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미소는 온유하다. 깨달음의 순간은 광풍이 몰고 간 뒷자리는 아닐 것이며, 오로지 어미 닭이 알을 품는 따스함과 끈기로 말미암는다. 깨달음에는 음陰과 양陽의 구분도 없다.
그 병甁 안에는 밤과 낮이 있으며 새벽과 저녁의 햇살도 오롯이 담겨 있다. 태양이 대지를 품는 것이 이와 같으며 혹은 달이 물을 당기고 밀어 썰물과 밀물을 만들매 손이 없이도 자유자재로울 수 있는 것이 또한 이와 같다. 어미 닭이 어느 알이든 구분하지 않는 것과 같이 또한 태양이 대지의 어느 곳에 차별을 두지 않는 것과 같이 여래의 미소는 어느 자리든지 구분하지 않는다. 이처럼 깨달음은 세상의 이치를 모두 품게 되므로 그 미소가 넉넉하고 풍요로울 수 있는 것이다.
병 속의 새가 그 병의 유리를 의식하지 않듯이 감실龕室 안의 부처님도 감실에 구애되지 않는다. 눈에 잘 띄는 곳에 돋을 새김으로 부처의 세계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중생의 상정常情이다. 그런데도 감실 부처님은 남산의 작은 골짜기 아래를 택하여 그것도 감실을 파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어두운 곳에 좌정하고 계신다. 골짜기가 산 전체로 보면 음陰이며 또한 아침 햇살이나 조금 들까 하는 감실 속이니 다시 음陰 이다.
어둠에 또 어둠을 보탠 곳에서 태양 보다 밝은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이 부처님의 미소이다.
파안破顔의 미소도 아니고 천녀天女의 교태嬌態도 아니다. 그저 보일 듯 말 듯이 상호 전체에 번지는 미소는 이 세상 모든 어둠을 품고도 남음이 있는 그러한 미소이다. 이 미소 속에서 중생은 무한한 밝음을 느끼고자 하였고 음陰에서 양陽의 실마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 바로 중생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어둠에서 번저 나간 밝음이니 이것이 소양지기小陽之氣이다. 작은 등불로 세상을 밝히고자 한 마음이었으므로 그 모습은 씩씩한 장정보다는 소박한 아낙의 모습으로 그 진리를 밝히는 것이 오히려 어울렸을 것이다. 그래서 감실의 부처님은 여인의 모습이 역력하다. 두터운 불의佛依 자락으로 몸을 감싸고 머리에는 두건을 얹은 모습이 그저 수줍지만 또한 마음을 쉴 수 있는 여백을 만든다. 이 부처님이 조성되었을 시기는 대체적으로 옛 신라의 선덕여왕 치세기治世期이다. 여왕을 왕으로 모셨던 신라인들은 막연히 어머니의 품과 같은 향수를 저 그윽한 감실 부처님으로 형상화했으리라.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한결같다. 어머니는 마치 깨달음의 자리처럼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중생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천년 전이든 천년 후든지 혹은 다겁多劫의 세월이 지날지라도 진리의 자리가 변하지 않는 것같이 어머니의 자리는 늘 그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