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무관 스님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호계삼소 - 박숙정
2000년 06월 220호
산사를 향해 가지런히 매달린 연등을 보며 부처님이 이 사바세계로 오신 까닭을 생각해 본다. 굳이 앞날을 꿰뚫는 혜안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길, 부처를 이루는 길을 몸소 일깨워주시기 위한 어려운 걸음이셨다.
그 부처님이 이 땅에 왔다가 떠난 지 어언 2,600여 년.
바야흐로 인터넷과 사이버를 매개로 초시공初時空의 세월로 접어들고 있는 시점이지만 웬일인지 인류의 정신적인 갈망은 날이 갈수록 깊고 넓어지는 느낌이다. 붓다와 예수와 공자의 가르침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
하지만 그들 성현의 가르침보다 그 가르침의 실천이 부족한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비롯되는 것 같다.
출가 이후 줄곧 승가의 교육불사에 전념해 온 무관 스님을 찾아뵙는 발길은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다.
스님은 “절이 학문하고 철학하는 곳인 줄 알고” 입산을 할만큼 출가 이전부터 교육문제와 인연이 깊었다.
1972년에 해인사 강원의 대교과를 졸업한 지 10년이 훨씬 지난 뒤에도 청주대 도서관학과(1983년)와 동국대 대학원(1985년, 교육행정학과 석사)을 만학으로 마칠 만큼 스님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뜨겁다.
이는 ‘교육을 통해 불교의 핵심을 이해하는 방법을 후학들에게 알려주는 것’을 자신의 서원으로 세운 까닭이기도 하다.
듣기로는 지금도 전통강원(승가대학)에서의 위계질서와 교육방법은 엄격하기가 군대의 규율을 뛰어넘을 정도라고 한다.
감히 윗반 스님들의 얼굴조차 제대로 마주하지 못할 정도의 엄격함 속에서 학인 스님들은 비로소 출가사문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바로 그 초발심의 마음으로 경전을 익히고 치열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길을 무관 스님은 승가의 교육이라고 정의한다. 세간에 ‘평생교육’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문들의 가르침과 배움도 강원 시절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끝없는 배움의 길에서 일부의 사문들은 옆길로 빠지기도 하고 자신만의 아집으로 마음의 벽을 쌓기도 한다.
이런 불연속적이고도 갈등어린 세속적인 습을 끊임없이 깨뜨려 나가는 일이 바로 사문의 수행이다. 그래서 종단에서는 정화 이후 역경과 포교, 도제양성 즉 교육을 3대 지상과제로 설정한 바 있다.
재가자들도 기본적으로 삼귀의계와 오계를 수지해야 불자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사문들에겐 계율을 철저히 지켜나가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간과하지 못한다.
그래서 무관 스님은 행자시절부터 어른 스님께 들었던 “개인 독방을 갖지 말고 부처님을 모신 큰방에서 떠나지 말라”는 말씀을 꼬박 지키기도 했거니와 자신도 후학들에게 그 점을 항상 강조하고 있다. 승가僧伽라는 말이 그렇듯 또는 화합중和合衆이라는 말이 그렇듯 무릇 사문은 집단을 이뤄 살아야 사문답다는 게 스님의 지론이다. 공부가 무르익어 일정한 경지에 올랐으면 모를까, 함께 어울려 사는 걸 꺼려해 ‘독살이’를 하는 경우 대개 자기 멋대로 사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도 모르게 사문으로서의 계율을 어기는 결과를 빚는다는 말이다.
종교를 가진 사람, 성직자일수록 그 궁극적인 가르침 못지 않게 그곳에 이르는 과정과 위의威儀, 행동이 중요하다는게 스님의 생각이다.
“후학들에게 늘 잔소리를 합니다. 편한 것만 찾지 말고 출가자의 본분을 지켜라, 아무리 사소한 의식이 있더라도 가사 장삼을 수지하고 나서라.
다른 사찰이나 남의 집을 찾아갈 때는 반드시 저녁 공양 짓기 전에 찾아갈 것이며 수각이나 해우소는 미리 알아두어라. 하룻밤 자고 나면 반드시 침구와 도량을 깨끗이 청소하여 신세진 것을 보답하라.”
스님들은 물론 재가자들도
지켜 마땅한 기본적인 예절이다. 그런데 이런 기본부터 부지불식간에 무너지고 있는 게 지금의 모습이라고 한탄하신다.
계율에 바탕을 둔 반듯한 풍토가 없는 교육은 사상누각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씀이다.
열넷의 나이에 산문에 들어선스님은 금산사와 월정사에서 다른 이보다 긴 행자 시절을 보낸 뒤 희섭 스님을 은사로 수계 받는다. 벌써 사십 년 전의 일이다. 너나 없이 먹고살기 힘든 그때였으니 산사에서의 행자생활은 가난 그 자체였다.
아직도 스님은 ‘감자 서너 개에 보리쌀이 열댓 개, 쌀알이 두서너 개 붙어있던’ 월정사의 감자밥을 잊지 못한다. 그 감자에 질려 지금도 감자가 들어있는 음식에는 자주 손이 가지 않을 정도이다.
그런 물질의 가난 속에서도 스님의 깨달음에 대한 영혼의 갈망은 풍요로웠다. 금산사 시절 한 스님께 백골관白骨觀을 배운 뒤 공동묘지의 해골바가지를 찾으러 다녔던 무지함도 있었고, 그 행자 시절의 숱한 상념들을 해소하기 위해 밤잠을 줄여가며 남몰래 일기를 적던 일도 있었다.
결국 그런 행위조차 부질없다는 걸 느껴 입대 전에 일기장을 모두 태워버렸다고 한다. 한 개인의 작은 역사가 불태워지고 말았다.
지금 그 일기장이 남아 있었더라면 당시의 사회상, 행자들의 지난했던 면면들을 살펴보게 하는 귀감이 되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세속을 버린 출가 사문으로선 그런 초연함도 어울릴 듯 싶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스님은 금생에 부처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도제양성’에 자신의 모든 힘을 쏟을 것을 발원했다.
현재 스님이 갖고 있는 ‘조계종 행자교육원 유나’ 혹은 ‘교육원 교재편찬위원장’이라는 직함도 이런 서원과 그 꾸준한 실천으로 비롯되었으리라. 그래서 스님은 지금도 햇스님들에게 뼈에 사무치는 충고를 하시고는 한다.
“불교에 대한 시각은 머리 깎기 전이 다르고 행자 때, 수계 후, 부처님 경전을 보고 난 뒤가 다 다르다. 최소한 강원에서 기본 교육을 마치고 자신의 인생관을 빨리 정립하라.
발심하지 못한 이들은 일찌감치 산문을 떠나라.”
출가라는 행위 자체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려는 크나큰 발심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길은 험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역경을 이기지 못할 바에야 일찌감치 하산하겠다는 각오로 공부에 정열을 쏟으라는 가르침이다.
‘도제양성’을 발원한 스님의 출가 사십여 년은 곧 종단 교육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이를테면 현대 승가교육의 살아있는 역사인 셈이다.
스님은 사문의 길을 거의 해인사에서 지내온 셈이다.
해인사는 서기 802년, 의상대사의 손상좌인 순응조사, 이정조사에 의해 화엄도량으로 개산되어 어느덧 1,2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총림으로 불교전문 강원인 해인강원이 있다.
그동안 많은 조사들이 수행했고,고려의 의천대각국사, 희랑조사, 균여대사, 조선조의 사명대사 같은
한국불교의 등불이 된 스님들이 수행하고 강의했던 도량이다.
조선조의 꺼져가는 선맥을 이어낸 벽송 지엄선사의 수행도량인 지리산 벽송사도 해인사의 말사이다.
정화 이후 종단에서는 해인사의 법보전문강원(현 해인사 승가대학)을 비롯한 통도사, 범어사, 송광사,법주사, 불국사, 백양사, 화엄사,쌍계사, 동학사, 운문사, 봉녕사, 청암사 등에 강원講院이 세워졌다.
해인사 법보전문강원의 초대강주는 운허강백(뒤에 한글대장경의 역경원장을 지냄)이시고, 2대 성능 스님을 비롯, 명봉, 지관, 종진, 관조, 각성, 보광(현재 해인사 주지) 스님을 이어 무관 스님은 11대 강주를 역임하였고, 재직 중 6회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무려 10년 동안 중강과 강주를 역임하셨다.
또한 전국 강원 교직자 회의(1985년)를 조직하여 회장직을 맡아 전국 강원의 교직자 스님들과 함께 강원 운영과 학인이동질서, 교재 및 교수법 등 다양한 논의를 활발하게 전개하기도 했다.
1981년 종단은 10·27이라는 전대미문의 법란을 겪으면서 자운, 일타, 보성 스님을 중심으로 이부승제도 확립과 함께 단일 계단을 발족시키게 된다.
이는 오직 철저한 지계 정신을 수행의 중심으로 삼아 승풍을 진작시키기 위한 것으로 불교 교육사에 큰 획을 긋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단일계단이 발족됨으로써 종단은 승가의 위계질서에 기초가 되는 5급 사미·사미니 선발고시와 4급 비구·비구니 선발고시를 병행하여 종법이 명시한 법계와 고시의 승려분한의 승급을 부여하게 되었다.
이 단일계단 설립과 함께 승가교육의 또 다른 전환을 이루는 계기는 1994년 개혁 종단의 출범과 동시에 설립된 교육원이다. 그 이전까지 총무원의 부속기관인 교육부에 불과했던 교육원은 포교원과 더불어 총무원의 별원으로 독립됨으로써 승가의 기초·기본·전문 및 재교육의 산실로 자리잡게 되었다.
1906년 근대적인 신학문을 전수하기 위해 해인사에 설립된 명립보통학교 이래 거의 1세기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승가교육은 현재의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와중에 적어도 30년 이상 여러 위치에서 ‘도제양성’의 원력을 실천하고 있는 무관 스님은 승가교육의 중심을 지켜온 산 증인이다.
스님은 [해인]지나 해인사 승가대학에서 펴내는 [수다라]에 각별한 애정을 기울여 왔고, 한 때는 전국 유치원협회 부회장으로 혹은 룸비니 유치원 원장으로도 활동한 바 있다.
정기간행물이나 출판에 관심을 기울여온 것은 교육의 이념과 그 현장을 잇는 징검다리의 역할이 필요한 것을 절감한 까닭이겠거니와 불교식 유치원이 거의 전무했던 시절 어려운 소임을 스스로 떠맡은 그 뜻
또한 헤아리기 어렵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었다.
1990년 불교방송(BBS)이 개국되었을 때 스님은 교리와 신행프로그램인 ‘마음을 비우고’를 1년 동안 진행한 바 있다. 해인사와 서울을 왕복하면서 진행한 그 프로그램에서 스님은 단 한 번의 엔지(NG)도 내지 않았던 출연자로 당시의 방송 스탭들에게 기억되는 분이다.
한 번 마음을 내면 철저하게 준비하고 실천하려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일이다.
그 무리한 일정을 강행하면서 기어이 쓰러지고 만 후일담은 듣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현재 스님은 해인사 홍제암에 적을 두고 대구 법계사의 각종 법회를 주관하고 계신다.
상좌만 해도 9명이나 되니 이들 모두 각 교육분야에서 제 몫들을 해내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사회가 급변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종단의 교육제도 개선이나 과제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앞으로도 끊임없는 연구와 실천이 필요한 분야이기도 할 것이다. 끊임없는 교육을 통해 부처님의 정법을 지켜나가고 실천하는 이 일에 무관 스님과 같은 원력은 계속 요구되고 있을 것이다.
산길을 아름답게 수놓은 등불처럼 불자들의 갈 길은 그렇게 마련된 것이 아닐까. □
글 / 박숙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