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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림열반상/- 부처님이 남긴 이십 년 그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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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원철 2000년 05월 219호
해인사에서 국도를 따라 대구로 가다보면 고령 못 미쳐 ‘쌍림’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아마 동네 어디엔가 큰 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는 모양이다. 부처님 열반지의 사라쌍수 처럼, 쌍림 즉 사라쌍수는 부처님 열반 소식에 나무가 하얗게 말랐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학림鶴林이라고 번역했다. 나무가 하얗게 마르는 걸 학이 가지에 가득하게 앉은 것으로 비유한 그 적극적 상상력은 가히 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까만 숯도 언젠간 하얀 눈을 이고 있던 나무가지였겠지.’라는 일본 시가詩歌처럼. 언젠가 팔공산 기기암을 갔더니 마당에 두 그루의 큰 나무가 하얀 꽃을 가득히 달고 서 있었다. 그걸 보고 학림이라는 사라쌍수를 생각했다.
부처님은 돌아가시면서 장례의 모든 절차를 재가자들에게 맡긴다고 유언하셨다. 법왕으로서 국왕의 장례식에 준하도록 아울러 부탁했다. 강원에서 치문과정을 배울 때 서울 강남의 봉은사 영암 스님 다비식에 모든 산내대중이 참여하게 되었다. 스님께서는 해인총림의 기초를 놓으신 초창기 공덕주이시다. 내가 최초로 본 큰스님 다비식이었다. 의식의 장엄함은 국장國葬을 연상시키고도 남았다. 이렇게 장례식이 화려한 것은 부처님의 유언 때문이라는 것을 뒷날 알게 되었다. 그 이후 오늘날까지 이 유언은 그런대로 잘 지켜지고 있는 편이다. 덤으로 포교효과까지 함께 거두고 있다. 하지만 지켜지지 않는 유언도 있다. 부처님 유언대로 하자면 출가자의 다비식은 재가자의 몫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수많은 다비식을 보아 왔지만 재가자가 주관하는 출가자의 장례식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다비장은 단순한 장례공간이 아니라 공부하는 곳이다. 병원 영안실이나 화장터에서 망자를 위해 염불이라도 다녀오는 날은 정말 무상無常을 실감하게 된다. 재산과 명예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포함한 모든 소유물을 버려둔 채 한 줌 재만 남기고서 허공으로 돌아간다.
눈 밝은 선사들은 부처님의 다비장에서도 후학들을 위하여 화두를 제시했다. 입관入棺이 이미 끝나버렸는데 뒤늦게 도착한 가섭존자가 부처님의 법신 뵙기를 원하니 그와 그 일행들을 위하여 ‘관 속에서 두 발을 내밀어 보였다’는 곽시상부槨示雙趺’가 바로 그 공안이다.
중생의 마음은 부처님께서 오래 이 세상에 머물러 주시기를 바라는 건 당연하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뜻을 세 차례나 아난존자에게 말씀했다고 한다. 당연히 시자는 그 때 마다 ‘오래오래 이 세상에 머무시어 무수한 사람이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하셔야지요.’라고 간곡히 부탁했어야 했었다. 그런데 시자는 무슨 일인지 그 때마다 가만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가섭존자는 이 부분을 서운케 여겼던 것이다. 아난은 부처님의 그 말씀을 듣지 못했노라고 변명하고 있다.
“사형스님! 내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마魔가 내 마음에 붙어 나로 하여금 부처님의 그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여 이 세상에 더 머무시도록 청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것이 아난이 말리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아난은 이 일로 대중 앞에서 참회를 하게 된다.
하지만 선종에서는 이를 적극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즉 세존은 본래 백수白壽를 누리셔야 했다. 그러나 일부러 여든 살에 열반에 드셨다. 그 이유는 당신이 누릴 이십 년의 복을 남겨서 남아있는 제자들에게 돌려주기 위한 자비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세존 이십 년의 남아있는 그늘(유음遺蔭)’이라고 부른다. 그 복으로 진리의 수레바퀴가 오늘까지 굴러 올 수 있었다는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다.
꽃비 내리는 초파일 가야동산에서 부처님의 열반을 논하려는 것은 시공너머 ‘비람강생상’ 속에서 ‘쌍림열반상’까지 읽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긴 모든 것이 해석이라는 안목문제가 아니였던가.□