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선문(九山禪門)을 순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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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 삼우
1984년 12월 34호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출가하여 부처님의 깊은 은혜를 입고 있다가 인연에 따라 65년 늦가을 조국을 떠나 일본을 거쳐 캐나다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16년이 지난 82년 가을에 처음으로 다시 조국을 방문 그리운 조국 불교의 성지인 사원순례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두 달간에 걸친 성지순례를 마치고 지금 돌아가는 길에 있다.
내가 고국을 방문하여 옛 승원을 찾고 있는 이유는, 한국불교에 대한 나의 갚은 인연과 간절한 원망(願望), 그리고 나와 인연을 맺어 수행하고 있는 서양인 불제자들이 살아있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직접보고 배울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는 일말고도 조계선종(曺溪禪宗)의 원류인 구산선문을 참배하고 내 정신의 고향을 확인해 보는데 있었다. 신라 구산선문으로 오늘날까지 선종의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은 문경 봉암사뿐이고, 그나마 절이라도 남아 개산조의 탑이나 비를 지키고 있는 곳은 남원 실상사, 곡성 태안사, 장흥 보림사 정도였다. 나머지는 절터만 남아있거나 논밭이 되어 공부하는 수좌들도 모르는 이가 많고, 조사가풍(祖師家風)을 흠모하여 찾는 이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할 뿐이다. 남아있는 구산선문 가운데서 남원 실상사는 하마터면 수몰될 뻔하였고 문경 봉암사는 국립공원으로 편입되어 관광지로 개발될뻔 하였다.
한국불교는 아직도 살아있는 한국의 전통 정신문화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오랜 정신문화 가운데서 태어난 성지를 가지고 있다. 적멸보궁(寂滅寶官)을 비롯해서 전국 각처에 이름난 도량과 유명한 기도처가 있다. 그리고 지금도 성지를 순례하고 기도처를 찾아 수행하는 수행자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신라 구산선운의 후손이고 구산선문이 한국 선종의 성지라는 인식이 선객들 사이에 예상외로 없는 것 같다.
더러 구산선문을 참배하러 다니는 스님들이 있어도 개산조(開山祖)의 탑비를 찾아 무릎꿇어 절하고 합장한 모습으로 경건하게 탑 주위를 도는 이는 드물고, 잠깐이라도 타좌(打坐)하고 반야심경을 소리 높여 독송하는 이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참배하는 정신만 있으면 그만이지 않겠느냐고 할런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게 그렇지 않다. 땅바닥에 엎드려 공손하게 절을 해보고 합장한 채 탑 주위를 천천히 돌면서 옛날 이 험한 산골에 들어와 길(道)을 묻는 이들에게 깨달음을 열어 보이겠다는 한 생각만으로 선문을 개설하신 조사스님네들을 생각해 보지 않으면 오늘 우리 자신의 위치를 알 수가 없다. 조조상전(祖祖相傳)을 왜 혈맥(血脈)이라고 했을까. 피와 맥은 생명이다. 조사의 혈맥은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 왔을 때, 부처님의 정신을 바로 알고 자기 후손들에게 부처님의 뜻을 바로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중국과 인도를 찾아가신 우리 선사(先師)스님들이 계셨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이나 그 밖의 기록에 몇 분의 이름이 남아있지만, 실은 그보다 더 많은 스님(求法僧)들이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 전하기 위해 그 멀고 험한 길을 떠나가셨다. 이 분들 가운데는 도중에 굶어 돌아가시고, 얼어 돌아가시고, 맹수에 잡혀서 돌아가시고, 병고로 돌아가신 분이 많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 분들의 이름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전해주기 위해 자기 한 몸을 돌보지 않은 이러한 훌륭한 스님들이 계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그 은혜 속에서 살고있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한국의 부처님 제자들은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어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한 민족이 정신적 의지 처로서의 성지나 심성을 개발할 수 있는 도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그 의의가 크고 중요하다. 우리 불교는 이러한 도량과 성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이 성지와 도량을 가꾸어 모든 중생에게 평화스럽고 행복하게 사는 길을 보여주어야 할 책임을 지고있는 것이다. 사회적인 동요나 불안이 있을 때 거기에 뛰어들어 중생의 이익과 안녕을 위해 정의를 실현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성지를 찾아 순례하고 도량을 찾아 기도 정진하여 내면의 길을 추구하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부처님 제자들은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게 영원한 가치관의 세계, 평화와 자비의 길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캐나다 선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