 전시실마다 로제타석과 람세스 3세의 거대한 두상,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미이라, 파르테논 신전의 박공 조각 등 고대 이집트의 유물과 그리스, 로마의 조각을 전시하고 있었고, 원고나 친필본을 소장한 Manuscript Salon에는 작곡가와 문인들의 육필원고, 마그나 카르타 같은 문서며 비틀즈의 메모 등이 소장되어 있었다.
대영 박물관에서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지만 다음 관람할 곳이 The British library였기 때문에 그렇게 아쉽지는 않았다. 그 곳은 우선 인파가 붐비지 않아서 조용하게 관람을 할 수 있었던 것과 비디오와 오디오가 가능한 룸에서 만난 금강경은(물론 한국 것은 아니었고 중국에서 기증된 것이었지만) 잠시 마음을 뺏기에 충분했다. 컴퓨터 모니터에서 두루마리 《금강경》을 손가락으로 터치하면서 펴면 화면으로 금강경을 생생하게 펴 볼 수 있고 오디오로 《금강경》 장면 장면 독송도 들을 수 있었다. 두루마리를 펴고 말아가면서 볼 수도 있고, 책으로 된 《금강경》을 펴고 첫 페이지 변상도에서 자세하게 보고 싶은 어떤 부분에서는 크게 확대해서 볼 수도 있고,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듯이 그렇게 넘겨가며 경을 읽을 수도 있었다. 아직 우리 나라 어느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 도서관에서 내 발길을 오래 붙들었던 것은 바흐의 친필 악보였다. 물론 아버지와 함께 어린 모차르트가 영국을 여행했을 때 남겼던 악보도 생생하게 소장되어 있었고 베토벤의 악보도 있었지만 너무나 단정하게 쓰여진 바흐의 친필악보가 시간을 훌쩍 넘어서 바흐를 만나는 착각을 하게 했다. 온 몸이 서늘하게 전율이 느껴졌다. 아마 그런 것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이나 유품들의 매력이 아닐까 싶었다.
대영 박물관에서 너무 많은 전시품을 관람하고 난 후인지라 다른 어떤 박물관에도 관심이 없었지만 프랑스로 건너와서는 마음이 바뀌었다. 예술의 도시 파리를 여행하면서 박물관과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 소장된 미술관을 관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페라 극장을 찾는 일정을 잠시 미루고 루브르 박물관(Musee National du Louvre)을 찾았다. 파리를 연상할 때면 그 기본적인 상징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창작활동을 업으로 삼는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에게는 일종의 향수마저 느끼게 하는 곳이다. 이 박물관은 영국의 대영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으로 손꼽힌다. 건물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미술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박물관으로 처음 문을 연 것은 1793년이었지만, 미테랑 대통령이 1987년에 시작한 Grand Louvre 프로젝트에 따라 나폴레옹 광장에 유리 피라미드를 설치하면서 세계 최고의 박물관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사용되는 유리 피라미드는 고전 미술과 현대 미술 사이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무엇보다도 중,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에서 배웠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라는 작품일 것이다. 그 박물관을 찾는 외국인들이 다른 그림이나 유물보다는 모나리자를 먼저 관람하기 위해서 찾기 때문에 박물관 내부 곳곳에는 모나리자가 있는 곳을 알려 주는 그림과 화살표가 길을 잘 제시하고 있었다.
그 유명세만큼이나 ‘모나리자’ 그림은 다른 작품과는 달리 방탄 유리관 안에 보관되고 있었다.
단지 유리관을 통해서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는 그 그림 앞에서 그 수많은 방문객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인파에 밀려 잠시 멍했던 생각을 접고 내가 관심있었던 그림과 조각품들을 관람하고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 오랑주리 미술관(Museede l’Orangerie)에는 프랑스 인상파와 20세기 초반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르느와르, 피카소, 수띤느, 모딜리아니 등의 대표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한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시간과 경비를 투자해서 그 미술관을 찾은 여행자의 피로를 말끔히 풀어 주기에 충분했다.
유럽은 나라마다 미술관과 박물관, 그리고 예술가들이 태어난 집이나 생존시에 작품활동을 왕성하게 했던 집과 유품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그 나라 사람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그렇게 보여 주었다. 나를 여행하게 했던 시간에 감사하면서 밤 열차를 타고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마음에는 더 큰 설렘이 가득했다. 교육의 도시 본(Bonn)은 베토벤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인 만큼 베토벤을 사랑하는 나에게는 베토벤 하우스를 방문하는 일은 어느 큰 박물관을 찾는 일보다도 더 의미있는 일이었다. 본 역에 내려 걸어서 찾아가도 될 만한 거리에 베토벤 하우스가 위치해 있었다. 뮌스터 광장에서 시청이 있는 마르크트 광장을 지나 본가세로 들어가면 오른 쪽, 큰길쪽에서 네 번째 집이 1770년 12월 16일 베토벤이 태어난 생가가 있었다. 베토벤 일가가 살았던 집들은 모두 2차 대전 때 파괴되었지만, 1889년 베토벤 생가가 철거 위기에 처했을 때 12명의 본 시민이 베토벤하우스협회를 설립하고 앞 뒤 건물을 사서 연결하고 기념관을 세웠다고 했다. 베토벤의 출생과 생활환경, 삶과 작곡 활동의 연대기들을 만날 수 있었고 특별 전시실에서는 악보 필사본, 초판, 초상화들과 목관악기를 전시하고 있었다.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전시실 방을 꼼꼼히 관람하던 중 온 몸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베토벤이 생존시에 쓰던 피아노와 안경, 그리고 만년필이 너무 생생하게 내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금방이라도 베토벤이 악보를 들고 나타날 것 같은 기분. 그 이상은 말이 필요없었다. 그저 느낄 뿐. 베토벤 심포니 ‘운명’의 선율이 장중하게 그 전시실을 가득 채우는 듯한 느낌. 독일에서 더 이상 어떤 것을 만나지 않아도 너무나 충만함이 가슴에 가득 차 올랐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베토벤 하우스를 생각하면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어 마음에 어떤 선율이 가득 찬다. 칠월의 짓푸르름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