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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기독교의 자기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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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종교 - 윤영해 2000년 06월 220호
사람들이 종교에 열광했던 적도 많았다. 한 때는 종교가 우리들 삶의 절대적 원리였었다. 인류는 약 20만 년 전, 죽은 조상이나 힘있던 자들의 뇌수腦髓를 먹고 그 해골을 모아두면서부터 종교적 삶을 시작했다. 10만 년 전, 그냥 버려 두던 죽은 사람들을 땅 속에 묻으면서부터 자신들의 삶 전반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특히 2500여 년 전부터 위대한 종교적 지도자들이 속속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인류의 삶을 지배해온 원리는 종교였다.

탈종교화의 시대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종교를 떠나고 있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찰스다윈이 1859년에 쓴 『종種의 기원』이라는 책을 읽고 과학적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리고 양차兩次대전의 대량학살과 같은 인류의 불행을 예방하는 데 종교가 완전히 무력하다는 사실을 터득하면서부터 사람들은 종교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국가는 세금으로 운영된다. 이 세금으로 시행하는 교육이 공교육이다. 대부분의 현대국가들은 이제 더 이상 세금으로 종교를 가르치지 않는다. 여기서도 현대사회에서의 종교의 위상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제 이 시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는 과학과 경제와 정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이 생산하는 풍요와 편리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살아간다. 아직도 자신의 삶을 종교적 가르침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지극히 소수다. 이제는 그 소수마저도 폭발하듯 발견되는 과학적 지식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점잖게 말하자면 현대는 탈종교화의 시대다.
아직도 종교를 운위云謂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진짜 이유는 종교의 악세사리적 기능이 주는 매력 때문이다. 종교가 그들의 관혼상제를 치장해주거나 혹은 그런 과정에서 수반되는 경제적 이윤을 남기기 때문이다.

과학의 불완전함
과학적 성과들이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는 더 이상 재론의 대상이 아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엄청난 풍요와 편리와 자유를 선물한다.
그러나 첫째, 과학이 인간의 문제를 완전하게 궁극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과학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절대적이고 완전한 해결책이 아니다. 그것의 일부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일 뿐이다. 예컨대 과학은 자신의 성과를 어떻게 정의롭게 분배하느냐의 문제를 논하지 않는다.
과학적 성과의 분배는 과학적 성과 그 자체보다도 우리의 행복에 더 결정적일 수 있다. 둘째, 과학은 심각한 부작용을 낳는다. 핵융합의 발명처럼 과학적 성과 자체가 안고 있는 부작용은 물론 환경의 파괴나 오염 또는 자원의 고갈처럼 과학적 성과를 누린 후에 남는 부작용이다. 과학은 우리에게 희망도 주지만 완전하고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더욱이 심각한 불안과 위기를 함께 몰아온다. 그래서 지성들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과학과 종교의 협력을 역설하기도 한다.

종교의 궁극성
대부분의 종교학자들은 폴 틸리히의 ‘궁극적 관심’이라는 종교의 정의에 동의한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 중의 하나는 종교는 인간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종교적 성취는 인간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가장 모범적인 종교인라고 할 수 있는 세계 4대 종교의 창시자들을 성인聖人이라고 부른다. 이는 그분들이 성, 즉 거룩함을 인격으로 구현했다는 뜻이다. 거룩한 인격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여기에는 다양한 논의가 있다. 하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거룩한 인격이란 헌신과 봉사, 겸허와 경건 등의 희생적 덕목을 실천하는 인격을 가리킨다.
과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모든 인간문제는 희생적 덕목과 반대되는 이기심에서 비롯한다. 이기심은 경쟁을 낳고, 경쟁은 반목과 갈등, 질시와 알력을 낳고, 이는 불안과 불화로 발전한다.
진眞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학문도, 선善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윤리도, 미美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예술도 헌신과 봉사, 겸허와 경건 등의 희생적 덕목을 논하지는 않는다. 성聖이라는 가치로 요약되는 이러한 덕목을 추구하는 것은 오직 종교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덕목을 구현한 인격만이 인류를 속박과 불화에서 벗어난 자유와 평화의 궁극적 행복으로 인도할 수 있다.

불교와 기독교의 자기버림
기독교는 믿음과 사랑의 종교이고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종교다. 지혜와 믿음이 불교와 기독교의 특징을 변별辨別적으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 준다면, 자비와 사랑은 두 종교의 유사類似적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 불교와 기독교의 수많은 차이점들은 궁극적으로 자비와 사랑이라는 개념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종교를 두 마디로 결론짓는 지혜와 자비, 믿음과 사랑 중에서 단 한 마디씩만을 고르라면 난 분명히 자비와 사랑을 택한다. 나는 두 종교의 궁극적 가르침이 자비와 사랑에 있다고 믿는다. 불교와 기독교는 자비와 사랑의 종교다. 자비와 사랑을 달리 말하자면 헌신과 봉사, 겸허와 경건으로써 너와 내가 하나되는 것이다. 자비와 사랑의 반대말은 이기심이다. 따라서 자비와 사랑을 단 한 마디로 표현하면 자기버림이 된다. 나는 불교와 기독교를 이렇게 자기버림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읽는다. 우리는 늘 자기를 지켜서 자유를 얻으려 한다. 그러나 붓다와 예수는 자기를 버리는 자비와 사랑으로써 자유를 얻으라고 한다. 우리는 자기를 지키는 힘으로써 평화를 유지하려 한다. 그러나 붓다와 예수는 자기를 버리는 자비와 사랑만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자기버림으로 찾는 구원
자기를 지키려는 마음은 이기심이다. 이기심은 죽음을 포함한 모든 부자유의 원천이며 온갖 불화의 근원이다. 죽음마저 초월하는 자유나 온 세상을 하나되게 하는 평화는 오로지 자기버림으로부터 가능해진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버림의 위대한 힘을 깨닫고 믿는다면 온 세상에 자유와 평화가 가득할 것이다. 아니, 불자와 기독자들만이라도 참으로 자기버림을 실천한다면 온 세상이 자유와 평화로 넘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들의 그러한 가르침을 들은 지 2000년을 더 넘긴 오늘도 여전히,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섬기는 죄와 어리석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혹자는 말한다. 인간이 어떻게 자기를 포기하거나 버릴 수 있느냐고. 진정코 그렇다면, 우리에게 자유나 평화는 영원히 없을 것이다.
종교적 인격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하고 행복으로 이끌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다. 자기버림의 종교적 인격은 실패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가장 안전하고 가장 확실한 우리의 희망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종교 없이는 살 수 없다. 우리는 과학적 성과만으로는 온전히 행복할 수 없다. 불교와 기독교는 서로 경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은 경쟁보다는 협력이 필요한 시기다. 온 세상 사람들이 과학적 성과에만 맹종하여 경쟁으로 달려가고 있는 지금 불교와 기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적 인격으로 살아가야만 할 이유를 함께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불교와 기독교는 지혜와 믿음의 차별에 집착하여 경쟁으로 내달릴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비와 사랑의 유사함, 즉 자기버림의 종교적 인격만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구원할 것임을 설득할 일이다.
이것이 여기서 내게 주어질 지면이 더 이상 없는 이 순간에 하고 싶은 마지막 고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