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Ⅱ )
최초의 정사(精舍)인 죽림정사는 마가다국의 왕과 왕비의 기중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당시 제일가는 강대국이었던 마가다국의 빔비사리왕이 부처님께 귀의했다는 사실은 호기 불교교단의 교세가 크게 신장 할 수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초기의 부처님은 주로 라자그리하와 그 주변을 중심으로 중생교화를 폈다. 그러다가 누닷타라는 대단한 그리하파티의 귀의와 회사에 의하여 갠지스 강 북쪽 슈라바스티에 기원정사가 이루어지므로서 부처님의 교화범위는 급격히 확장되었다.
슈닷봐는 당시 손꼽히는 슈레슈틴이었으며 동시에 그리하파티였다. 그는 사업차 라자그리하를 방문했다가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다 부처님의 교설을 듣고 감격한 수닷타는 그 자리에서 교향인 슈라바스티에 정사를 기증할 것을 약속하면서 부처님의 슈라바스티 왕림을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던 수닷타는 마침 왕자인 제타의 소유지가 가장 적합한 동산임을 알고 왕자와 교섭하였다.
왕족의 토지를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상당한 거부였으며 또 왕족과 직접 토지 거래를 교섭할 만큼 권세가 도도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정사를 위한 토지는 마련되었다.
당시 슈라바스티에는 부처님과 그 교단올 적대시(敵對規)하는 지나교도와 찰바카교도등이 있었다.
슈다바스티에서 왕권의 비호를 입고 있던 지나교도들은 찰나교교도와 합세하여 부처님의 슈라바스티 방문을 완강히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니까 부처님 당시 소위 육사외도(六師外道)의 기세도 당당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지나교의 교세는 불교 교세와 자웅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득세하고 있었다. 슈라바스티에서 굴지의 재별로 행세했던 수닷타가 제타왕자끽 토지까지 구입하여 훌륭한 정사를 마련하여 부처님을 영접한다는 소식은 지나교도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부처님이 제자들과 함께 슈라바스티에 나타났을 때 예상한 대로 지나교도와 찰바카교도들은 부처님 앞으로 나오더니 그의 법력을 시험할 목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에 위대한 종교인의 법력을 시험하는 방법은 기적을 나타낼 초능력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데 있었다. 지나교도와 찰바카교도들은 부처님의 기적을 시험했다. 그들의 숨은 의도를 알아차린 부처님은 순식간에 수천의 부처님으로 화현(化現)했다. 유명한 슈라바스티의 기적이다.
인도 아잔타 석굴에는 이 슈라바스티 기적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벽화가 있고 간다라 불적지에도 슈라바스티의 기척을 조각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한분의 부처님이 천불로 화현했다는 기적의 소문은 삽시간에 슈라바스티성에 퍼졌다. 이리하여 부처님은 수닷타가 기증한 기원정사에 주석케 되고 불교 교단의 교화는 갠지스강 북쪽의 코살라에 까지 미치게 되었다.
초기불교교단과 이 교단 사이의 대결은 슈라바스티의 기적으로 막을 내렸다. 지나교를 옹호하던 코살라 왕도 불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쏟게 되었다.
그러나 마가다의 라자그라하와 마찬가지로 슈라바스티에서도 종교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충분히 보장되었다.
이스람의 침입이전 고대 인도에서 종교의 자유가 왕권에 의하여 정치적 목적 때문에 억압된 기록은 극히 드물었다. 정치권력이 개입되어 특정 종교를 야단으로 몰아 부쳐서 박해하는 사례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고대 인도에서 여러 종교는 평화스런 분위기 가운데 공존하고 있었다. 종교신앙의 차이 때문에 전정하는소위 종교전쟁 같은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도시국가간의 이해의 상충에서 야기되는 전쟁마저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 Ⅲ )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평화를 염원했다. 그러나 평화보다는 전쟁의 역사가 더 오래다. 부처님의 시대에도 군소(群少)도시 국가 사이에서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래서 부처님 자신이 중재에 나서므로서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을 미연에 방지한 일도 있었다. 당시 국가의 재원은 주로 농산물이었다. 보다 많은 농산물의 수확을 위해서는 더 많은 토지(土地)를 획득해야했다.
이리하여 군소 국왕들의 사심(째邪心)은 부단한 전쟁을 도발했다. 국토를 확장하기 위한 정복전쟁에는 훈련된 직업 군대가 필요했다. 막강한 군대를 양성하려면 더 많은 재정적 수입이 있어야 하며 따라서 정복의 전쟁 범위는 더욱 넓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 상술에 능한 슈레슈틴이나 그리하파티같은 대상인들의 이해(利害)까지 업혀서 보다 중요한 판도의 지배를 위한 통일군주국가의 출현을 앞두고 정복전쟁을 더욱 극렬해졌다.
군소 도시국가의 정체체제는 이른바 공화제(共和制)였다. 여러 씨족장들의 회의에서 성주(城主)를 선출하고 모든 공사(公事)는 이 회의의 의결을 거쳐서 진행되었다.
이 회의제의 회의를 상가(Sanga)라 불렀다. 오늘의 승가제도는 이 상가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래서 승가에서 모든 공사(公事)는 대중들의 공의를 거쳐 이루어진다. 부처님 자신 청소년 시절에 체험했던 카빌라의 공화제가 가장 이상적 제도였다고 생각한 듯 하다.
그래서 카빌라의 공화제는 불교교단에 도입하여「상가」를 형성했다. 통일군주체제에서의 모든 정무(政務)는 군주의 명령에 의하여 결정되고 집행된다. 권력에 집착한 군주 한사람의 우치에 비롯된 일방적 명령제보다는 중지(衆智)를 모아 의결하는 공화제가 근대적 정체제도에 가깝다.
부처님은 공화제도를 이상적으로 생각하였으나 당시의 주변현실을 통일군주국가를 촉진하는 정복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한번은 마가다국 빔비사라왕을 계승한 아자타사트투가 이웃 나라를 정복하는 전쟁을 시작하고자 한일이 있었다. 아자타사트투는 왕권의 조기 탈취를 위하여 부왕(父王)을 감옥에 유폐시키므로 라자그리하의 비극을 빚어낸 야심가였다. 앞의 잘못됨을 참회하고 부처님께 귀의한 그는 정복전쟁을 일으키기 직전 때마침 라자그리하에 계시던 부처님에게 자문을 청하게 되었다. 전쟁도발의 뜻을 청취한 부처님은 정복하려는 상대국에 대하여 몇가지 질문을 했다. 그러나 백성의 단결력, 나라의 질서, 종교신앙의 정도, 경제사정등을 물은 후 아자타사트투의 진군을 만류했다.
나라의 질서가 잘 잡히고 국민간의 신앙심과 단결력이 강하면 외침이 있어도 능히 막아낼 수 있다는 논리였다.
부처님이 표방하는 교설은 어디까지나 평화이지 전쟁은 아니었다. 열반적정(涅槃敵靜)에서 적정에 해당하는「샨티」란 원어를 평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불교가 지향하는 궁극의 이상이 적정이 의미하는 평화다.
부처님의 입멸 1세기 후 통일제국을 이룩하기 위하여 수많은 정복전쟁을 되풀이 하다가 칼링카 전쟁의 비극을 목격하고서 \'전쟁포기 선언\'을 한 아쇼카왕은 부처님이 교시한 Dharma(진리)에 의한 정치를 펴나갔다.
진리에 의한 정치는 곧 전쟁이 아니고 평화를 지향하는 정치다. 아쇼카왕은 진리에 의한 정치를 선포함과 동시에 실천을 옮겼던 명군(名君)이었다.
부처님은 적정의 길 즉 평화의 길을 교시하여 그 길을 걸으셨지만 당시의 주변정세는 군소국가 사이의 부단한 전쟁으로 점철되고 있었다. 부처님이 제시한 불국토이상이 현실적으로 곧 실현되지는 않았다.
부처님의 고국인 카빌라국마저 강대국 코살라에 의하여 정복되고 부처님의 재세시에 카빌라의 역사는 끝나고 만다.
그러나 카빌라가 코살라에 의하여 정복 되었다고 해서 즉 카빌라의 역사가 끝났다고 해서 부처님이 교시한 평화의 길도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전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인류가 염원하는 이상은 여전히 평화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