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사회교육원 ‘선禪의 이론과 실제’ 강좌시간, 진지한 자세로 참선에 몰두하고 있는 이들의 어깨 너머 창밖으로 스치는 신록이 눈부시다. 저렇듯 생명의 광명을 뿜어내고 있는 신록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때로 아주 오래 전 오대산 적멸보궁에서의 치열했던 스무하루가 떠오른다. 그때도 조촐한 적멸보궁을 둘러싸고 있던 나뭇잎들이 눈부셨고, 그 오월 신록의 눈부심이 만행길에 나선 수행자의 발길을 머물게 했었다. 출가하여 행자시절을 거쳐 선방에서 다섯 해, 강원에서 네 해를 마치고 ‘앞으로 중노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명제를 놓고 떠난 첫 만행길 끝에 다다른 곳이 적멸보궁이었다. 그곳에서의 이십일일기도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정진이었다. 하루 스물네 시간 용맹정진을 하기로 하고 새벽 세시에 예불을 드리는 것을 시작으로 천수경 독송을 마치고 나면 석가모니불 정근 한 시간, 절 한 시간, 참선 한 시간, 이렇게 되풀이하여 정진했던 것이다. 공양시간 잠깐과 뒷간 가는 시간 말고는 오직 기도정진에 몰입하고 스무하루를 보낸 후, 나는 그때 그 기도를 통해 ‘어떤 죄업도 소멸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을 온전히 체득할 수 있었다. 정진을 마치고 회향하던 날, 문을 열고 나오자 한낮이었는데도 해가 열 개는 뜬 것처럼 환해지면서 주변 나뭇가지 잎새마다 황금부처님이 앉아 광명을 놓으시며 무수한 법문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환희로움으로 그 법문을 보고 들었던 그 시간 이후로, 수행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결정했음은 물론 망설임 없이 하는 일마다 확신을 갖고 살아왔다. 칠십평생 나날이 즐겁고 행복했으니 소유한 것 하나 없이도 충만하게 존재할 수 있었던 수행자로서의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고향 원산을 떠나 피난길에서 만난 몇 번의 지옥 경험 끝에 내려온 부산에서 불심이 깊고 참선을 하던 예순여섯 가량의 한 인로왕보살을 우연히 만난 것이 내 출가에의 시초였다. 먹고 사는 데 아귀다툼인 사바세계에 선뜻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학생, 불도를 닦는 게 어때요’ 하는 그분의 권유에 따라 간 곳은 부산 서면의 선암사였다. 때는 칠월 백중 하안거 해제일이었는데 자그마한 절에 전국에서 피난온 스님들이 사십여 명, 법당과 마당에 신도가 사백여 명은 모여 있었다. 조실스님은 향곡 스님, 주장자를 내리치며 ‘진정한 해제는 화두를 깨쳐 견성하는 데 있다’는 말씀이 불교에 문외한인 내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고, 파르라니 깍은 머리의 수십분의 스님들이 꼿꼿이 앉아 법문을 경청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기둥 밑 한켠에서 ‘이런 세계도 있었구나, 법의 세계가 이런 것이구나’하는 것을 느끼며 이미 발심하고 있었다. 점심공양 후 조실스님께 인사를 드리니, 열여덟 소년을 깊은 눈길로 바라보시던 스님께서 ‘니 뭐할라꼬 중노릇하려 하나’ 하셨다. 뭐라고 대답을 했으나 조실스님께선 아무 말씀 없이 몸을 좌우로 흔들고만 계셨고, 그 시간 그렇게 나는 행자시절을 시작했던 것이다.
행자시절 한 해 남짓, 부목을 거쳐 후원에서 국 끓이고 반찬하는 소임을 맡아 착실히 일을 하며 그 시절 일생 동안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전부를 익혔다. 장 담그고, 김장하고, 엿고고, 보름에 한 번 두부 만드는 일 등 안 배운 것 없이 배웠으니 지금도 안 해 그렇지 큰시어머니 노릇 얼마든지 할 수 있을 정도다. 종이에 깨알같이 써 가지고 다니면서 ‘능엄주’를 보름만에 외웠던 일이나, ‘초발심자경문’과 ‘사미율의’를 석암 스님께 배웠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행자로 들어가 한 달쯤 후였을 것이다. 감사스님으로 계셨던 석암 스님께서 불러 중노릇하려 하는 소견을 물은 다음 하신 말씀은 이러했다. ‘네가 앞으로 꼭 해야할 일이 하나 있다.
네가 살아온 열여덟 해 동안의 업을 모두 없애야 한다. 그릇에 새 것을 담으려면 새 것을 넣어야 온전한 법, 옛의 독한 것이 남아 있으면 다 독이 되어버린다. 업을 모두 없애야 계를 받을 수 있다. 그러니 새벽 세시 예불 전 법당에 가 백팔배 참회를 하도록 해라.’ 그렇게 시작한 백팔배를 하루도 빠짐없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으니, 내겐 좋은 수행의 한 방법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당시 선암사엔 향곡 스님을 비롯해 지월 스님, 서옹 스님, 서암 스님 등 선지식을 모시고 사십여 명의 수좌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있었으니 선방 분위가 늘 진지했었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행자시절을 보낸 탓에 계를 받고 다섯 해 동안 자연스럽게 참선수행을 했던 것이다.
어쨋거나 그렇게 일찌감치 ‘수행의 진짜’를 눈으로 배우고 익혔음인지 공양간의 일이 끝나는 대로 행자들끼리 마주 앉아 참선을 하곤 하다가 ‘성도재일을 기념하기 위한 칠일 용맹정진’을 하게 되었다. 행자도 본인이 원하면 참가할 수 있다 하여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벼들었으나, 문제는 지옥과도 같은 졸음이었다. 오십분 참선을 하고 십분 경행을 했는데, 화두를 받아 한 이틀까지는 잘 견뎌냈다. 사흘째 되니 졸음이 쏟아져 견딜 수가 없었다. 장군죽비를 어찌나 자주 맞았던지 어깨가 부어오를 정도였다. 제일 말석에 앉아 있던 나는 입승스님이신 지월 스님과 마주 보고 앉아 있게 되었는데 졸다보면 스님께선 한결같이 그림처럼 앉아 계시는 것이었다. 그걸 보고 평소 정진으로 얻은 근력이 저렇듯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꼈었다. 그러다가 닷새쯤 되던 밤 열두시, 어디선가 ‘쾅’ 하는 대포소리가 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다름아닌 내가 뒤로 훌렁 넘어져 있는 것이었다.
등허리의 식은 땀과 함께 솟아나온 그 부끄러움을 아는 이는 알 것이다. 망신은 당했으나 그렇게 고비를 넘기고 나머지 시간을 잘 보냈는데, 참선정진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 있는 것인가를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 세 시간을 앉아 있어도 아무 일없음을 경험했던 것이다. 또 하나 잊혀지지 않는 것은 용맹정진이 끝나고 모두 하루 정도는 뒷방에서 잠자는 것이 허락되어 밀린 잠을 자고 나왔을 때 입승 지월 스님께선 평소처럼 그대로 좌선하신 채 선정에 들어계셨던 모습이었다.
늘 진지함만이 감돌았던 도량에서 훌륭한 스님들을 모시고 행자시절을 짬지게 보내고 계를 받던 날, 내 법사스님이며 계사스님이 된 석암 스님께서 수계식하는 장소에서 이름을 주었으니, 평생을 나와 함께 한 인환印幻이었다. ‘이 세상의 모양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실체 있는 것이 무상한 것인 줄 알 때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때 삼라만상이 그대로 비추는 것이다. 실체 있는 것은 환幻과 같으니 뿌리가 없는 것, 도장찍듯 그것을 확실하게 알라’. 간결하면서도 불법을 다 담고 있었던 석암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행자시절을 그렇게 마감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저절로 행복할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스트레스는 더 많아지고 지구는 병들어 환경은 걷잡을 수 없이 파괴되고 있다. 행복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살아가는 속에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면서 사는 데 있다. 역사창조는 인간이 하며,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다. 이 ‘마음’이 모든 것의 기본인데 사람들은 매일 그것을 쓰고 살면서도 그것의 실체를 모른다. 자신 속에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쓰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밖으로 모으고 쌓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놓고 비워서 내 자신의 빛이 그대로 환하게 드러나는 것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참선은 겹겹이 쌓인 업장을 자신도 모르는 새에 녹게 한다.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삼업이 그대로 쉬고 온갖 것을 다 놓아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근본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기필코 뚫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화두를 끌고 나가면 되는데, 그러면 모두 행복해질텐데 왜 그 길을 마다하는지 모르겠다. 깨달음은, 그저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는 데 있는 것이다. □
정리 / 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