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경절의 임제가풍 (2)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간화선看話禪 사상 - 인경 2002년 07월 245호
대혜는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는’ ‘사량과 분별을 단숨에 잘라내는’ 임제의 가풍을 경절처徑截處, 경절득력처徑截得力處, 경절리회徑截理會라는 말로 표현한다.

처음의 뜻을 잊고 이근총명利根聰明으로 방해를 받아, 얻고자 하는 마음(有所得心)이 앞서, 고인이 지적한 ‘곧장 끊어 들어감을 요청하는 자리(直截徑要處)’에서 일도양단一刀兩斷 하여 곧장 쉬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이러한 병은 뛰어난 사대부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수행 한 납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곧바로 심지心地를 경절徑截하여 탁 트이고자(豁如) 한다면, 능하고 능하지 못함,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함, 같고 같지 않음, 다르고 다르지 않음을 헤아리고 사량하는 바를 몽땅 저쪽세계로 쓸어 버리십시오.

만약 경절하여 그 이치를 알고자(徑截理會) 한다면 반드시 한 생각을 일시에 타파하여야 비로소 생사를 요달할 수 있고, 깨달음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그대로 둔 채 타파되기를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경절徑截이란 돌아가는 길이 아니요, 곧장 가로질러 간다는 뜻이요, 경절徑截의 자리(處)란 바로 선문답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활달한 삶의 현장을 의미한다. 이 때 돌아가는 길은 영리함에서 생겨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고, 반대로 분별에 의해서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에서 강조되는 경절에는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긍정적으로는 바로 심지心地, 혹은 경절처徑截處를 드러내고, 부정적으로는 사량과 분별이 배제된다.
이것은 마치 인도의 중관사상中觀思想을 계승한 중국 삼론종三論宗의 모토인 ‘삿된 것은 파하고 바른 것은 드러낸다’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기치를 다시 보는 듯하다. 일반적으로 용수의 중관사상은 부정주의 혹은 비판철학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부정의 대상은 참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데도 사량과 분별에 의해서 구성된, 신(梵)이나 자아(我)와 같은 개념들이다.
파사破邪의 영역이 당시 인도의 불교계에서 형이상학적인 실체를 인정하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항유설恒有說을 비판하고 부정한다면, 현정顯正은 바로 부처님의 근본적인 연기공緣起空을 드러냄을 가리킨다. 이런 비판철학은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을 완성시킨 길장吉藏에 의해서 계승되었는데, 그는 《삼론현의三論玄義》에서 용수의 《중론中論》, 《백론百論》, 《십이문론十二門論》이라는 삼론三論의 본질을 파사현정破邪顯正으로 규정하고, 파사破邪의 대상으로서 외도의 사견이나 불교내의 소승적인 견해를 비판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대혜의 간화선도 일종의 파사현정의 정신이 개입되어 있다. 용수나 길장의 파사현정은 대혜에게는 단전직지單傳直指의 가풍, 보다 구체화된 경절처徑截處에서 구현된다. ‘곧장 드러내고, 한 칼에 양단한다’는 대혜의 비판정신은 용수나 길장만큼이나 격렬하다. 진리를 곧장 드러냄(顯正)은 곧 사량분별을 일도양단함(破邪)으로써 실현되기 때문에, 이런 격렬한 가풍이 밖으로 표출되면, 매우 엄격하고 신랄한 비판활동이 된다. 대혜의 경우 《서장》이나 《보설》 그리고 《법어》에서 한결같이 강조한 이런 파사현정의 활동은 불교계 내부로 돌아서면 잘못된 수행관으로써 묵조선默照禪을 향하게 되었고, 밖으로는 사대부들의 총명이근聰明利根을 향하였다는 것이다.
송대 불교계의 특징은 폭이 넓어진 과거시험을 통해서 등장한 사대부들과의 교류라고 할 수 있다. 당대唐代와 비교하여 송대宋代의 과거제도는 일반인들에게까지 확대 실시됨으로써, 자아의식을 가진 많은 지식인들을 배출하였다. 대혜는 150명 이상의 사대부들과 교류한 것으로 집계되는데, 이것은 대혜의 간화선이 바로 사대부들과의 관계 속에서 확립되었다는 반증으로 보여진다. 대혜는 당시 지식인이었던 사대부의 병폐를 자주 지적하였다. 그것은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지식인들이 흔히 그렇듯이 첫째는 총명이근에 의한 사량분별로 기준을 삼는 버릇이다. 둘째는 목표의식이 강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깨달음도 마찬가지로 실체화시켜서 기다리는 마음이다. 셋째는 수행에 대한 결정적인 믿음과 의지가 결여되어 있고, 넷째는 경전이나 조사의 말씀을 인증引證으로 삼아 선문답을 흉내낸다는 점이고, 다섯째는 수행에 있어서도 과거시험처럼, 일정한 기간에 결판을 보려는 속효심速效心을 낸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러한 지식인의 병폐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마음을 어떤 형태로 대상화시키는 헐떡임(掉擧)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묵조선默照禪은 바로 이런 마음의 들썩거림을 단지 ‘쉬어가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대혜는 이러한 사대부의 병통을 제거하는 데 묵조선으로는 불가능하고 화두話頭에 의한 경절문徑截門이야말로 효과적인 처방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근래에 일종의 삿된 스승들은 묵조선默照禪을 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루종일 이 일을 상관말고 쉬고 또 쉬라고 가르칩니다. 왕왕 사대부들 가운데 총명이근聰明利根에 이끌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다가, 잠깐 삿된 스승들의 ‘정좌靜坐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힘이 덜리는 것을 보면, 곧 옳다고 여겨 다시금 묘한 깨달음을 찾지 않고, 오직 묵조하는 것만을 최상의 법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저는 구업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러한 병폐를 구하려고 애썼습니다. 이제 묵조선默照禪이 잘못된 줄을 아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의정疑情을 타파하지 못한 곳을 향하여 한결같이 참구하되, 행주좌와行住坐臥에서 이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놓지 마십시오.

대혜의 묵조선에 대한 엄격한 비판과 사대부들에 대한 경책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묵조선자들은 사대부들의 헐떡임(掉擧)에 대해서 ‘다만 쉬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대혜에 의하면 그것은 결코 잘 쉴 수가 없고, 반대로 혼침 속에 빠져 버린다고 말한다. 쉰다는 것은 억압이거나 혼침이기 때문에, 그 곳에는 통찰이 결여되어 있어, 진실한 의미에서 쉬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올바른 치유의 길이 아니다. 대혜는 이런 오류에 빠진 이들을 어둠속에 갇혀 있다는 의미로 ‘칠통배漆桶輩’라고 부르기도 하고, 망상에 사로잡혀서 ‘귀신굴’에 빠졌다고도 말한다. 좌선을 하다가 칠통에 빠진 것은 혼침이요, 귀신굴에 잡혀 있는 것은 망상에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대혜는 ‘혼침昏沈과 도거掉擧에 떨어지지 않고’, 행주좌와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드는 일이라고 가르친다. 총명이근을 믿고 사량분별로 접근하는 사대부들의 병폐를 고치는 일은 고요하게 앉는 일(靜坐)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지혜가 결여된 정좌로는 마음의 들썩거림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없다. 문제의 핵심은 그 들썩거림의 본질을 행주좌와의 일상 생활에서 깨닫는 일이 중요할 뿐이다. 바로 이 같은 깨달음의 길이 ‘곧장 끊어 들어가는’ 경절처徑截處인 것이다.
그러나 사량분별이 습관화된 지식인들에게는 곧장 끊어 들어가는 경절의 자리는 쉽게 경험 되지 않는다. 간화선은 실존적 삶의 무게가 만들어내는 긴장을 견딜 수 있을 정신적인 자기 결단과 자기 모순에 직면하는 용기를 요구한다. 말하자면 화두는 삶의 갈등과 모순을 정면으로 부딪히는 경절처徑截處로 인도하는 제이第二의 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묵조선은 다만 쉬라고만 하는데, 이런 수행론은 사량분별하는 지식인의 습기를 근본적으로 혁파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혜의 간화선은 곧 사대부를 위한 방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혜의 입장에서 보면, 묵조선默照禪이란 어쩔 수 없는 삶의 문제에 대해서 정면으로 돌파하지 못하고, 돌아가거나 아니면 깨달음을 기다리는 길이다. 그러나 간화선看話禪은 곧장 자신의 심연으로 가로질러 가는 경절의 방식에 철저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