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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근 어력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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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역해 - 법성 1986년 04월 50호
불교의 실천관
혜근경(慧根 )
이와같이 내가 들었다. 한 때에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국 제타숲‘외로운 이 돕는 장자의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다섯가지 근본(五根)이 있다. 그것은 믿음(信根), 정진(精進根), 살펴 생각함(念根), 선정(定根), 지혜(慧根)다. 어떤 것이 믿음인가 성인의 제자는 여래에 대해 믿는 마음을 일으키되 그 근본이 견고하여 모든 하늘, 악마, 사문, 바라문과 세간법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을 믿음이라 한다. 어떤 것이 정진인가 네가지 바른 끊음이다. 어떤 것이 선정인가 네가지 선정이다. 어떤 것이 지혜인가 이른바 네가지 거룩한 진리다. 이 여러 가지 공덕은 다 지혜를 그 으뜸으로 하나니 마치 집은 마룻대를 으뜸으로 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오력경(五力 )
이와같이 내가 들었다. 한 때에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국 제타숲 외로운 이 돕는 장자의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다섯가지 힘이 있다. 그것은 곧 믿음의 힘, 정진의 힘, 생각의 힘, 선정의 힘, 지혜의 힘이다. 믿음의 힘이란 네가지 무너지지 않는 깨끗한 믿음(四不壞淨)이요 정진의 힘이란 네가지 곳 생각함(四念處)이요 선정의 힘이란 네가지 선정(四禪)이며 지혜의 힘이란 네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임을 알아야 한다”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잡아함경 권20)
( 해설 )

1) 삶에의 용기 (五根)
인간은 삶의 의미가 무엇인7}를 묻기 전에 이미 살고 있는 자로서 세계속에 던져진 존채이며 살아가야함을 자신의 운명의 짐으로 결머지고 서 있는 자다.
그러므로 삶에 관한 어떤 교설이 우리들의 삶올 자유롭게 풀어가는 해방의 교설이 되지 못하거나삶과 유리된 자기만의 특수영역을 고집할 때 그러한 교셜에 의지지나 추종은 삶속에 새로운 부자유를 산출해 내고야 말 것이다.
독화살의 비유(箭喩經) 속에서도 거듭 강조되고 있는바와도 같이 불타는 자신의 삶에 관한 교셜(文字般若)마저 사실은 삶 속에서(實相般若) 연기되어진 것이며 삶의 자유(觀照般若)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마치 뗏목을 타고 저 언덕에 이르면 뗏목을 버려야 되는 것처럼 불타의 종교적 언어는 자유로운 삶의 성취를 향해 스스로를 지양해 버린다. 그러므로 불교의 교설속에서는 종교적 언어의 절대화 도그마화란 새로운 삶의 모순을 의미한다.
불타는 본 혜근경에서 삶올 가치있는 삶으로 정초시켜 주며 우리들의 ‘살고 있음(現存)’에 용기를 부여해 주는 다섯가지 근본적인 실천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본 혜근경의 입장과는 달리 혼히 많은 종교나 사상들은 인간의 삶의 가치를 그것을 밑받침해 주는 신적인 근거나 어떤 성스러운 것 속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혜근경이 제시하고 있는 다섯가지 실천(五根)은 불타의 종교적인 언어일반이 지향하는 것처럼 삶을 삶으로 끈거 지워주는 형이상학적인 실재에로의 나아감이나 초월적 신성과의 관계 맺음을 통해서 삶에의 용기를 제시하지 않는다. 불타는 오히려 주어진 삶 곧 주체-객체로 드러나는 현실경혐의 세계를 바로 살펴냄으로써 현실안에서 그대로 ‘열려진 삶의 약동’을 바라보고 마르지 않는 용기의 원천에 셜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혜근경은 집을 지을 때에 마룻대가 집의 뼈대를 이루는 것처럼 존재일반에 관한 바른 통찰이 다섯가지 실천의 중심을 이룬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뜻을 이어 천태선사의 법계차제 초문도 지혜란 곧 바른 삶의 길을 가기 위해 존재의 참모습을 관찰함이라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믿음, 정진, 살펴 생각함, 선정도 지혜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통해 드러난 바른 삶의 길을 믿고, 행하고, 사유하며, 마음을 거두워 거기에 상응함이라고 하고 있다. 이와같이 삶에의 용기를 초월적 실재에서 이끌어내지 않고 지혜를 통해 드러나는 세계의 참모습 속에서 그 원천을 확인해내려는 부타의 입장은 서구철학에 있어서‘실존이 본질을 앞선다’고 주장한‘사르트르’의 이야기와 비교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맨처음에 관계가 있었다’고 뒤집어 말한‘마르틴 · 부버’의 신학적 명제를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로고스나 형이상학적 본질의 초월성을 깨뜨리기 위해 도입된 실존이나 관계의 의미도 그것 자체가 하나의 해체할 길 없는 덩어리로 남아 있게 되면 불타의 연기론적인 세계관과 사제법이 제시하는 본질적인 자유의 길에 이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제법이 제시하는 자유의 길과 오근에 의해 확보 되어지는 삶에의 용기는‘인간이 신의 얼굴을 닮았다’는 기독교신앙의 주장과‘신의 얼굴이 인간을 닮았다’는‘포이에르바하’의 반대명제가 동시에 지양되어 짐으로써만 그것들의 발견이 가능한 것이다. 즉 전자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주체적인 자발성을 확보할 수가 없을 것이며 후자의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조건속에서 이루어진 상대적인 것의 절대화라는 새로운 모순이 야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상대적인 어떤‘있음’을 그것 자체로 절대화시키는 사고가 깊어지면 결국 모든 차별적인 있음의 통일적인 근거는 설정되어질 수 없게 될 것이며 개체 개체간의 자유로운 합의와 의사소통의 열려진 통로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사제법은 상대적인 모든 있음(■有)을 있음으로 한정하려는 집착(我執)과, 있음 너머에 있음을 근거지워주는 별도의 법칙성을 설정하려는 집착(法執) 때문에 인간의 현실적인 부자유가 발생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주체-객체로 주어지는 현실속의 온갖 것, 무엇 무엇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확정할 길 없는 열려짐 속에서 바라볼 수 있을때(無有定法名無上正等正覺 : 金剛 ) 비로소 우리는 머뭄없는 삶의 자유속에 서서 온갖 것을 창조적으로 굴려쓸 수 있는 것이다.(應無所住而生其心) 그러나 여기서 존재를 밑없음(無底) 머뭄없음(無住)속에서 본다는 것은 결코 허무적인 비존재에로 존재를 몰락시키는 것이 아니며, 또한 주체의 정신적 자유안에 대상을 용해시켜 버리거나 대상에다 주체를 함몰시키려는 것도 아닌 것이다. 존재란 머물러 있는 처소를 보유하고 있지 않으므로 닫혀 있지 않는 개방공간속에서 새로운 관계규정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며 끊어짐이 없는‘영원의 모습’속에서 자기 전개의 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니 우리는 머뭄없음 속에서 마르지 않는 생성의 샘물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괴로움의 생겨남과 사라짐의 인과를 밝힌 사제법은 괴로움이 실체로서의 괴로움이 아니라 사라질 수 있는 괴로움, 기쁨으로 전환될 수 있는 괴로움을 밝혀주고 있다. 그러므로 사제법의 자각이란 바로 현실적인 괴로움의 물결속에 좌절되지 않는 참된 자유의 세계에로 나아감인 것이니, 사제법을 바로 살피는 지혜로운 사람만이 괴로움 속에서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는 휴식(定根)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휴식속에 서있는 자만이 머무름과 뒤돌아봄이 없이 괴로움의 세계를 기쁨의 세계로 전환시켜가는 역사 해방의 실천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精進根) 또한 지금까지 살핀 바와 같이 불교의 기본적인 시각에서 보면 불타를 믿는다(信根) 불타에 돌아간다는 말도 초월적인 신성이나 내제적인 영혼에로의 복귀를 의미하지 않는다. 불타는 세계의 실상에 대한 바른 통찰을 통해 대자유를 구현하심으로써‘불타’라고 이름지어진 분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불타라는 인격까지도 역사의 전체성 속에서 연기되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불타를 불타라는 이름만으로 한정하려 하면 불타의 참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불타라는 하나의‘있음’에 대해서도 모든 실재론적인 망령을 벗어나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존재일반의 머뭄없음 밑없음이 바로 불타의 사라지지 않는 영원의 현존임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세계의 실상을 자각함이 불타를 바로 봄이며 불타의 위신력에로 나아감이다. 아함경은 이것을‘연기법을 보는 자가 불타를 본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화엄경은 다시 이것을 다음같이 말하고 있다. 온갖 것에 독지척언 실체가 없는 줄 확실하게 깨쳐 알면 곧 불타를 본 것이다. (子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卽見盧舍那)

2) 선정의 의미 (四輝)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존재의 참모습에 대한 자각이 없는 선정이 있을 수 없고 선정이 없는 참된 지혜 또한 있을 수 없다. 지혜와 선정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필요충분 조건올 이룬다. 곧 마음의 휴식은 세계의 실상에 대한 바른 관찰과 서로 안밖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니 경전을 말한다.
현실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인연으로 생긴 바라 실체가 없네 미옴 쉬어 구할 바 없음에 이르면그 사람을 수행자라 이륨하도다
一切諸法中 因緣空無主 息心達本源, 故號寫沙門또한 혜능선사도 선정을 통한 삶의 자유가 점차적인닦음을 통해 확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객의 경험 현실을 주-객 없는 주-객으로 곧바로 되돌려 씀으로 써 이루어짐을 다음같이 말하고 있다.
‘수행자여 어떤 것이 선정인가 밖으로 구할 바 모습을 떠나면 선이 되고 안으로 어지럽지 않으면 정(定)이 된다. 만약 밖으로 모습에 집착하면 곧 안의 마음이 어지럽고 밖으로 모습을 떠나면 마음이 어지럽지 않게 된다’
혜능선사의 위와 같은 선정의 정의는 잘못 이해되어지게 되면 대상을 주관의 정신적 자유안에 해체하려는 관념론의 입장과 혼동되기도 한다. 그러나 선정은 대상에서 물러나 돌아가야할 내면의 도피처도 아니며 현실속의 괴로움을 피해 머무를 수 있는 정체된 공간도 아니다.
그러므로 불타는 인도 기폰 사상계의 수행자들이 갖고 있었던 잘못된 션정관을 깨뜨려 주-객의 관계운동으로 되돌려 나오는 역동적인 선정의 의미를 밝혀준다.
기존 사상계의 수정주의자들(修定)은 선정을 현실의 고동에서 벗어나 휴식할 수 있는 도피처로 이해했으며 보다 수숭한 생명진화의 세계로 편입되기 위한 사다리로 파악했다.
그러므로 수정주의자들에 의하면 선정의 심화는 보다 높은 정신세계에로의 향상을 의미했으니 초선柳輝)이선(二輝) 삼선(三輝) 사선(四輝)의 션정은 색계천(色界天)에의 태어남과 상용하고 공처정(空處定) 식처정(識處定)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정(悲想非非想處定)의 닦아감은 무색계천(無色界天)에의 태어남을 의미한다.
불타는 존재론에 있어서도 기폰 다원론자들의 다원론적인 언어개념을 그대로 도입하여 연기의 뜻을 밝힌것과 같이 수행론에 있어서도 수정주의자들의 사선팔정(四輝八定)의 언어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불타의 연기론이 실재론적인 다원주의가 아니듯이 불타에 의해서 쓰여진 사션팔정의 의미도 수정주의자들의 실체적이고 단계적인 선정을 말하고 있지않다.
불타는 사선팔정을 과정과 완성, 상이성과 동일성의 통합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사선팔정으로 표시 된 선적 체험의 세계는 하나의 고착된 실재가 아니지만(非有) 또한 환상적인 공허도 아닌 것(非無)이다.
사선(四輝)의 세계를 도표화시키면 다음과 같다.
초선(初選) : 대상에 대한 혼란된 사유가 없어짐으로써 이루어지는 깨침(覺)과 살핌(觀), 탐욕을 벗어남에 의해서 오는 기쁨(喜,樂)
이선(二禪) : 깨침과 살핌의 자취까지 끊어짐으로 성취되는 내적인 깨끗함(無覺無觀 · 內淨), 내적인 깨끗함의 성취가 가져오는 기쁨(喜,樂)
삼선(三禪) : 기쁜 마음까지 버림(捨), 버림을 통해서 더욱 뚜렷해지는 바른 생각(念)과 지혜(慧), 그리고 보다 큰 즐거움의 수용(樂)
사선(四禪) : 현실속의 모든 괴로움과 선정의 즐거움에도 머물지 않음(不苦不樂), 모든 고락의 실재의식도 버리고 고락이 끊어진 허무의식도 버림(捨), 고락에도 머물지 않고 고락없음에도 머물지 않으므로 성취되는 청정한 지혜(念淸淨)
위에서 도표화된 것처럼 초선-이선-삼선-사선으로 진행되는 선정은 벽돌 쌓듯 닦아 올라가는 단계적인 구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주관-객관에 관한 모든 형태의 실재의식을 끝없이 부정해가는 역동적인 생명 운동을 과정적인 언어구조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곧 대상에의 탐욕스런 집착을 벗어남으로써 수용되어지는 초선의 선정락을 버리는 곳에서 이선의 이름을 거짓 세우고, 이선의 선정락 삼선의 선정락마저 지양해가는 곳에서 사선의 이름을 세운 것이니 사선에서는 괴로움과 즐거움(苦樂),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不苦不樂)을 동시에 벗어난 지혜의 세계를 보여준다. 곧 사선의 진행구조는 선정의 기쁨이나 얻음의 자취까지라도 부정해야만 참된 삶의 자유가 구현될 수 있음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천태선사는 사선의 매과정마다 선정속의 얻음을 버림으로써 선정과 지혜가 하나된 선정의 완성이 구현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心與定法一謂之一心 : 법계작제초문) 그리고 사선 다음에 경전에서 강조되는 사무량심(慈悲喜捨) 사공정(四空定)의 관계도 점진적인 발전의 의미가 아니라 집착의 계속되는 부정의 의미로서 쓰여지고 있다. 곧 사선의 선정이 주-객의 동시적인 해방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체의 해방(自利)에만 치우치거나 관념적인 신비에 빠질 때 사무량심의 실천행으로 대치하고, 사무량심의 실천행이 모습에 떨어질 때 모습이 끊어진 사공정(四空定)으로 대치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선-사무량심-사공정으로 이어지는 선정의 구소는 선정이 과정적인 운동이 아니지만 운동 아님도 아니며 모습이 아니지만 모습 아님도 아님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중도적인 선정의 모습은 불타 열반의 장엄한 광경을 통해 극명하게 밝혀지고 있다. 경전은 불타께서 정체되고 닫혀진 선정속에서 열반에 들어간 것이 아님을 다음같이 과정적인 언어구조를 통해서 기술하고 있다. 즉‘초선-이선-삼선-사선-공처-식처-무소유처-비상비비상처-멸진정-비상비비상처-무소유처-식처-공처-사선-삼선-이선-초선-이선-삼선으로 이행하여 불타는 드디어 제사선에서 반열반에 드셨다’고…
새로운 삶(五力)
불교에 있어서 존재의 참모습을 바르게 생각한다(念根) 바르게 안다는 것은 결코 주관적인 사고의 빛깔을 대상위에 덧씌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앎은 대상이 거기 참여하는 앎이며 전체적인 삶연관이 온통 들어와 있는 앎이므로 앎의 문제는 바로 삶의 문제이며 앎의 전환은 삶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불교의 교리체계는 언제나 실천에로 통합되어지는 이론체계이며 불타에 의해서 이루어진 괴로움의 발생원인에 대한 분석과 병폐에 대한 지적은 곧 괴로움의 지양과 치료에 그 목표가 있다. 경전은 그래서 불타를 위대한 의사(大醫王),또는 병 따라 약을 조제해 주는(應病與樂) 약사로 비유하곤 한다. 이러한 뜻에서 불타께서 혜근경에서 제시하는 다섯가지 실천의 우리들의 잘못된 행위양식에 대한 분석과 지적에 그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뭇 삶들이 모든 환상과 의혹, 잘못된 행위양식을 떨쳐내고 용기 있느 삶, 새로운 삶에로 나아가도록 끌어줌에 참된 뜻이 있다. 그러므로 삶에의 용기를 제시하는 다섯가지 실천의 길을 자신의 삶의 길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용기 있는 삶, 지혜로 전환된 새로운 삶의 길로 나아감을 뜻한다. 곧 나-너, 나-그것의 관계와 대립을 실체 없는 관계로 확실하게 파악하는 사유와 지혜의 힘(念力 慧力)은 다툼과 맞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휴식의 힘(定力)을 삶속에 확보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휴식의 힘을 확보함으로써만 나-너 나-그것의 관계를 조화롭게 재정립해 낼 수 있는 창조의 힘(精進力)이 현실속에 용솟음쳐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나고 죽음이 실체없는 나고 죽음인 줄 깊이 자각할 때 우리는 미래에 대한 환상과 죽음의 두려움을 벗어나서 나의 삶을 죽음과 없어짐의 운명에도 불구하고 완전하게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이 자신의 삶을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타인의 삶도 그들의 모든 잘못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껴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나의 삶을 동시에 용납할 수 있는 그러한 지혜 그러한 휴식과 신뢰의 힘이 회복될때 우리는 대상을 주관의 정신안에 해체하려는 관념주의와 대상을 주관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도구주의의 병폐를 벗어나서 사람 사람간의 자유로운 합의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역사의 지평을 창출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은 주-객에 관한 평등한 마음의 성취를 통해 나-너가 함께 성장하는 역사해방의 길을 열어가는 보살의 실천을 다음같이 말하고 있다.
其心無高下 求道無厭倦
普使■衆生 住善增淨法
보살은 그 마음에 높낮이 없이
바른 진리 구하여 싫증이 없네
그리하여 뭇삶들을 널리 일깨워
깨끗하고 착한 법 더욱 늘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