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량의 노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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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종림
1986년 04월 50호
3. 초탈의 이상
초탈의 이상은 삶의 고통과 죽음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생사(生死)의 고통이 없는 이상의 세계를 추구하는 자족적(自足的) 철학자들의 꿈이다. 인간이 생사의 고통에 대하여 가장 쉽계 대처하는 방법은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으로부터 도피하는 길이었다. 산이나 숲속의 생활 등 자연으로 돌아가 한적한 생활을 즐기는 것이다. 또는 불사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영약이나 비술을 얻어 불로장생의 신선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산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고 죽음 역시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그 다음으로 초탈의 길에서 탈락된 것이 쾌락주의(快樂主義)와 금욕주의(禁慾主義)였을 것이다. 쾌락주의는 디오뉘소스(Dionysos:도취·광란)적인 생활태도로 서양철학사에서 학파로 성립된 것은 그리스의 퀴니크(Kynik)학파와 퀴레네(Kyrene)학파였다. 퀴니크와 퀴레네의 사상은 염세관에 기초한 쾌락주의 윤리관을 가지고「그대는 내일이면 죽으리 먹고 마시고 즐기어라」라는 식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쾌락은 쾌락없는 것이 쾌락이고, 쾌락을 추구하는 그것 자체가 고통이라는 소위 말하는 쾌락주의 역설에 걸려 쾌락을 버리고 욕망을 억제하는 금욕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퀴레네 학파의 에피쿠로스(Epikuros)는 욕망을 멸시하고 격정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였다. 퀴니크 학파에서도 종교적 색채를 가지고 의무와 금욕을 강조하는 제논(Zenon)의 스토아 학파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인도에 있어서는 아지타 케사캄발린(Ajata Kesaka-mbalin)의 유물론적 쾌락주의, 푸라나 캇사파(Purana Kassapa)의 도덕적 쾌락주의나 니간타 나아타퓨타(N-igantha Nataputta)의 고행주의는 수정주의(修正主義)를 겸하게 되고 니간타 나아타퓨타는 자이나(jaina)라는 종교로 발전하게 된다. 생(生)의 철학자 중에서 니이체는 인간의 삶을 권력에의 의지로 보고 윤리적인 선악을 넘어서 생의 의지대로 사는 초인(超人)의 길을 추구하였으나,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소멸만이 생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의 의지에서 벗어나는 방법의 하나는 의지로부터 부정하는 성자의 길이다. 인간의 관념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현상적 관념과 영원한 관념이다. 영원한 관념은 시간, 공간, 인과율(因果律)을 넘어선 플라톤적인 이데아로 이러한 영원한 관념에 몰두함으로서 무의지의 인식에 도달하여 의지의 속박을 떠난 관조의 세계에 들어가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탈은 잠시동안 휴식을 주는 일시적인 해탈일 뿐이고 영원한 해탈은 근본적인 의지의 부정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계는 최악이고 일체의 욕망은 허무한 것이라는 염세관과 개체는 시간과 공간속에서 개체화의 원리에 따라 나타난 가상에 불과하고 만유는 근본에 있어 하나라는 범신론(汎神論)의 철학적 진리를 파악하여 이기적인 자아에서 벗어나 고통받는 자와 자기가 하나라고 느끼고 성자다운 사랑의 행을 행하는 것이다. 개별성에서 벗어남으로서 자기 자신의 의지를 부정할 수 있다. 성자다움이란 살려는 의지의 부정에 기초를 둔 삶의 태도라는 것이다. 염세적 사고가 초탈철학으 기본 전제라면 범신론적인 사고는 그 마지막 논리적 귀결이였던 것 같다. 이 세계는 고해이고 나고 죽고 늙고 병드는 인간의 삶을 고통이라는 것이다. 현실생활을 절연하고 사회의 시비 선악을 떠나는 철저한 무관심이 초탈의 길을 가는 자가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태도인 것이다. 죽음의 공포에 대한 불안에서 인긴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죽는다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체념도 했을 것이다. 또 죽음 따위는 겁낼 것 없다고 자위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가 봄이 오면 잎이 피고 가을이 되면 잎이 졌다가 다시 봄이 오면 잎이 피듯이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이 순환한다고 생각하고 죽음과 삶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생잎이 피듯이 삶과 죽음과 삶이 순환한다고 생각하고 죽음과 삶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생사일여(生死一如), 만물의 제일성(齊一性), 궁극적인 절대실재(絶對實在)로서의 신과 내가 하나라고 생각하고 그 절대 실제 속에 자기를 소멸시켜 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스토아 학파의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lls : 로마황제)는 우주의 주기적 재생과 자연의 제일성을 탐구하였으나, 우리에게 달관의 생활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었던 것은 노자(老子)나 장자盛子)일 것이다. 노자나 장자의 사상은 무욕(無慾)으로 심재(心齊)하여 절대 실제로서의 도의 경지에 도달하여 자신을 그 세계에 말겨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상아(喪我)라고 하고 자신의 의지로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맡겨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무위자연無鴻自然)의 생활을 이상으로 삼았다. 도의 경지에서는 시비, 선악, 미추의 차별이 없고 생사가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것이 자연의 이법이고 생이나 사는 자연의 이법상에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기뻐할 것도 없고 슬퍼할 것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사일여의 사상은 제물(齊物)의 논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과 저것 시비와 선악의 구별은 상대적인 관점이고 도의 중추(中樞)에서 보면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천지와 만물이 나와 하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상대를 초월하여 절대세계인 자연의 도에 합일한 이상적 인간상으로 신인(神人), 지인(至人),진인(眞人)을 말하고 소요 자적하는 달관의 생활을 이상으로 하였다. 범신론적인 사고는 유신론 적처럼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질적으로 다르다고 보지 않고 절대실재로서의 신과 인간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불이(不二)의 논리로서 범아일여는 우주의 원리나 궁극적인 실제로서의 브라흐만(Brahman)과 개인의 본질적 아트만(Atman)이 입체라는 것으로 우파니산드(Upanisad이래의 인도철학의 중심사상이었다. 베단다 (Vedanta)학파의 상카라(Sankara)에 이르러 불이의 논리는 불이 일원(不二一元)의 사상으로 이론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이 현상의 세계는 마야(Mava: 환상)에 불과하고 이 마야를 실제로 잘못 인식하는 아버드바 즉 무명 무지로 인하여 업을 낳고 이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輪回)의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윤회의 고통을 벗어나는 길은 고행으로 업을 소멸하고 선정(禪定)을 닦는 것이다.
범신론적인 귀결로서 욕망의 절제, 의지의 소멸, 자아를 멸각하고 개인적인 소아에서 벗어나 우주적인 대아로서의 절대실재에 도달함으로서 초탈의 길을 추구한 최후의 목적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초탈의 이상이 실현된 것이다. 절대실재에 도달함으로서 개아적인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고 더 이상 문제는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가 영원한 해탈의 길이라고 말하는 성자의 행을 실천하는 것은 실패하게 된다. 초탈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지적인 욕망과 의지의 소멸뿐만 아니라 이타적인 사랑의 의미마저도 버려져야 했기 때문이다. 남을 위한다는 생각 진리를 구한다는 생각 역시 방향의 차이에 불과한 개인적 의지라는 것이다. 실천에 대한 의식마저도 가지지 않고 절대실재의 세계에서 달관의 생활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인 윤리의 실천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문제는 간단하지만, 인간은 독립된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관계로서 존재하는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적 윤리의 실천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한다면, 도덕적 비관론이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물론 사회적 윤리의 실천을 위하여 강한 도덕적 의무를 가지고 복귀한 예도 있으나 실패하게 된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의 어둠과 속박에서 벗어나 철학의 햇빛으로 나온 사람은 아직도 갇혀 있는 동굴의 수인들에게 철학의 빛을 나누어주기 위하여 자신은 원하지 않더라도 윤번(輪番)으로라도 다시 동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왕의 고문으로 실천을 시도했었고 철인
정치(哲人政治)의 이상을 피력하였다. 철인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면 사회를 구제하기 위해서 철학자가 왕이 되던가 왕이 철학을 받아들이던가를 해야 된다. 철학자가 왕이 되었던 예로 스토아 학파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들 수 있는데 항상 철학의 빛을 그리워하면서 마지못해 의무로서 해야 하는 소극적인 태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것이다. 왕이 철학을 받아 들이는 경우 역시 철학의 길과 경세의 길의 차이로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실천적 행위에 있어서의 철학의 실패는 철학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약점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이성의 진리와 실천적 이성의 진리와의 차이에서 일어나는 문제이다. 경험은 그릇된 것이고 추리는 부당한 것이고 이성은 당위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감정이 무시될 때에는 실천력이 약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은 항상 행위에 있어서 이성에 의한 당위나 의무규정으로 강제되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적극적인 행위가 아니라 마지못해서 하는 소극적인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초탈의 철학은 범신론적인 결론이 낳은 도덕적 비관과 철학이 가진 약점으로 인하여 사회적인 윤리를 실천하는데 성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자족을 추구하는 것만큼이나 사회적인 윤리의 실천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이상과 실천과의 갈등으로 초탈의 철학은 좌절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