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알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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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바라봅시다 - 이죽내
2000년 06월 220호
인간이 인간인 것은, 그리고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것은 ‘알 수 있음’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신건강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사화복은 ‘앎’의 문제에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앎에는 지적知的 앎과 인간의 본성을 통한 앎이 있다. 지적 앎이 머리를 통해 아는 앎이라면, 인간의 본성을 통한 앎은 인간의 본성을 밝혀 아는 앎이다.
이 차이를 『도덕경』에서는 학學과 도道로 구별하고 있다. 학문은 하면 할수록 매일 늘어나고(爲學日益) 도는 하면 할수록 매일 줄어들어 결국에는 무위無爲에 이른다(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고 했다. “학문은 하면 할수록 매일 늘어난다”는 것은 지식이 늘어난다는 뜻이니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다. 그러나 “도는 하면 할수록 매일 줄어들어 결국에는 무위에 이른다”는 것은 수도修道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다. 수도는 마음을 밝혀 마음의 눈을 뜨게 하고 마음의 귀를 열게 하는 것이다. 마음을 밝히려면 지식이론이나 개념 등 외적인 것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매달린다는 말은 집착한다는 말이다. 집착하는 것이 문제이지 지식이론이나 개념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도는 하면 할수록 매일 줄어든다는 것”은 수도를 하면 할수록 외적인 것에 집착하는 마음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불취외상不取外相과 같은 뜻이다. 집착하는 마음이란 다름 아닌 “나”我의 집착하는 마음이다. 집착하는 “나”는 항상 집착을 통해 무엇을 하고 있다. 집착을 통한 행위는 착각이다. 그러므로 집착에서 벗어날 때 참으로 볼 수 있고 참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집착이 없어진 상태를 무아無我로 표현하고 있다. 무아란 “나”가 없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붙어있는 집착이 없어진 것을 말한다. 집착하는 ‘나’가 하는 것이 유위有爲라면, 집착이 떨어진 상태에서 하는 것은 무위이다.
여기서 지적 앎은 유위적 앎, 인간의 본성을 통한 앎은 무위적 앎에 대응시켜 볼 수 있다.
과학적 의미의 지적 앎은 가시적可視的인 사실만을 대상으로 한다. 그 사실이 드러내는 의미를 보는 것은 관심 밖에 있다. 왜냐하면 그 의미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순한 일 예로, 남편을 여읜 어떤 여인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지적 앎은 눈물의 양이나 성분 등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다. 그녀의 눈물이 나타내는 의미인 슬픔은 관심 밖에 있다. 슬픔이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슬픔이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는 없지만 그녀의 모습을 보고 슬퍼서 운다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다. 이렇게 슬픔이라는 의미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본래적으로 ‘알 수 있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이런 식의 이해가 무위적 앎이다. 반면에, 눈물이라는 사실 즉 눈물의 양이나 성분을 알기 위해서는 측정하고 분석하는 도구를 유위적으로 동원해야 한다.
그러나 지적 앎과 인간의 본성을 통한 무위적 앎은 상호 보완적이다. 객관적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하고 그 사실이 드러내는 의미를 보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서양의 앎은 지적知的 앎에 편중되어 왔고 동양의 앎은 무위적 앎에 편중되어 왔다. 서양의 자연과학의 우위, 동양의 정신과학(道)의 우위를 가리키는 동도서기東道西器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지난 일세기에 걸쳐 우리는 아쉽게도 서양의 영향을 창조적으로 융합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수용한 나머지 서양을 닮아갔다. 인간 본성의 실현을 근본가치로 여겨왔던 우리의 전통적 가치관이 서양의 외부 지향적 가치관으로 대체되다 싶이 되었다. 동양의 진리추구태도가 “마음 밖에서는 구할 것이 없다”(勿求心外, 心外無物)라고 한다면 서양에서는 “마음 밖에서만 구할 수 있다”(nihil sit in intellectu quod non antea fuerit in sensu)이다. 그러나 마음 속에서도 구할 수 있고 마음 밖에서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깨우치기만 한다면, 마음 속과 마음 밖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외합일이요 동서합일이다.
그러나 깨우침이 부족한 우리의 현실에서 모든 것을 밖에서 구하는 서양의 외부 지향적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그런 가치관에 따른 지적 앎의 지배이다. 지적 앎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무위적 앎은 억압될 수 밖에 없다. 무위적 앎의 억압은 인간본성과 의미의 억압이다. 그 결과 인간과 사물의 모든 현상은 무의미하게 되어버린다.
지적 앎은 과학기술을 발달시켜 인간의 외적, 물질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는 위력을 갖고 있지만 인간의 내적, 정신적 삶을 변화시키는데는 매우 무력하다. 가령, 기분이 우울하거나 불안할 때 설령 그 원인을 안다고 해도 그 기분을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다. 기껏해야 지적 앎을 통해 만들어낸 항우울제나 항불안제로 증상을 일시적으로 완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더더구나 지적 앎으로 인간을 지혜롭게 하거나 인간의 본성을 깨닫게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지적 앎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지적 앎과 무위적 앎은 상호보완관계에 있다. 그러나 무위적 앎은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생래적인 것이고 지적 앎은 후천적으로 얻어진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일차적으로 무위적 앎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무위적 앎이 본本이고, 지적 앎은 말末이다. 이런 본말의 관계를 잘 알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본말의 전도를 넘어 본말의 단절에 있다. 즉, 지적 앎의 독선적 일방성으로 인해 생겨난, 지적 앎과 무위적 앎의 단절에 있다. 지적 앎은 무위적 앎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무위적 앎은 지적 앎의 뿌리이다. 그러기에 지적 앎은 무위적 앎으로부터 자양분을 받아야 올바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지적 앎은 지혜가 없는 지식이 되어 삭막하고 공허해진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이 이를 대변해 주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노이로제 현상 가운데는 그 원인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지적 앎은 항상 주관과 객관이라는 이원적 관계에서 대상을 분별하는데 그 특징이 있다면, 무위적 앎은 주객을 초월하는 무분별지無分別知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지적 앎에서 일어나는 분별은 집착에서 생겨나는 분별이다. 그러나 무위적 앎의 무분별은 집착적 분별을 없앰으로써 드러나는 무분별속의 분별이다. 말하자면, 지적 앎에서 일어나는 집착적 분별이 아니라, 그런 분별이 없어짐으로써 드러나는 진여眞如한 상태의 분별이다. 다양한 현상과 본질이 비일비이非一非二의 관계 속에서 ‘하나로’ 여실히 드러나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이치이다.
인간의 본성에 바탕을 둔 무위적 앎을 근본으로 하여, 자신의 본성을 밝혀나갈 때 자신과 세계를 바로 볼 수 있고 종국에는 이사무애理事無碍, 사사무애事事無碍의 걸림이 없는 앎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궁극적 정신건강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