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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 스님 신라불교의 기틀을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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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 편집실 1986년 04월 50호
·아도 스님 신라불교의 기틀을 놓다
신라는 지리적으로 소백산맥 아래에 위치하여 다른 선진문물 을 받아 들이는데 불리했올 뿐 아니라 사람들의 성품도 보수척이고 강건하여 좀체로 이방문화(異方文化)를 받아 들이려 하지 않았다.그러므로 자연 불교도 다른 나라에 비해 늦게 받아들여졌는데 고기(古記)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하려했던 아도스님에 대하여는 여러가지의 이견(異見)이 었다.
어떤 이는 인도사랍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오(吳)나라에서 왔다고도 하며 또어떤 이는고구려에서 위(魏)나라로 들어갔다가 뒤에 신라로 왔다는 말올 하지만 정확한 기록은 알 길이 없다.
다만 그의 풍모는 위의가 남달리 뛰어나며 신통이 자재하였으며 언제나 셜법올 하면 꽃비가 하늘에 내렸는데 가솜에는 늘 불법을 펴고자 하는 염원이 가득했다.
처음 눌지왕(詢顧王) 때 묵호각란 스님이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都)으로 와서 교화를 펼 인연이 있었으니 그 고을 사랍모례(毛禮)가 집안에 굴올 파고 방을 만들어 편안히 모셨다.
이때에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시켜 의복과 향을 보내왔는데 군신 중에서 향의 이름과 사용하는 바를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이에 중사(中使)를 보내어 향을 싸가지고 나라 안팎으로 두루 다니면서 묻게 하였다. 묵호자 스님은 그것을 보고 그 이름올 말하고 이르기를 「이것을 태우면 냄새가 향기로와 정성이 신령에 통할 수 있게 되나니 이른바 신령(神靈)이란 삼보(三寶)에 더 할 것이 없으니 그 첫째는 부처님이요, 둘째는 부처님의 진리요, 세째는 승가(僧伽)라 이르는데 그 삼보전에 이 향을 사르고 촉원하면 반드시 신령한 감웅이 있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때마침 공주가 병이 나서 위독했다. 왕은 스님으로 하여금 향을 사르고 서원(誓願)을 올리게 하였더니 병이 곧 나았다. 왕은 몹시 기뻐하여 예물올 후하게 주었다. 스님은 물러나서 모례를 보고는 얻은 예물올 주어 그가 베풀어준 덕에 대한 보답올 하였다. 그리고
모혜더러 이르기를 「나는 가야 할곳이 있으니 그만 떠나야겠다」고청하였다. 그런 뒤 갑자기 어디론지 가버렸다.
또 다른 기록에는 비처왕(昆處王) 때에 아도스님이 시자(待者)세 사람과 함께 모례(毛禮)의 집으로 찾아왔는데 그 모습이 묵호자와 꼭 같았다. 그는 머물러 있은지 수년만에 아무 병도 없이 죽고 그 시자 세사람은 머물러 살면서 경률을 얽고 외니 이따금 그들의 가르침올 받아 믿는 사랍들이 생겼다.
또 다른 기록에도 위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전하고 있는데 묵호자와 아도는 동인이명(同人異名)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박인량(朴寅亮)이 지은 수이전(殊異傳)에 아도스님의 아버지는 위나라 사람인 굴마( 摩)이고 어머니는 고도령(高道寧)이라는 이름의 고구려 사람이다. 굴마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도령과 서로 사랑하였는데 그 후 굴마가 위나라로 돌아간 뒤 태기가 있어 낳으니 아도스님이었다. 스님은 다섯 살이 되매 어머니의 말에 따라 머리를 깍고 사미가 되었다. 16살에는 위나라로 들어가 그 아버지 굴마를 뵌 다음 마침내 현창화상(玄彰和尙)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19세에 고구려로 돌아와 어머니를 뵈었는데 어머니는 그에게 타이르기를「이 나라는 기연(機緣)이 아직 성숙하지 못하여 불법을 행하기 어렵다. 그러나 신라 땅에는 지금은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이 비록 없으나 이 뒤로 3년만 지나면 불법을 보호할 밝은 임금이 나와 나라를 다스려 불법을 크게 일으킬 것이다. 또 그 나라 서울 서라벌에는 일곱 군데 부처님의 법이 크게 머무를 것이니 하나는 금교(金橋)의 동쪽 천경림(天鏡林)이고 둘은 삼천기(三川岐:지금의 영흥사)이며 셋은 용궁(龍宮) 남쪽(지금의 황룡사)이고 넷은 용궁의 북쪽(지금의 분황사)이며 다섯은 신유림(神遊林:지금의 천왕사) 여섯은 사천(沙川)의 끝(지금의 영묘사) 일곱은 서청( 請)의 밭(지금의 담엄사)이다. 이런 곳들은 불법이 멸하지 않고 전겁(前劫) 때의 절터이니 너는 마땅히 그 나라에 각서 먼저 불법의 현묘(玄妙)한 뜻을 전하면 부도(浮圖)의 시조가 될 것이니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느냐?」하였다. 어머니의 간곡한 말을 듣고 나라의 경계를 벗어나 신라의 궐서리(闕西里:지금의 엄장사) 머물러 살았으니 이때는 미추왕(味鄒王)이 즉위한지 2년인 계미 서기 263년이었다. 스님은 왕에게 불교를 시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왕은 이전에 한번도 보지 못하던 것이라 하여 괴상하게 여기고 심지어는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으므로 스님은 속촌(續村) 모례(毛禮)의 집으로 물러나 숨었으니 지금 선주(善州)측 선산땅이었다. 박해를 피하여 도망쳐 간지 3년이 지난 해에 성국궁주(成國宮主)가 병들어 누워 오래 낫지 않았으므로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어 병고칠 사람을 찾았다. 그 때 스님은 성국궁주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대궐로 들어가 그 병환을 낫게 하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소원을 묻자 스님은 청하기를「금교의 동쪽 천경림에 절을 창건해 주신다면 제 소원은 족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즉시 그 청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질박하고 검소하며 또한 백성은 어리석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몰랐으므로 이에 가난한 초가집으로 절을 삼았다. 그 뒤 7년이 지나서 비로소 승려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부처님께 귀의하여 스님께 법문을 들었다. 그리고 모례의 여동생 사시(史氏)도 또한 몸을 던져 여승이 되어 삼천(三川)의 거리에 절을 세우고 살았으니 절의 이름은 영흥사(永興寺)이다. 그로부터 얼마 안되어 미추왕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이 아도스님을 해치려 하므로 스님은 모례의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봉문을 닫고 입적(入寂)을 보였다. 그러므로 자연 불교도 폐하여졌다. 이것은 그뒤 2백여 년이 지난 원종(原宗)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가 있게 되는 불교의 기틀이 열어 놓음이니 이를 기뻐하여 일연스님은 이렇게 찬(讚)하였다. 금교(金橋)에 눈이 쌓여 얼어 녹지 않으니 계림( 林)의 봄빛은 아직 완전하지 않네 기특하게도 봄의 신(神)은 재주도 많아 모례의 집 매화나무에 먼저 꽃이 피게 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