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타주의
배타주의는 자신의 종교만이 유일한 참진리이며 타종교는 모두 오류거나 허위라고 주장한다. 이는 유일신을 믿어온 종교들이 타종교를 대하는 가장 전형적인 태도이다.
배타주의자들은 자신의 신앙만이 참이기 때문에 진실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종교는 오직 자기 자신의 종교뿐이라고 주장한다. 즉, 자신의 종교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들은 혹세무민이나 미신의 가르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타종교는 척결이나 처단의 대상이다. 그래서 배타주의는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개종시키려는 개종주의거나 아니면 아예 처단해버리고 마는 성전주의聖戰主義다. 배타주의는 타종교를 향해 철두철미하게 폐쇄적이다.
그러나 획일화를 거부하고 다원적 가치와 상대주의를 추구하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양식있는 지성인들은 평화적 공존이라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전제 앞에서 배타주의를 외면하고 있다.
포괄주의
포괄주의는 가장 완전한 자신의 종교가 여타의 모든 종교들을 예외 없이 포괄한다고 주장하는 태도를 말한다. 포괄주의는 일단 다른 종교들을 송두리째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배타주의와 다르다. 다른 종교의 가르침에도 어느 정도 참의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분적인 참의 요소는 전체적으로 완전한 자신의 종교에 궁극적으로 포섭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포괄주의는 자신의 종교와 타종교를 우열 관계로 파악한다. 자신의 종교야말로 최고의 진리요 최종적인 진리인 것이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는 교회 밖에서 비그리스도인으로서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을 “익명匿名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불자들을 수준 낮은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불자들이 기독자들을 익명의 불자들이라고 하며 아주 낮은 수준의 불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셈이다. 또한 예수를 예수보살이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의 포괄주의적 태도다.
포괄주의 역시 타종교를 결국 자신의 종교로 수렴하고자 하는 잠정적 개종주의다. 다만 포괄주의는 배타주의가 내놓고 휘두르는 칼을 꽃다발 속에 숨겨 지니고 있는 셈이다. 포괄주의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폐쇄적이라는 면에서는 배타주의와 마찬가지다.
상대주의
타종교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는 포괄주의와 달리 상대주의는 모든 종교의 동등함을 분명하게 인정한다. 독일의 신학자 에른스트 트릴취Ernst Troeltsch는 하느님이 서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주었고 동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불교를 주었다고 주장한다. 즉, 상대주의는 참 종교가 동시에 여러 개 있을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상대주의는 단연코 개종주의를 배격한다. 타종교인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선교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종교적으로 철두철미한 상호 존중과 평화 공존의 입장을 취한다.
이 상대주의는 얼핏 보면 매우 지성적이고 양심적이며 자기 개방에 적극적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상대주의 역시 철저한 자기 폐쇄성에 갇혀 있다. 자기종교와 다른 종교를 동시에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자기종교와 타종교가 동일한 참임을 확인하기도 전에 서로를 인정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 기만이거나 피상적인 타협주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상대주의는 진리 추구에 대한 불성실, 혹은 방기放棄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신앙을 상대적인 참 정도로만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절대적인 헌신을 바칠 수 있을까하는 문제도 생긴다. 상대주의는 자기자신의 신앙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을 불가능하게 한다. 자신의 신앙을 상대적인 정도의 참으로만 여긴다면 그 가르침에 전적으로 헌신하기 어려울 것이다. 상대주의자들은 자기종교에 대한 헌신적 열정이 뜨겁지 못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상대주의자들은 타종교인들에 대한 애정이 없다. 상대주의는 서로를 동등하게 인정코자 함으로써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태도를 갖기 쉽다. 상대주의는 나는 내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갈 터이니 너는 네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가면 그뿐이라는 태도가 된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상대주의적 태도는 불행한 타자他者에 대한 방관일 수 밖에 없다. 상대주의는 나는 나대로 행복하니 너는 너대로 알아서 행복하라는 입장이다.
배타주의나 포괄주의가 개종주의 때문에 문제가 된다면, 상대주의는 자기 만족에 안주하여 개종의 의지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상대주의 역시 자기 폐쇄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원주의
다원주의는 상대종교를 철저하게 인정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상대주의와 비슷하다.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는 참 종교나 완전한 종교를 하나만 인정한다.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는 다수의 종교를 참으로 인정한다. 그렇다면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상대주의가 진리 추구의 방기放棄와 타종교인에 대한 방관일 수 밖에 없다면, 다원주의는 이와 전혀 다르다.
첫째, 다원주의는 진리를 향해 진지하고 정직한 자기 개방을 추구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다원주의는 배타주의나 포괄주의처럼 자기 완전성의 주장에 폐쇄적으로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기 완전성을 완전히 포기하지도 않는다. 다만 자기 완전성을 잠정적으로만 주장함으로써 자기발전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흔히 말해 다원주의는 열린 종교이기를 희망한다. 둘째, 다원주의는 타종교의 신자들에 대한 진지한 이해와 애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즉,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진지한 공감과 이해를 도모한다.
다원주의는 자신의 신앙에 절대적으로 헌신하면서도 타종교를 향해 어떻게 진지하게 개방적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종교에 절대적으로 성실하면서도 어떻게 타자他者의 종교를 향해 진지하게 열려 있을 수 있을 것인가? 다원주의자들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동원하는 방법이 바로 다름 아닌 대화이다. 다원주의자들은 대화라는 방법이 그러한 목적을 성취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다. 배타주의, 포괄주의, 상대주의는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원주의만이 진리 추구와 타종교의 이해를 위해 대화를 추구한다. 다원주의는 진리에 대한 정직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에 대한 이해와 쇄신을 도모한다. 다원주의는 대화를 통해서 타자에 대한 이해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즉, 다원주의는 대화를 통한 상호변혁과 쇄신을 추구한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배타주의로 평가받아왔다. 그러나 요즈음 지성적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다원주의의 목소리가 커지며 불교와 적극적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불교는 전통적으로 배타주의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호감을 받아왔다. 더러 불교는 생래적生來的으로 다원주의라는 주장도 있지만 아직 종교간의 대화에 적극적인 불자들은 흔치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