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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집 혜진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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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박숙정 2000년 05월 219호
사문으로서 혜진 스님의 행적을 더듬어 보는 것은 아직 이른 듯 싶다. 지금 그가 걷고 있는 길은 출가자로서의 길과 상당히 의식있는 젊은이로서의 가치있는 행보를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그는 이 인터뷰에 응하기를 상당히 쑥스러워 하였다.
올해 서른여섯 살인 스님은 이른바 386세대이다.
혜진 스님의 이름 뒤에 붙어있는 <나눔의 집> 원장.
그것은 우리가 특별하게 스님을 만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동안 스님은 <나눔의 집>과 함께 많은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1996년에는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충분히 젊고 열정적인 스님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지금까지 겉으로 드러난 그의 모습과는 달리 훗날 또 다른 변화를 몰고올 것이라는 예감을 갖게 하기도 한다.

스님의 속명은 배영철.
1965년 강원도 태백에서 6남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전형적인 탄광촌인 태백에서 그는 검은 빛깔의 강물을 보며 유년시절을 보낸다. 7남매를 모두 학교에 보내던 시절, 광부인 부친의 월급만으로는 도저히 학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어머니는 몇몇 형제를 데리고 경북 영주로 내려가 장사를 시작한다. 그가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칠 무렵이었다.
졸업하던 해 그는 대학진학에 실패하지만, 가족들 중 그 누구도 그의 진학을 원하지 않는다.
가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 해, 형님의 간병 차 서울로 올라와 학원 지도원 생활을 하며 재수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대학에 합격, 그리도 꿈꾸어왔던 서울에서의 대학생활이 시작된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학비와 생활비는 늘 무겁게 그의 현실을 누르고 있었다.
“대학 2학년을 휴학하고 군대에 자원했습니다. 집안 형편 때문이었지요.
그때가 1987년도니까 한창 민주화 운동의 열기가 강할 때였어요.
거의 청년시절을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학내에 불어닥치고 있는 민주화의 열기나 자유에 대한 갈망 같은 것은 제겐 생소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학우들의 용기와 희생은 제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군대에서 극심한 갈등과 좌절을 겪었습니다. 마침 신병생활을 끝내고 배치 받은 곳이 전투경찰이었습니다.
진짜 앞이 캄캄했지요.
도저히 진압부대가 되어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간신히 보급반으로 내정받아 진압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바로 코앞에서 내 학우들을 진압하는 동료들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순이었죠.
그건 분명한 이 사회의 모순이었습니다.”
스님은 성균관대 전자공학과 ‘85학번이다. 한창 민주화운동이 활발하던 80년대 중반기에 대학시절을 보냈다. 그는 가난을 피해 선택한 군대에서 힘겨운 갈등과 혼란을 겪는다.
이미 마음 안에서는 출가의 결심이 굳어지고 있었다.
대구에서 군대시절을 보낸 스님은 부대원 몇 명과 함께 대구 시내에 있는 보현사를 찾았다.
지금도 살아계신 할머니(96세)가 독실한 불교신자여서 늘 그 영향을 받아왔던 터였다. 스님은 보현사 법회를 주관하기도 하고 동료들과 함께 불교소식지를 만들어 배포하기도 한다. 어찌 생각하면 그 어느 곳보다도 부자유스러웠던 군대에서 그는 경전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만나게 된다.
특히 그에게 영향을 준 것은 <아함경>이었다.
1989년 제대 후, 그는 곧 바로 지선 스님 앞으로 출가를 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수난의 생활을 반복하던 지선 스님으로부터 생각대로 지도를 받지 못하고 장성 백양사로 들어가 행자생활을 시작한다.
행자생활 5개월 여, 그는 또다시 그곳에서 불교계의 모순을 발견하며, 그 갈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망치게 된다.
그의 내재된 젊음과 열정은 어쩌면 수행자의 인내에 도전하는 또다른 의미의 순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돌연변이라 일컫는다.
그 때 진관 스님의 도움을 받아 부산 문수사의 지원 스님을 은사스님으로 모시고 그 밑에서 새로이 행자생활을 마친 후, 수계를 받게 된다.
그 후, 은사스님은 강원이나 선방에 들어가 공부하기를 원하셨으나 그는 복학을 결심한다.
그 사이 그의 마음 안에는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아집과도 같았던 세상을 향한 모순과 자만의 시선이 깨지기 시작했다.
어렴풋이나마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껴안고 걸어가야 할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그이는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나서는 자보다 묵묵히 수행하는 스님과 불자들이 더욱 많다는 것을 보게 된다.
나름대로의 혜안이었다.
그렇게 혜진 스님은 자신이 해야할 일들을 찾아낸다.
아직까지 남들이 하지 않은 일, 그동안 불교계가 하지 못한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회(불교)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조그만 역할이라도 하기 위해 자원하여 불교인권위원회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눔의 집>의 주인들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게 된다.

지금 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보살피고 있는 <나눔의 집>은 역사와 사회로부터 소외받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살고 계신 집이다. 1991년 한 할머니의 증언으로 사회의 문제로 떠오른 일본군 위안부. 우리의 일그러진 역사 중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남아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그동안 숱하게 언론과 사회로부터 보도되고 관심의 집중이 되어오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세세한 설명은 이 글에서는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문제를 토대로 역사의 진실이 무엇인가는 반드시 밝히고 지나갈 일이다.
스님이 이 일에 발벗고 나선 것도 역사의 가장 큰 모순이 그대로 지나가려 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 할머니의 증언이 있었던 91년 이후, 스님이 왜곡된 역사의 모순을 바로잡고 소외된 할머니들을 위해 달려온 길은 결코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고 결코 이 나라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문제이기에 스님은 지금도 턱까지 숨이 차오르곤 한다.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일명 가셋골에 위치한 <나눔의 집>은 주변으로 얕으막한 야산을 끼고 자리잡아
있다. 뒷편의 넓은 텃밭엔 할머니들이 직접 가꾸는 채소들이 자라고 있고, 이제 막 태어난 다섯 마리의 강아지와 네 마리의 어미개가 있다.
<나눔의 집>은 대지 1천여 평에 건평 300평, 2동의 생활관과 2동의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수련관과 법당, 휴게실 등 모두 6동으로 이루어졌다.
이 땅은 퇴촌에 살고 있는 조영자 보살이 보시한 땅이다.
<나눔의 집>이 완공되기까지는 전 종정 월하 큰스님을 비롯한 뜻있는 분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되었다. 특히 월주 스님께서는 ‘나눔의 집 건립추진위원회’때부터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법인 나눔의 집’ 이사장 직을 맡아 오시기까지 음과 양으로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 계시다. 이곳에는 현재 아홉 분의 할머니와 여덟 명의 상근 직원, 두 명의 자원봉사자, 그리고 스님까지 모두 스무 명의 식구들이 살고 있다. 오는 5월말이면 중국에 살고 있는 두 분의 할머니들이 영구 귀국할 예정이다.
한 해 동안 역사관을 방문하는 인원만 해도 1만 명을 넘고 있다고 한다. 그 중에 1천5백 명 가량이 일본인이다. 현재 역사관과 나눔의 집은 따로 운영되고 있다.
<나눔의 집>은 사회복지법인 인가를 취득했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약간의 지원도 받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자립적으로 운영이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1천7백 명에 달하는 후원회원 중에서 회비를 납부하고 있는 회원이 20~30% 정도이지만 스님은 그나마 후원회원들에게 일일이 고마움을 전달할 수 없어 안타까워하신다.
<나눔의 집>을 위한 스님의 바람은 절실하다. 우선은 후원회원을 배로 늘려 자립적으로 나눔의 집을 운영해 나가는 것이다. 후원회원이 3천 명만 되어도 가능하다고 한다.
또한 할머니들을 위한 제대로 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싶다. 그래서 노인복지를 공부하는 전문인들이 많이 참여해 주었으면 한다.
이곳에 와 돌아가신 할머니만 해도 세 분, 그동안 전국에서 이름없이 돌아가신 분들은 수없이 많다.
그분들은 대개 화장을 해 산에 뿌려졌다. 스님은 1~2년 안에 할머니들을 위한 추모 공원을 조성할 예정이다. 위령비를 세우고 역사의 피해자이면서도 죄인으로 살아온 그분들의 뜻을 정리하며 기리는 작업을 해 나갈 작정이다. 아직까지도 매주 수요일이면 할머니들과 함께 일본대사관 앞 시위를 잊지 않는다.
역사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을 대변하는 것, 미래의 우리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라고 그는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는 10년 후, 아니 20년 후 출가자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예견한다.
“저를 알고 계신 스님들께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너는 수행할 스님이 아니야, 하지만 수행이라는 것이 꼭 깊은 산중에 들어가 하는 것만은 아니잖아요. 저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학문적인 공부여도 좋구,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공부란 어느 한 곳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가능하지요. 마음을 다스리는 것, 세상을 알아나가는 것 자체가 공부가 아닐까요. 다른 스님들이 선불교의 맥을 이어나가는 것과 더불어 저는 대중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 줄 수 있는 실천불교를 펼쳐갈 생각이예요.
특히 이 사회로부터 소외된 자들을 위해 일하고 싶어요.
솔직히 행자 시절 빼놓고 사찰 생활을 해보지 못했잖아요. 때로는 깊은 산중의 사찰이 그립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은 갖고 있지 못하지만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삶을 잊지 않고 소외된 구석, 어디에선가 열심히 정진하고 있겠지요.
전 아직 젊잖아요. 하하하…”
스님의 웃는 모습은 천진하다.
스님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출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느낌이 샘솟듯 일어난다.
불교란 본래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나눔의 집 후원안내
(0347) 768-00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