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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세월의 퇴적이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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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원택 2002년 07월 245호
하지가 지나 삼복의 더위가 성큼 다가오고 있는 녹음이 짙푸른 계절에 드디어 해인사 박물관이 개원된다는 소식을 듣고 만감이 교차하였다. 이제사 박물관을 개관하지만 그 박물관을 열기까지 20여 년 가까운 세월의 퇴적이 있었기에 나에게는 더 감회로운지도 모르겠다.
1980년대 초였는가 보다. 하루는 백련암으로 자운 노스님께서 오셨다. 나의 은사이신 성철스님과의 인연은 세상이 다 아는 것이겠지만, 일찍이 젊은 나이에 금강산 마하연에서 처음 만나 도반이 된 후 평생 지기知己로 탁마하고 의지가 되어왔다. 특히 해인사가 총림으로 지정된 1965년, 그 초대 방장 스님으로 자운 노스님께서 성철 스님을 강력히 추천하신 일은 산문에서도 유명한 일이다.
자운 노스님은 “방장 스님이 이제 조계종 종정 스님이 되셨으니 내가 부탁이 하나 있소.
내가 지금 60살이면 직접 나서겠는데 70이 넘어가니 이제 나도 겁도 나고 힘도 없소. 그러니 스님이 나서서 이 일을 해줘야겠소!”라고 말문을 여셨다. 성철스님께서는 그렇게 가까운 도반이 오셔서 느닷없이 “부탁이 하나 있는데, 그 일을 스님이 들어줘야 한다.”고 하시니 무슨 일인가 의아해 하시며 “아니! 자운 스님이 나에게 못할 말이 뭐 있는데 뜸을 들이오. 부탁이 있다면 얼른 말씀해 보소.” 하시니 자운 노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럼 내 뜻을 말하리다. 서울 봉은사의 영암 스님하고도 의논해 봤는데, 우리 해인사에도 천안 각원사와 같은 대불大佛을 한 분 모십시다. 해인사 일주문 앞에서부터 옛날에는 여관, 음식점, 다방, 민가들이 촘촘히 들어서 절 입구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 모든 것이 정리되어 현재의 신부락 자리로 이동해 갔어요. 그런데 유독 국민학교만 이전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으니 눈에 영 설어요. 그러니 종정 스님이 나서서 국민학교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대불을 지읍시다. 대불을 모셔놓으면 해인사 팔만대장경 판전과 더불어 신심있는 도량이 될 것이라요. 내가 60이면 지금 당장 나 혼자라도 나서겠는데 나이가 70이니 내가 아닌 종정 스님이 나서야 하겠소.” 그 말씀을 한참 듣고 계시던 성철스님은 “나는 자운 스님이 아시다시피 평생 불사라고는 모르고 살았으니, 자운 스님이 불사를 하셔야겠구만요. 나이 핑계 대지 말고 자운 스님이 나서시오. 나도 저 국민학교를 어디로 옮기기는 옮겨야겠다고 생각한 지는 오랜데, 이제 드디어 자운 스님이 그 말씀을 하시네요. 주지 불러 자운 스님의 뜻을 전할 테니 어쨌든지 국민학교를 옮겨놓고 난 후 불사를 논의합시다.”고 하셨다. 그 무렵 해인사 주지스님은 명진 스님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성철 스님께서 주지를 불러 “자운·영암 스님이 국민학교를 옮기고 그 자리에 대불을 모시고 싶어하시니 국민학교를 다른 곳으로 한 번 옮겨 보도록 하지!” 하시는 말씀을 내렸다.
땅은 해인사 땅이지만 무상으로 임대한 지 40년이 넘는 초등학교를 옮겨가게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명진 스님 일타 스님을 거쳐 1986년 초에 법전 스님께서 해인사 제18대 주지로 취임했다. 이후 해인초등학교 이전을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했다. 1988년에 당시 초등학교 건물 이전비용 일부를 부담하고 현재 신부락의 초등학교 자리를 무상 임대하는 조건으로 드디어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학교의 이전은 처음 자운 스님의 말씀이 계시고 난 후 6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학교가 옮겨가게 되니 대불을 모시는 불사가 바로 시작되는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불사 자금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히 불사는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더욱이 해인초등학교가 옮겨간 그 자리에 무슨 불사를 할 것인가? 꼭 대불을 모실 것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불사를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논의가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되었다. 성철 스님께서 “해인사 큰절은 수행공간으로 하고 초등학교 자리는 신행공간으로 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결제 중에는 신도들은 수행공간 안으로는 일절 발길을 끊고 신행공간에서 마음껏 신심을 내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국립공원이다 뭐다 해서 사람들은 많이 오고, 수행공간 은 점점 오염되고 있으니 수도인들에게는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수행공간이 필요한기라.”라고 강조하시게 되었다.
법전 스님이 주지를 하시면서 사내에 낡은 당우들을 재건하는 불사들이 시작되어 다른 불사에는 여력이 없었다. 법전 스님의 첫 임기에 초등학교를 이전 완료하고, 궁현당을 새로 넓혀짓고 강사스님들의 연구실인 적묵당을 지었다. 1990년 2월에 법전 스님께서 주지를 재임하면서 내가 해인사 총무국장으로 가게 되었다. 성철 스님이 나를 불러 당부하시길 “영암 스님이나 자운 스님은 해인사 주지 소임을 살면서 절대로 사중에 폐를 끼치지 않으셨다. 그 어른들을 다 본받지는 못할망정 명색이 내 상좌라면서 사중에 누를 끼쳐서야 되겠느냐? 자운 스님 부탁이 있었듯이 해인초등학교를 신행공간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해봐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 자신도 은사스님 시봉만 하다가 해인사의 큰살림을 맡으니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관음전 중건불사, 구광루 불사, 대적광전 불사가 이어지는 와중에서 해인초등학교 부지 사용에 대한 불사는 경제력 부족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자꾸만 뒤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하루는 성철 스님께서 찾으신다기에 백련암으로 올라가니 “큰절 불사만 하면 뭐 하는기라! 해인초등학교 불사는 하는기라, 안 하는기라!” 하시면서 호통치셨다. 그래서 나는 주지스님께 “해인초등학교 자리를 어떻게 유용하게 쓸지를 산중임회에서 결정을 합시더. 2002년이 되면 해인사 창건 1200주년이 되는 해이니 흔히 5개년계획, 10개년계획 하듯이 우리도 2002년을 맞이하는 계획을 세워 추진했으면 합니다. 해인사 사세로 보아서 힘은 들겠지만 꼭 이룰 수 있을 것입니더.”라고 말씀드렸더니 주지 스님은 “그래도 불사란 얼마의 시줏돈을 가지고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조금 더 기다려보자.”라고 하셨다.
그러다가 자운 큰스님께서 1992년 2월에 열반에 드셨다. 해인초등학교 자리에 대불모시기를 그렇게 원하셨던 스님의 뜻은 초등학교를 옮긴 것 이외에는 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성철 스님께 불려가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산중임회에서 해인초등학교 자리를 성철 스님 뜻대로 신행공간으로 활용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인가를 다시 논의한 결과 그 넓은 땅에 대불만 모시기에는 너무 아까우니 만불전도 짓고 요사채도 지어서 해인사와는 별개의 공간으로 확보하자는 것으로 산중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그 계획도를 성균관대학교 이상해 교수님께 연구케 하여 설계를 마련토록 부탁하였다. 해인초등학교 불사 계획안을 가지고 일여년에 걸쳐 측량하고 실측하여 조감도와 설계도를 완성한 후 임회에 부의하게 되었다. 2차까지 임회에서 협의를 마치고 지적된 점을 고쳐서 다음 임회에서 확정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성철 스님께서도 1993년 11월 초순에 열반에 드시고 동년 12월 말에 지관 스님이 해인사 주지로 오시게 되었다.
스님께서는 해인초등학교 불사에 앞서 일주문에서 금선암 가는 길목에 성보박물관 건립을 추진하시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지하 1층, 지상 2층의 연건평 600평의 박물관을 세우기로 하고 ‘문화재현상변경허가’ 신청을 하였다. 그러나 1996년 5월 지관 스님께서는 성보박물관 건립에 필요한 예산 20여 억원을 확보해 놓은 채로 주지를 사임하시게 되어 더 이상 추진되지 못하였다. 이어 성법 스님을 거쳐 1996년 11월에 보광 스님이 제22대 해인사 주지로 취임하게 되었다. 지관 스님께서 추진하셨던 20여 억원의 예산까지 확보된 성보박물관 건립이 임회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세워지지도 않은 박물관장에 임명되어 건립추진의 소임을 맡게 된 것이다.
“주지 스님! 전 종정 스님이신 성철 스님께서나 자운 스님께서 해인초등학교 자리에 해인사 신행공간을 만들 것을 그렇게 바라셨는데, 박물관을 좁은 해인사 일주문 주변에 지을 것이 아니라 해인초등학교 자리로 나갑시다. 거기에 새로운 해인사 신행공간과 문화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어른스님들의 뜻일 것입니다.”고 보광 주지스님께 말씀드렸더니 “기왕의 안案도 있었으니 해인초등학교 자리에 박물관을 짓고 우리 시대에 제2의 해인사를 창건해 봅시다.” 하며 흔연해 하셨다. 거기서 힘을 얻어 성균관대 건축과 이상해 교수님을 찾아 뵙고 박물관 건립계획과 해인초등학교 불사에 관한 의견을 나누니 김석철 교수님을 소개해 주셨다.
“원택 스님! 제가 현대건축가라서 하는 말이라고 치부하시면 그만이지만 해인초등학교 불사는 현대식으로, 21세기를 지향하는 모습으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인초등학교 자리에 시멘트로 해인사보다 몇배 큰 기와집을 지어 놓으면 고려 팔만대장경을 모신 천년 고찰 해인사가 얼마나 초라해 보이겠습니까? 그러니 해인초등학교 자리는 21세기의 건축모형과 건축자재를 사용함으로써 현대와 전통이 조화로운 해인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씀에 감명을 받아 주지 스님께 이상해·김석철 교수님을 소개 올리고 성보박물관, 그 맞은편에는 선수련원, 중앙에 국제회의장을 겸한 만불전, 그 뒤에 대불이 모셔진 설계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나는 성철 스님 사리탑 건립문제로 인하여 박물관장 자리를 몇 개월 하지도 못하고 내놓게 되었다.
1997년 5월 드디어 성보박물관을 착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광 스님이 4년의 주지 임기를 마치시고 세민 스님이 이으신 지 1년 6개월여 만에 박물관 개관식을 맞이하게 되었다. 20여년에 걸친 해인초등학교 자리의 불사가 하나 이루어진다 하니 나로서의 감회가 없을 수 없어 옛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 아무쪼록 그동안 박물관 완성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역대 어른스님, 현 주지 세민 스님, 전 주지 보광 스님, 전 박물관장 선룡 스님, 현 박물관장 향적 스님, 이강두 국회의원님, 김혁규 경남지사님 등 모든 분들과 함께 박물관 불사에 미력을 보탠 한 사람으로서 이 지면을 빌어 그 공덕과 업적 그리고 과정을 기록해 두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