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편집 /향적·시명 스님
부산 불교의 사령탑(司令搭)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 범어사는 초겨울답지 않게 포근하였다. 아름다운 송림(松林)과 대나무 숲은 푸른 산 기운을 내뱉고 계곡(溪谷)에 흘러가는 물소리와 숲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돌깨는 소리, 인근 암자에서 낭낭히 들리는 목탁 소리가 서로 어울려 산아래 남도(南都)의 번잡함과는 대조적이었다. 그 전에 법당 곁에 봉안되어 있다가 금강문(金剛門)아래로 새로 옮겨 모신 칠층(七層) 사리탑(舍利塔) 주위에는 몇몇 신도들이 합장(合掌)한 채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범어사는 본래 의상스님이 창건하신 화엄십찰(華嚴十利)의 하나로 처음부터 섭화중생(攝化衆生)의 이념(理念)아래 개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국방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창건 당시부터 원효·의상을 비롯한 고승석덕(高僧碩德)이 주석(住錫)하였으며 근세(近世)에는 용성(龍城) 성월(惺月)스님을 비롯하여, 동산(東山), 설봉(雪峰), 동헌(東軒)스님과 같은 눈 푸른 용상(龍象)들이 지내면서 납자를 제접하여 선풍(禪風)을 드날리었다.
최근에는 다시 옛 선사(先師)들의 고준(高峻)한 법맥(法麻)을 잇고 수도(修道)하는 승풍(僧風,)을 진작시키고자 특별 수도원인 휴휴정사(休休精舍)를 건립하여 지효(智曉) 큰 스님께서 주석하시면서 좌선 학자들을 지도하시며 수선(修禪)에 힘쓰고 계신다.
이 수도원은 처음부터 일반인은 물론 스님들도 그곳에서 수선하는 정진대중 말고는 들어갈 수 없는 데다가 묵언(默言) 정진하므로, 우리도 대담(對談)을 부탁드리면서 큰스님과의 대담이 어려우리라고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수도정진(修道精進)하는 후학(後學)들을 위하여 제삼 말씀주실 것을 간청하였더니 간단히 몇 말씀주신 것을 금과옥조(金科玉條)와 같이 여기에 싣는다.
스님께서는 평생을 선승으로 지내셨으며 불의(不義)와 타협하지 않으시는 고결한 정신을, 정화(淨化) 당시 무서운 자기경책의 결의(決意)로 제방의 납자들에게 보이셨으며, 이후 무문관(無門關)에서 수행 정진후 학(鶴)과 같이 고고하게 자신을 갈무리하시면서 살아오셨다.
스님의 방은 수행승의 방이었다. 검소하며 엄격하신 스님의 인품이 그대로 나타나 보였다. 우리는 삼배를 드리고 나서 간신히 몇 말씀을 여쭈었다.
올해는 결제를 이미 시작한 곳도 있고 아직 결제를 하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은거해서 수좌들과 함께 큰방에서 정진하고 지냅니다. 그리고 운동 삼아 가끔 암자 쪽으로 포행도 하지요.
그러나 스님께서는 정진 여가에 틈틈히 능가경(楞伽經)과 기타 어록 등을 열람하기도 하신다고 시자스님이 귀뜸해 준다.
저희 같은 후학들이 어떻게 정진해야 올바른 수도생활을 할지 좀 말씀하여 주십시요.
오직 활구(活句)로 일념정진(一念精進) 해야겠지요. 그러나 공부하다 마장(魔障)이 생기면 부처님의 말씀이나 조사스님네의 어록(語銀), 그리고 선지식(善知識)의 경책(警責)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사이는 너무 쓸데없는 말이 많은 것 같아요. 공부에는 오직 실천궁행(實踐窮行)만이 해탈로 나아가는 길이지요. 선이란 불성(佛性)의 본체(本體)에 대한 돈오(願梧)적인 자기 주체화이므로 이론으로 따져서 알려고 하는 상량선(商量禪)은 참된 선이 아닙니다.
참선(參禪) 수행하는 선학자(禪學者)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정진해야 하며 선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금생에 반드시 생사(生死)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해야겠다는 대분지(大憤志)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리고 종본이래(從本以來)로 소소영영 (昭昭靈靈)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한 물건이 있다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유일(唯一)의 대신근(大信根)으로 삼아야 하며, 그것을 공부해 가는데 우리들의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현실 속에서 그 물건을 투철히 반조하는 대의정(大疑情)을 갖추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여 불입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실천의 기본 방법으로 삼고 직지인섬(直指人心)의 도리를 깊이 믿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해야 하는 것이지요. 뚜렷한 목적의식과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대분지(大憤志)를 일으켜 실천궁행을 해야 합니다.
요즘은 세속(世洛)에서도 퍽 선(禪)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시민선방(市民輝房)과 같은 것이 생겨나 좀 더 쉽게 선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한 말씀해 주십시요
부처님 말씀에 「한 마음 깨치면 곧 부처요 한 마음을 미(迷)하면 곧 중생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과연 마음이란 무엇인가? 종일 쓰고 있되 알 수 없는 그 마음을 돌이켜 비춰보는 일념으로 마음을 직하(直下)에 오득(惜得)해서 바로 쓸줄 알면 그것이 선(禪)이요 관(觀)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방편문(方便門) 가운데는 중생의 망집(妄執)에 따라 시설해 놓은 여러가지 대치관(對治觀)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스스로 족(足)할 줄 모르고 헛된 욕망을 일으키거나 육체에 대한 애착심이 불붙을 때는 부정관(不淨觀)을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이루어졌으니 언젠가는 무너지고 모든 모습은 허망하며 부정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욕심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성내고 악한 마음이 생길 때는 항상 모든 중생을 부처님의 모습처럼 생각하는 자비관(慧悲觀)을 닦아야 합니다. 인자하신 부처님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성 안내는 마음이 곧 참다운 공양구라는 생각을 하면 자연 마음이 편안하여 지겠지요.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면 연기관(緣起觀)을 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과(因果)와 연기법칙 (緣起法則)으로 움직이므로, 연기법을 잘 알면 결코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집(我執)이나 아견(我見)에 빠져있는 사람은 계차별관(界差別觀)을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주(主)와 객(客)이 둘이 아니요 피(彼)와 차(此)가 둘이 아니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므로 계차별관을 하게되면 아집에 사로 잡혀서 나만을 주장함이 얼마나 어리석은 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산란한 마음이 생기면 수식관(數息觀)을 해서 산란한 마음을 편안히 쉬고 마음을 고요히 해야 합니다. 이러한 여러 관법은 초기 불교 때부터 행해져 왔던 것으로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민들에겐 이러한 여러 관법들은 선으로 들어오는 좋은 관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침 이때 오후 정진을 시작하려는 목탁이 울리고 대중이 큰방으로 모여드는 기척에 우리는 아쉬웠지만 일어서야 했다. 담담한 표정으로 마루까지 나오셔서 배웅해 주시는 친절을 받으면서 스님이 짚고 다니시는 주장자를 자세히 보니 이런 게송이 적혀 있었다.
破抽藏天極
短 擘地頭
떨어진 누더기는 하늘을 갈무리하고
짧은 지팡이는 대지를 쪼개도다
곧 선승(禪僧)의 가풍(家風)이요 스님의 가풍이었다.
뜨락에 나서서 보니 오후 햇살은 밝은데 휴휴정사는 이제 큰 선열(禪悅)의 바다로 갈아 앉고 있었고 주련(柱聯)의 게송에는 노선사(老禪師)의 눈 푸른 안목(眼目)이 엿보여 여기에 옮겨 보았다.
問君心印作何願/ 心印誰人敢援傳
歷劫坦然無 色/ 呼爲心印早虛言
須知本自靈空性/ 將喩紅爐火裏蓮
莫謂無心便是道/ 無心猶隔一重關
殷勤寫說西來意/ 莫問西來及與東
그대에게 심인의 모습이 어떤가 묻지만
심인을 그 누가 감히 주고 전할수 있을건가
영겁을 지내도 결코 그 빛은 변함없나니
심인이라 하여도 이미 헛된 말
스스로 신령스런 공한 성품 알려고 하면
활활 타는 화로 불속 연꽃에나 비유할까
무심이 도라고 말하지 말라
무심도 오히려 한 관문이 막혀있네
은근히 그대에게 서래의를 말하리니
서쪽에서 왔느니 동에서 왔느니 부질없이 묻지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