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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같은 뿌리의 한 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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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 법전 2000년 06월 220호
동근천지미초연 同根天地未超然이요
견화여몽지근원 見花如夢指根源이로다.
겁후공재무영수 劫後共栽無影樹하니
영인각억노남전 令人却憶老南泉이로다.
같은 뿌리의 천지를 뛰어넘지 못하니
꽃이 꿈같다 하여 근원을 가리켰다.
겁劫 뒤에 그림자 없는 나무 다함께 가꾸니
사람들로 하여금 남전을 기억케 하려는구나.

남전보원南泉普願선사에게 육긍대부陸亘大夫가 물었습니다.
“승조법사가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이요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라. 하늘과 땅이 나와 같은 뿌리요,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한 몸이라.’고 말했는데 참으로 기특한 견해입니다.”이에 남전선사는 문득 뜰 앞에 피어있는 모란꽃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대부! 세상사람들은 이 한 그루의 꽃을 마치 꿈결같이 여기네.”

어제는 성철노사의 사진모음인 포영집泡影集을 펼쳐보게 되었습니다. 결제를 앞두면 늘 스승님이 생각납니다. 총림대중을 서릿발같은 기개로 이끌어오신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기 때문입니다. 빳빳한 회색 광목옷 차림으로 붉은 모란꽃을 배경으로 찍은 그 사진 앞에서 한동안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모란꽃 앞에서 무엇을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산승은 그러한 모습을 보고서 ‘남전모란’이란 공안을 떠올렸습니다.
‘남전모란’은 재가자와 출가자간의 법거량입니다. 『전등록』이나 『조당집』에는 재가자들의 이야기가 적지않게 나옵니다. 하긴 공부 하는데 무슨 출가 재가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남전 스님은 마조馬祖 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조주趙州 스님을 당신 문하에서 배출시킨 당나라 때의 거장입니다. 안휘성安徽省 지양池陽 땅 남전산에서 선원을 열었습니다. 항상 삿갓을 쓰고 소를 쳤으며, 때로는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고 밭을 일구면서 선풍을 제방에 떨쳤습니다. 출가 전의 성씨가 왕씨인지라 스스로를 왕노사王老師라고 부르면서 30년 동안 한 번도 산을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런 선사에게 지양태수를 지낸 육긍대부가 찾아 옵니다. 그리하여 남전을 스승으로 모시는 인연을 맺게 됩니다.

어느 날 육긍대부가 남전선사에게 묻습니다.
“옛사람이 병 속에다가 거위 한 마리를 길렀는데 거위가 점점 커서 나오지 못합니다. 병을 깨뜨릴 수도 없고 거위를 죽일 수도 없으니 화상께서는 어떻게 해야 꺼낼 수가 있겠습니까?”이에 남전선사는 육긍대부를 불렀습니다.
“대부여!”
“예!” 하는 소리와 함께 남전선사는 “나왔노라!” 하고 소리를 지르니 육긍대부는 그 자리에서 깨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남전의 법을 잇게 됩니다. 남전 스님이 입적을 할 때 육긍대부도 함께 임종을 지켰습니다. 옆에 있던 원주가 물었습니다.
“대부는 왜 선사를 위하여 곡哭을 하지 않습니까?”
“원주스님이 말할 수 있으면 곡을 하겠습니다.”
이에 원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육긍대부는 이처럼 남전선사를 오랫동안 참례하였습니다. 그리고 『조론肇論』을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열반무명론」 제7 묘존妙存편에 이르러 “현묘한 도는 묘한 깨달음에 있고, 묘한 깨달음은 진眞에 즉卽하는데 있으니, 진에 즉하면 유有와 무無를 가지런히 관찰하고, 가지런히 관찰하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천지는 나와 같은 뿌리요, 만물은 나와 같은 바탕이다. 나와 같으면 다시 유와 무가 없고 나와 다르면 회통會通하는 도리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벗어나 있지 않고 얽매어 있지도 않되 도가 그 사이에 존재한다.”는 구절을 보고 매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루는 앉아 있다가 이 두 구절이 너무 기특해 남전 스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조론의 저자 승조僧肇법사는 후진後晉시대의 고승으로 구마라집의 제자입니다. 육긍대부의 이러한 질문은 그런대로 볼만 하지만 계교사량計較思量의 이치에서 한 뼘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계교사량의 이치를 극칙極則이라고 한다면 세존께서 무엇 때문에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셨으며, 달마조사께서는 왜 서쪽에서 오셨겠습니까? 선지禪旨는 이를 뛰어넘는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남전 스님은 그 급소를 끄집어내어 그의 집착을 타파해 줍니다. 뜨락에 핀 모란꽃을 가리키며 대부를 부르면서 ‘세상사람들은 이 한 그루의 꽃을 마치 꿈결같이 여기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만길 벼랑 위에서 사람을 떨어뜨려 목숨을 잃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공부를 한다는 사람이 아무 것도 아닌데서 전도된 견해를 낸다면 미륵불이 하생한다고 해도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꿈 속에서 꿈을 깨려해도 깨지 못하다가 곁의 사람이 부르는 소리에 깨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남전 스님의 안목이 바르지 못했다면 분명히 육긍대부의 질문에 휘말렸을 것입니다. 남전 스님의 이러한 말은 만약 안목이 살아 움직이는 자가 듣는다면 으뜸가는 제호의 맛과 같겠지만, 안목이 없는 자가 듣는다면 도리어 독약이 될 것입니다.

설두중현雪竇重顯선사는 여기에 대하여 이렇게 송頌하였습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따로따로가 아니며(聞見覺知非一一)
산과 물의 경관이 거울 속에 있지 않다.(山河不在鏡中觀)
서리내린 하늘에 달은 지고 밤은 깊은데(霜天月落夜將半)
누구와 함께하랴, 맑은 연못에 차갑게 비치는 그림자를.(誰共澄潭照影寒)
사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각각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산과 물의 경관이 거울 속에 있지 않습니다. 만일 거울 속에 있는 산하를 구경한 뒤에야 깨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거울이라는 것을
여의지 못한 것입니다. 산하대지와 초목총림을 거울로써 비춰 보지 마십시오. 거울로써 비춰보면 바로 두 개가 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산은 산 물은 물로서 모든 법이 법의 제자리에 안주하고 있으며, 세간의 모습은 항상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산하의 경관이 거울 속에 있지 않다’고 했는데 무엇으로 비추어 봐야 알겠습니까? 이렇게 되자 ‘서리내린데 달은 지고 밤은 깊은데’로 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리들과 함께 할 수 있지만 ‘저쪽’은 스스로가 알아차려야만 합니다. 따라서 설두 스님은 본분사本分事로 사람을 지도함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와 함께 하랴, 맑은 연못에 차갑게 비치는 그림자를’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는 스스로 비춰보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과 함께 비춰보는 것입니까? 이는 모름지기 움직이는 마음과 알음알이를 끊은 뒤에라야 이러한 경계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남전모란’의 공안을 만일 이理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남전이 육긍대부를 한 점도 속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리 밑의 털 한 가닥도 건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사事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육긍이 남전을 한 점도 속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꿈에도 그의 땀냄새 조차도 맡지 못한 것이라고 대혜종고大慧宗선사는 평評하고 있습니다. 사실 승조법사가 말한 ‘천지는 한 뿌리요 만물이 한 몸’이라고 한 것은 마치 닻을 깊이 던지고서 닻줄을 안고 배를 뛰울줄만 안 것과 같고, 또 다리의 기둥을 안고 헤엄을 치려는 것과 같습니다. 파도를 거슬러 키를 잡고 바람을 보아서 돛을 달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승조법사가 허공을 꽉 막으니 왕노사가 숨을 곳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 앞에서 산승도 감히 꿈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시회 결제대중이여!
정말로 무엇을 ‘같은 뿌리의 한 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잘 참구해 보시기 바랍니
다.

대부착회조사종 大夫錯會肇師宗하고
각위삼라일체동 却謂森羅一體同이라
번억남전무한의 飜憶南泉無限意하니
정전화발소하풍 庭前花發笑夏風이로다.
대부는 조법사의 참뜻을 잘못 알아
삼라만상 모두가 동일하다 하였네.
남전의 끝없는 뜻 돌이켜 생각하니
뜰 앞에 꽃이 피어 여름바람에 웃는다.□

2544. 하안거 결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