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의 아킬레스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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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우소 - 대성
2000년 05월 219호
십여 년 전 해인강원을 막 졸업하고 곡성 태안사 금강선원에 첫 철 방부를 들여-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했던가. 부처님의 일대시교를 이력하고 이제 부처님의 골수 법문인 마음을 훔치러 기쁜 마음으로- 도반과 함께 정진하게 되었다. 그 도반은 강원 생활 할 때도 모범적인 생활을 잘해 정진력이 뛰어난 도반이었다.
그런데 그 도반과 입선入禪 첫 철에 크게 싸워 서로 죽인다고 고함치고 머리통 만한 돌을 들고 내리칠려고 하면서 너 죽고 나 살자 식으로 다투었으니, 원인을 살펴보면 참선參禪이란 참자도 모르던 시절에 둘 다 마음만 급해서 일종식에다 묵언까지 했으니……
나 또한 그렇게 하면 정진이 잘되는 줄 알고 스스럼없이 그 길을 택하게 되었다.
강원에서 교학 특히 선요, 단경 등 선어록을 접하고 강의를 받다 보면 금방이라도 산 좋고 물 좋은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 초목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자유롭게 마음껏 정진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게 된다. 강원에서의 대중과 그리고 하루의 일과는 번거로운 존재로 여겨져 많은 갈등 속에서 도심을 키우게 된다. 그러니 첫 철 방부에 대한 희망과 기대는 대단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흐르는지, 자신이 무슨 가면을 쓰고 어떤 먹이(추켜줌과 깔봄)에 의해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꼭두각시놀음을 하는지, 냉철히 살펴봄 없이 수행한답시고 자신의 육체와 시간, 공간을 제약하여 껍데기 수행을 종宗으로 삼는 정진은 비유하자면 생식에 대한 소화기능의 훈련도 없이 익혀먹고 차려 먹는 것이 번거롭다고 옹심만으로 바로 생식하여 설사와 염소 같은 똥으로 장기를 버리게 되는 경우와 같은 위험한 일이 될 줄이야.
때는 마침 하안거夏安居라 온 도량에 풀이 많이 나게 되었다. 나는 일종식을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은지라 방선放禪을 하기가 무섭게 낫을 갈아서 온 도량의 풀을 베기 시작했고, 여름철 내내 쉬는 시간이면 나의 무명초를 걷어내는 심산心算으로 마당에 풀도 뽑으면서 내 나름대로 화두를 챙기며 편안한 마음으로 한 철을 잘 마무리 할 즈음 도반이 내 곁으로 슬그머니 오더니 “금강경을 공부했다는 사람이 무슨 상相을 그렇게 내냐, 그렇게 일할 힘이 있으면 좌복에 열심히 앉아라”며 살짝 묵언을 트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이 말에 나는 화두를 잃어 버렸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기 시작했다. 이제 풀도 뽑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고 소화도 안 되어, 며칠 후 도반에게 다가가서 “야 임마! 너 살림살이나 열심히 챙기고 정진해라”고 한 대 갈기고 고함을 질러 버렸다. 그 뒤로는 굳이 글로써 표현 안 해도 다 느낌이 올 거라 생각된다. 그리고는 해제 10일을 남겨놓고 둘 다 보따리를 싸고 말았으니……
그 곳이 나의 뇌관 일 줄이야! 내게 편안하고 뿌듯한 느낌을 안겨준 그 일이 나를 폭팔케 하는 상으로 그림자 지워져 있었기 때문일게다. 중생은 다 그런 뇌관을 지니고 있다. 서로 안 건드리는 것을 상책으로 삼고 살아갈 뿐이다. 그후 지금까지 그 도반스님의 얼굴 한번 볼 수 없었다. 그 어떤 모임에도 모습을 볼 수 없었으니까.
초심자가 일종식이다, 묵언이다 하는 것들이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을 느꼈으며, 냉철한 자신의 점검없이 대중 생활에서 혼자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어떤 심적 그림자의 작용인지 새삼 느낄 수 있는 한철이었다.
아! 무심도인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